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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럴듯한 제이 Nov 01. 2020

필름 고르기가 너무 어려워서 아무거나 사봤다

빠이 ; 흑백 필름(lomograpy lady gray 400 film)

흑백 필름과의 만남은 아주 담백했다. 8월의 여름, 서울의 로모그래피 매장에서 만난 레이디 그레이(lady gray) 필름은 이름이 예뻐서 나의 눈길을 끌었다. 여러 가지 필름에 한창 관심이 많을 때였는데, 당시의 나는 흑백 필름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필름 카메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일상의 장면들이 2차 창작물로 변환될 때 생기는 색감의 왜곡이 너무 예뻤기 때문이었기에, 아예 그 색감을 없애버리는 흑백 필름은 심심하고 재미없게 느껴졌었다.

한 때 자주 들렀던 동네에 몇 남지 않은 사진관의 사장님께서 흑백 필름을 권유해주실 때만해도 구시대적 유물에 비싸기만 할 뿐인 흑백 필름을 사람들이 왜 사용하는지 의문이었다. 사장님께서는 컬러 필름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흑백 필름으로 많이 넘어온다고 하셨다. 그 말이 여태 기억에 남아있는 것을 보면, 나도 마음 한편에는 흑백 필름을 사용해볼 여지를 남겨두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레이디 그레이 필름을 만나자마자, 합리적인 가격도 마음에 들었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필름의 이름이 취향에 들어맞았고, 패키지 디자인 또한 필름의 결과물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필름의 진면목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었다. 패키지에 인쇄되어있는 레이디 그레이 필름의 결과물을 보자마자 깨달았다. 내 생각이 정말 짧았다. 짧은 기간 동안 조금 미놀타와 함께하는 일에 익숙해졌다고 우쭐해져서는 필름을 마음대로 평가절하하다니. 셀 수 없이 많은 필름 카메라의 종류처럼 필름의 종류도 셀 수 없이 많고, 그에 따른 매력도 가지 각색인 것을. 그저 취향의 차이일 뿐인 필름 제각각의 다른 점들을 내 멋대로 깍아내리고 비판했다.

필름 카메라의 결과에 일희일비하며 잠깐 미놀타를 '애증의 미놀타'라고 불렀던 과거의 내가 떠올랐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흑백 필름들에 대한 선택권이 흑백 필름의 가짓수만큼 늘어났다. 흑백 필름도 컬러필름과 마찬가지로 ios가 나뉘어 있었으며, 필름마다 풍기는 인상이나 색감이 달랐던 것이다. 그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되다니... 순간 레이디 그레이 필름의 육각형 종이 포장이 광채로 빛났다. 건조하지 않고 풍부하며, 부드러우면서 따뜻한 질감의 컷들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잠시 고민하다 결국 그날 필름만 6만 원 치 넘게 구입했다. 하지만 구입하기까지 길었던 여정은 필름이 사용되기까지 꽤 오래 지속되었다. 그때 구입했던 필름 중에 사용하지 못하고 그저 보관만 해놓았던 필름은 레이디 그레이가 유일했다.

사용해보기로 마음먹었던 건 반년이 지난 이듬해 1월, 치앙마이 한 달 살기를 떠나면서부터였다. 아끼다가 유통기한이 지나 필름의 원래 색감이 변하는 것보다는 앞으로 언제 살아보게 될지 모를 태국의 북부 도시에서 쟁여놓았던 필름들을 마구마구 사용해보자는 취지에 부합하면서 레이디 그레이도 한 달의 여정을 위한 캐리어의 한구석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하지만 역시 흑백 필름에는 여행 중에도 왠지 손이 가지 않았고 미루다 미루다 치앙마이의 한 카페에서 판매하는 필름을 다섯 통 정도 쟁이고, 또 필름을 7통 정도 채운 후에야 사용되게 되었다. 2월에 끝나는 한 달 살기의 마무리 단계에 일주일 정도 떠나게 된 빠이를 가면서부터 레이디 그레이의 첫 컷이 채워졌다.


빠이는 태국의 북부에 위치한 치앙마이라는 도시에서 3시간 정도 구불구불한 라면 면발 같은 762개의 고개를 지나야 도착할 수 있는 산속에 위치한 작은 시골마을이다. 아직 개발은 덜 되었지만, 자연 속 휴양을 위해 일부러 찾는 관광객들이 많은 편이며 예전부터 배낭여행을 즐기는 이들이라면 이미 한 번쯤다녀와서 꼭 가보라고 추천해줄법한 여행지이다. 물론 나도 치앙마이에 살고 있던 지인의 추천으로 일주일 정도의 시간을 빠이에서 쉬며 보내기로 마음먹고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숙소를 예약해놓았던 상태였다.

빠이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초록 초록한 곳이었는데, 거의 산을 깎아 만든 마을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온 사방이 전부 산과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웬만한 길은 걸어서 이동이 가능할 정도였는데, 또 어떤 곳은 걸어서는 절대 갈 수 없는 곳들도 있었다. 택시가 따로 다니지 않았기에 멀히 이동하기 위해서는 태국의 도시에서는 버스처럼 타고 다니던 썽태우를 개인택시처럼 불러서 타고 다녀야 했다.




치앙마이로 향하는 길을 나타내는 표지판이 서있다.




 치앙마이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나 싶다가도, 밤에 열리는 자판상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시장으로 가면 어김없이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북적북적 모여있는 모습이 보였다. 타국에서 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괜히 반가웠지만, 함께 여행을 온 일행이 있었기 때문에 팬드럼 연주는 하는 그의 모습을 다른 외국인들과 함께 지켜보는 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치앙마이보다 더 북쪽에 위치한 산골 마을이다 보니 밤이 되면 무척이나 추웠다. 낮에 입고 있던 옷을 입고 밖에 나갔다가는 감기에 걸리기에 딱 좋은 조건이었기 때문에 언니와 나는 무장을 하고 밖을 나가야 했다.

지금은 없어진 재즈카페에 매일매일 들리며 맥주 한 잔에 빠이에 살고 있는 예술가들의 재즈 음악을 안주삼아 하루의 마무리를 했다. 별 것 하지 않아도 숙소 앞에 걸려있는 해먹에 누워 언니와 함께 울고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들이 좋았다. 서로 다른 각자의 사정들을 털어놓으면서 위로받았던 시간이었다. 치앙마이에서는 그 도시를 즐기며 관광을 하고, 새로운 가게들과 먹거리에 집중하는데 더 초점을 뒀다면 빠이에서는 좀 더 서로에게 인간대 인간으로서 집중 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빠이라는 작은 도시가 주는 이미지도 그랬다. 아무것도 하지않기 위해 최적화된 도시였다. 놀거리가 한정되어있는 곳이기에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아마 애초에 세웠던 계획처럼 혼자 떠났더라면 조금 더 조용히 잔잔하게 지내다 올 수 있었겠지만, 언니와 함께 지냈기 때문에 누릴 수 있었던 것들이 훨씬 많았던 것 같다. 난 치안에 굉장히 예민하고 무서움이 많은 사람이라 밤에 거리를 다니거나 술을 혼자 마시다 숙소로 돌아가는 일은 하지 못했을텐데, 둘이 되니 훨씬 안심이 되어서 언니와 함께 하루를 더 길게 보낼 수 있었다. 물론 치앙마이의 치안은 한국만큼이나 좋은 편이어서 큰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먼 타국에서 홀로 느끼는 불안함의 체감은 컸을 것이기에 뒤늦게 합류해준 언니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이 점 말고도 둘이서 하는 여행의 장점이 많지만 각설하겠다.




매일 지나다녔던 빠이의 거리




 사실 처음 치앙마이 여행을 계획하면서 상상했던 치앙마이의 모습은 빠이와 가까웠다. 치앙마이에 사는 지인 부부가 놀러 오라고 했을 때도 난 치앙마이가 빠이 같은 모습인 줄 알았다.

아주 작은 태국의 북부 마을에서 거의 모든 거리는 걸어서 이동이 가능할 정도이고, 가게들은 옹기종기 붙어서 매일 그 앞을 지나다니며 시시콜콜한 하루를 어느 한적한 카페에서 보내는 상상.

물론 치앙마이에 대해서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그런 상상은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치앙마이는 아주 넓고 거대했고, 나름대로 발전된 도시여서 걸어서 이동하다가는 더운 한낮에는 탈진하기 딱이었다. 게다가 도로는 얼마나 넓고 차가 많은지, 도보로 이동하기에 아주 불편했으며 매연을 마시는 건 일상이었다. 많은 오토바이와 썽태우와 자동차들이 뒤섞여 다니는 도로 옆은 공기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런 도시생활을 보름 정도 하다가 넘어온 빠이는 정말 천국 같이 느껴졌다. 첫날 도착했던 시간은 저녁이었는데, 저녁에 알록달록 불이 켜진 상점가를 캐리어를 끌며 터덜터덜 지나다가 언니와 함께 소리 질렀던 기억이 난다. 762개의 악명 높은 고개를 지나기 위해 독하디 독하다는 태국의 멀미약을 먹고 약에 취해있던 그때의 나를 깨워주던 장면들. 아쉽게도 미놀타로 남기지는 못했지만, 기억 속에는 온전히 저장이 되어있다.


빠이의 낮과 밤은 마치 지킬 앤 하이드의 얼굴처럼 획획 바뀌어서 마치 두 개의 다른 도시를 여행하는 듯한 착각을 하게 했다. 그래서 더더욱 낮에도 밤에도 언니와 뻔질나게 빠이의 거리를 쏘다녔는지도 모른다.

언니도 빠이가 마음에 들었는지, 나중에 여행 일정이 모두 끝난 후에 빠이에 남아있기로 하고 난 다시 치앙마이로 돌아갔었다. 언니는 퇴사 후에 끝을 정해놓지 않은 여행을 온 상태였기에 당시에 언니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 후로 꽤 오래 있다가 개인 사정으로 여행을 정리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또 본인의 삶을 야무지게 지내고 있는 상태이다. 그런 용기가 부럽기도 했다. 아마 나였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면, 난 베트남에서의 외노자 시절 상사와의 갈등으로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서 1년을 겨우 채우고 도망치듯 한국으로 돌아왔었으니까, 언니처럼 몇 년을 버텨내며 나 자신을 지켜내지 못하지 않았을까? 내용은 달랐지만 두 사람 모두 개인적인 아픔이 있었기에 그만큼 공감대가 서로의 사이에 든든히 자리하고 있었다. 동생이 아니라 언니와 함께한다는 사실도 여행하는 내내 안정적인 마음을 유지하는데 한 몫했다.

치앙마이에서 우쿨렐레 레슨을 하다 만난 동생 한 명과도 친해져서 셋이서 치앙마이 여행을 내내 지속했던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참 신기한 일이고. 그 동생과 언니도 친해져서 아직까지 셋이서 주기적으로 만나 관계를 유지하며 치앙마이 여행의 추억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사실 또한 감사한 일이다. 그때는 알지 못했던 존재의 소중함이나 함께할 수 있음에 대한 감사함은 언제나 뒤늦게 우리에게 찾아온다. 마치 필름 카메라의 장면들처럼.







빠이의 밤은 턱이 딱딱 부딪힐 정도로 추웠지만 낮은 밤의 추위만큼이나 뜨거웠다. 뙤약볕 아래에서 너무 괴로울 때는 지나는 길 옆에 보이는 카페 아무 데나 들어가서 열기를 식히고 다음 일정 계획을 세웠다. 계획이라 해봤자 거창한 게 아니었다. 다음 식사는 어느 가게에서 하면 좋을지, 오늘 저녁에는 어떤 바에 가서 한 잔 걸칠지, 아까 봤던 가게의 옷을 사는 게 좋을지 같은 아주 사소한 것들을 의논했다. 먹고 마실 것들과 놀이에 그만큼 신중했던 적이 있었을까? 빠이에서의 일정은 대략적으로 며칠 동안 머무르는 것만 정해놓았기 때문에 빠이의 관광지들을 둘러볼 수 있는 택시투어의 전반적인 루트도 언니와 함께 골라 머리를 굴려야 했다. 그런 싱거운 고민들을 매일매일 하는 것이 즐거웠다. 못먹어봤던 음식이나 언니가 먹는 메뉴들 중에 맛있어 보이는 것이 있으면 다음 메뉴에 시켜 먹어보기도 하고, 함께 나눠먹기도 했다.

관광지를 정할 때는 하루 안에 우리가 가고 싶은 곳을 전부 들를 수는 없었으므로 조율해서 동선을 짰어야 했는데, 빠이에서 갈 수 있는 천연온천의 종류부터 몇 가지나 되었기 때문에 카페에서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숙소의 호스트가 준 지도를 이용해 장소를 표시하고 휴대폰으로 여기저기 검색해보았다.







카페의 2층은 게스트 하우스로 쓰는 모양이었는데, 숙소에서 숙박하는 듯한 외국인 가족들은 옆에 보이는 수영장에서 해맑게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이런 날씨에 저렇게 바로 시원한 물속에 들어갈 수 있는 숙소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난 한 동안 카메라를 꺼내 이곳저곳을 찍었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빠이의 초록 초록한 곳들을 찍기 위해서는 흑백 필름보다는 컬러 필름이 더 적절했을 것 같다는 점이다. 일상적인 사진이나 인물사진은 그나마 느낌이 좋았는데, 하필 빠이에서 흑백 필름으로 교체를 하는 바람에 36컷을 채울 때 까지는 계속 그렇게 촬영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강 건너에서 보이는 카페의 풍경




흑백 사진도 꽤 멋지긴 하지만, 왠지 색감이 있으면 더 푸릇푸릇 예뻤을 것 같은 사진들이다. 빠이에는 큰 강이 하나 가로질러 흐르고 있는데 이름은 심플하게 빠이 강이다. 숙소에서 나와서 조금만 걸으면 강이 있는데, 그 강에서 건너편을 바라보면 저렇게 카페에 여행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강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모습을 매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강 옆의 잔디 언덕 위에는 어김없이 태닝을 하러 나온 수영복을 입은 외국인들이 선글라스를 끼고 하나같이 책을 읽으며 여가를 즐기고 있었다. 그 모습이 참 멋지고 예뻐 보여서 사진을 찍어도 될지 물어볼까 고민을 정말 많이 했는데, 역시 용기가 나지 않아서 결국 멀리서 담은 장면만 남아있다.




빠이강 위의 밤부 브릿지에서 담은 강의 풍경



허세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무심해도 멋스러운 게 진짜 멋이라는 생각 때문에 너무 의도적이지 않으면서도 잘 찍힌 사진을 얻고 싶었다.

미놀타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그만큼 욕심이 마음속에 똬리를 틀었다. 욕심은 적정 선을 초과하면 내 마음을 갉아먹기 시작하는데 난 그 시기에 하던 일을 손 놓아 포기해버리는 나쁜 습관을 가지고 있다. 지금도 그러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편이지만, 아무 생각 없이 집중할 수 있어 좋아했던 필름 카메라에 점점 욕심이 생기면서 좋은 장면을 담는 일에 욕심이 생겼다. 사진이 예쁘게 담길 장면, 장소, 각도가 아니면 셔터를 누르는 일에 주저했고 그럴수록 무심코 지나치는 장면들도 많아졌다. 무수히 많은 장면들을 아무 생각 없이 담아내는 시간들이 소중했던, 그래서 미놀타와 더욱 각별해질 수 있었던 시간들이 무색해지며 실패 확률이 낮은 장면들에 집착했다. 무슨 일이든 그렇겠지만, 사진 역시 처음부터 잘 담아낼 수 없고 카메라와 친해지는 일정 양의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무조건 많이 찍어보는 것이 좋다. 경험만큼 좋은 스승은 없고, 경험을 뛰어넘는 실력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실을 철저히 깨닫게 해 준 것이 바로 미놀타였음에도, 나는 또 그렇게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었다. 흑백 필름을 빠이에서 괜히 감아가지고 낭패를 봤다는 둥, 역시 흑백 필름은 인물사진을 찍을 때만 사용했어야 된다는 둥 내가 담은 장면들을 보며 후회가 막심했다. 할 수만 있다면 다시 시간을 돌려 빠이로 되돌아가고 싶을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고 본 흑백 필름으로 담은 장면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멋지게 자신만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하필, 빠이에서 멀리 보이는 풍경사진을 찍어대는데 흑백 필름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초록 초록한 자연이 즐비한 곳에서 흑백이 웬 말인가 싶지만, 사진에 정답이란 없으니까 말이다.

흑백 필름은 고유의 멋이 있다. 사진을 깊이 있게 보는 시선을 가질 수 있게 해 준다. 형형 색색의 빛으로 구성된 컬러 필름의 사진은 시야를 넓어준다면 흑백 필름은 선과 면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하는 은은한 매력이 있다. 사진 속 인물의 눈빛과 표정, 움직임과 선 하나하나에 집중이 된다. 흑백 필름으로 담은 풍경도 마찬가지다. 오롯이 장면 속 풍경에 눈을 두고 한 땀 한 땀 사진의 깊은 바닥을 짚어보며 감상할 수 있다.


빠이에서 찍은 사진을 처음 보고 좌절했을 때는 물론 사진에 대한 감각이 전무한 나의 실력 탓이 제일 컸다. 물론 리스크를 감수하는 것보다는 안전하고 길게 가는 것이 오랫동안 필름 카메라를 즐기는 일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 비싼 필름이나 익숙하지 않은 필름은 웬만하면 적응이 된 후에 사용해도 늦지 않다. 필름 카메라가 내 손에 착 붙을 때까지 익숙해지고 난 후에 여러 가지 필름들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최상의 결과물을 내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러 가지 필름과 카메라들을 시도해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어떤 효율성을 따지지 않고 본인의 취향에 맞추어 기호에 맞추어 비효율적이면서 어쩌면 낭비일지도 모를 도전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록 스스로 실패했다고 느낄만한 장면들일지라도 고유의 에너지와 담은 이의 에너지가 섞여 이우러 지는 그 찰나를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잠깐의 시선을 박제하여 과거를 가둬두는 낭만적인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두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도전해보는 필름의 수만큼이나 각자의 이유들이 즐비하기에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는 일은 일상을 위한 환기를 넘어선 일탈일 것이다. 익숙한 것들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안정감을 울타리 삼아 살아가는 우리지만, 익숙치 않은 것들을 시도해봄으로써 역설적으로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낄 수 있다. 그 짜릿한 감각들을 순간순간 느끼기 위해 난 또 여행길에 어김없이 미놀타와 함께 나선다. 그리고 이제는 어떤 장면이든 가치 있음을 안다. 살아가는, 살아가기 위한 여정 속에 나라는 존재가 담은 하나뿐인 장면이기 때문에, 그 이유로 말미암아 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에 어쩌면 지금은 의미 없을 지모를 장면들에 집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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