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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롯 레터 Plot Letter Apr 10. 2022

이 사람이 피카소 라이벌이었다고?

Next Level~ 야수 같은 그림을 느껴

▲ 살롱 도톤느에 출품되었던앙리 마티스의 <모자를 쓴 여인> (1905), 출처: henrimatisse

이런 그림은 처음이야! 

1905년 파리, 무명 예술가들의 전시인 ‘살롱 도톤느’가 열렸어요. 이 전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양식의 그림을 선보이며 관객의 눈을 사로잡았죠. 당시에는 대상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묘사하는 인상주의*와 사실주의*가 미술 사조*를 지배하고 있었는데요. 살롱 도톤느에 전시된 그림은 이와 다르게 자연에서는 보기 힘든 낯선 색채를 사용해 강렬한 인상을 주었어요. 피부는 옅은 보라색, 음영은 파란색과 초록색인 데다가 인물이 어디에 있는지 도통 알 수 없게끔 배경에는 여러 색깔이 뒤섞여 있었죠. 전시를 방문한 한 비평가는 그림들이 마치 야수와 같다고 말하기도 했는데요. 그의 비평은 전례 없는 화풍에 대한 비하의 의도를 담고 있었지만, 그 영향으로 이름 없던 사조에 ‘야수파’라는 이름이 붙게 됐다고.


*인상주의: 19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미술 사조. 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인상을 포착함.

*사실주의: 19세기 중반에 시작된 미술 사조로 현실을 왜곡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중시함.

*사조: 한 시대의 일반적인 사상의 흐름


앙리 마티스와 그의 친구 드랭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야수파는 기존의 미술 사조가 갖고 있던 고정관념을 벗어던지고자 했어요 그러나 이러한 목적 외에 야수파가 공유하는 고유한 화풍은 없었기 때문에, 살롱 도톤느를 시작으로 단 세 차례의 전시만을 개최한 뒤 자연스럽게 흩어졌어요. 그럼에도 이들의 활동은 20세기 이후의 미술계에 혁신을 가져다주었다고 평가받는데요.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을 중시했던 전통을 뒤엎고, 화가 개인의 감정을 중시하는 표현주의*의 바람을 일으킨 것이 바로 야수파였거든요.


*표현주의: 20세기 초에 일어난 미술 양식. 대상의 객관적인 관찰보다 화가의 주관적인 감정을 중시함.


활동기간이 짧았음에도 미술계에 큰 영향을 끼쳤군요! 20세기 미술에 새로운 바람을 안겨다 준 야수파의 창시자, 앙리 마티스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 앙리 마티스, 출처: art-matisse

내가 그리는 것은 사물이 아니다 

놀랍게도 마티스는 처음부터 미술을 전공하지는 않았어요. 그는 파리의 대학에서 법률을 전공해 자신의 고향에 있는 법률사무소에서 일했죠. 그러던 그의 인생에 터닝포인트가 찾아오는데요. 태어날 때부터 허약한 체질이었던 그가 취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맹장염을 앓게 된 것! 수술 후에도 오랜 시간 병상에 누워있던 그에게 어머니는 미술 도구를 선물로 주었죠. 이를 계기로 22살의 나이에 회화와 데생*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 마티스는 일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기로 결심했어요. 병상에 있던 그에게 그림이란 일종의 '천국'이었던 거죠.


*데생: 형태와 명암을 위주로 단색으로 그린 그림. 드로잉 또는 소묘라고도 함.


▲ 좌: 1895년 귀스타브 모로의 수업에서 그린 그림,우: 1898년에 그린 정물화, 출처: art-matisse

마티스가 그림을 배우기 위해 들어간 국립 미술 학교는 전통적인 회화 양식을 주로 가르쳤기 때문에, 그도 처음에는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전통 고전주의 양식을 배워야 했어요. 하지만 그곳에서 화가 개인의 개성을 중시하는 귀스타브 모로*를 스승으로 만나면서 점차 자신만의 화풍을 발전시켜나갔죠. 그리고 1896년, 화가 존 러셀*에게 인상주의 작품을 소개받은 후 다채로운 색깔을 활용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데요. 파격적인 색채를 사용하여 조화롭고 균형 잡힌 작품을 만들어 내는 재능 덕분에 색채의 연금술사로 불리기도 했다고.


*귀스타브 모로: 19세기 프랑스의 상징주의 화가. 주로 신화, 종교적인 주제를 그렸음.

*존 러셀: 19세기에서 20세기까지 유럽에서 활동한 호주 출신의 인상주의 화가.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자유롭게 자신만의 화풍을 구축할 수 있었던 거네요~ 마티스의 숙명의 라이벌도 아주 유명한 사람으로 알고 있어요!

자존심 강한 두 천재의 대결

맞아요! 마티스의 라이벌은 바로 그와 동시대에 활약했던 화가, 피카소였어요. 12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마티스와 피카소는 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라이벌 관계를 유지했죠. 두 화가가 처음 만나게 된 건 마티스와 피카소의 후원자가 주최한 만찬 자리였어요. 당시 마티스는 야수파의 거장으로 이름을 알린 반면, 피카소는 무명의 화가에 불과했죠. 그럼에도 마티스는 피카소의 그림을 누구보다 높이 평가했어요. 이후 두 사람은 서로의 작품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이어 나갔어요. 그러나 1912년, 피카소가 <아비뇽의 처녀들>을 발표하고 유명세를 얻으면서 둘의 관계에는 경쟁심이 싹트게 돼요.


▲ 좌: 마티스 <꿈> (1940), 출처: art-matisse, 우: 피카소 <노란 머리의 여인> (1931), 출처: artsy

비록 그들은 경쟁 관계였지만, 20세기 미술의 새로운 장을 연 동시대의 작가로서 서로의 작품에 영향을 주기도 했어요. 예를 들어, 마티스의 <꿈>과 피카소의 <노란 머리의 여인>은 포즈와 구도 모두에서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죠. 그러나 화풍에서는 차이를 보이는데요. 피카소의 그림이 형태에 주목하고 있다면 마티스의 그림은 주로 색채에 주목하죠. 서로를 견제하는 동시에 동경하는 두 사람은 합동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했는데요. 마티스는 자신의 그림이 피카소의 그림에 비교될 것을 두려워할 정도로 피카소의 작업물을 칭송했어요. 또 피카소는 마티스 사후, 그림의 뼈대를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 마티스였다는 말을 남겼다고.


라이벌인 서로가 있기에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관계였네요! 그런데 마티스는 회화의 다른 작업 방식에도 관심을 가졌다던데요?


▲ <폴리네시아, 하늘> (1946), 출처: art-matisse

색, 선, 면의 매력 

야수파가 해체된 이후에도 마티스는 자연의 색채를 담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어요. 그러나 대장암 수술을 받게 되면서 그의 그림에는 또다시 변화가 찾아오죠. 수술로 인한 합병증으로 더 이상 을 쥘 수 없게 된 거예요. 그런데도 그는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붓을 사용하는 대신, 색종이를 오려서 붙이는 콜라주 작품을 만들기로 한 거죠. 결과물을 미리 구상하지 않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잘라 만들어진 작품들을 모아 <재즈>라는 이름의 작품집을 출판하기도 했다고.


▲ <나디아> (1948), 출처: dia

캔버스에 그려진 검은색 선 드로잉의 이 그림은 여러분에게도 익숙할 거예요. 마티스는 화려한 색채가 이목을 끄는 작품만이 아니라, 최소한의 선으로만 이루어진 그림을 그리기도 했어요. 붓 몇 획과 판화 기법*을 사용해 만들어진 그림은 강렬한 색도, 자유롭게 구획된 면도 없었지만 대상을 알아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죠. 이런 그림들은 시집의 삽화로 사용되기도 했는데요. 그는 삽화를 맡아 그릴 때, 글과 잘 조화될 수 있도록 붓의 세기를 조절했다고 해요. 조화를 위해 덜어낸,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마티스의 그림이 오늘날 인테리어를 위한 작품으로 사랑받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판화 기법: 그림이나 글씨를 새긴 판을 이용해 종이 또는 천에 인쇄하는 미술 기법.


마티스는 정말 다양한 화풍으로 그림을 그려왔네요! 그런 그가 작품 활동을 하는 내내 유지한 가치관이 있다면서요?


▲ 침대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앙리 마티스,출처: discover.goldmarkart

삶의 기쁨을 그리는 화가 

마티스는 살아있는 동안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을 정도로 절망적인 시기를 살아가야 했어요. 그 시기만큼 마티스의 생애 역시 순탄하지 않았죠. 취직하자마자 에 걸려 병상에 누워야 했고,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화가의 일에 도전했어요. 또 말년에는  수술의 여파로 붓을 쥘 수 없게 되었죠. 하지만 그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항상 포기하지 않고 다른 방법을 찾았어요. 그래서인지 그의 수많은 그림에서는 하나의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는데요. 바로 언제나 근심 없이 즐길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는 점이라고.


▲ <삶의 기쁨> (1906), 출처: henrimatisse

전쟁이 일어나 전 세계의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도, 그리고 마티스 자신이 힘든 시기를 겪고 있을 때도 그는 절망을 그리지 않았어요. 오히려 그의 작품이 담고 있는 삶의 모습은 평화롭고 고요하죠. 지치고 힘든 사람에게 '안락의자 같은 작품'을 그리고자 했던 마티스. 이것이 바로 그의 작품이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고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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