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플롯레터 없이 못 살죠?
영국에 있는 이모가 살해당한 후, 유일한 상속자가 되어 저택을 물려받은 폴라. 성악 공부를 위해 떠난 이탈리아에서 그레고리라는 피아니스트와 사랑에 빠진 폴라는 그와 함께 영국의 저택에서 살림을 꾸리죠. 행복할 것만 같았던 결혼 생활도 잠시, 남편 그레고리는 어느 날부터 이상한 일을 꾸며요. 바로 작은 물건들을 감춘 후, 범인으로 그녀를 지목하고 타박하기 시작한 것!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폴라는 건망증에 시달리고 좀도둑질을 하는 여자가 되어버리죠. 설상가상으로 그레고리는 그녀가 밖에서도 실수를 저지른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녀를 이상하게 볼 거라는 어처구니없는 핑계를 대며 폴라의 외출을 금지하기까지 해요. 하지만 정작 일을 꾸민 그레고리 본인은 매일 밤 외출을 즐긴다고.
사실 이 모든 건 폴라의 이모가 가지고 있던 보석을 차지하기 위한 그레고리의 치밀한 계략이었어요. 그레고리는 폴라의 이모를 직접 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보석을 찾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그는 상속자인 폴라에게 계획적으로 접근한 거였죠. 그레고리가 밤마다 몰래 저택의 보석을 찾기 위해 위층에 올라가 가스등을 켜는 동안, 아래층에 있는 가스등이 어두워지고 수상한 인기척이 폴라의 귀에 들려와요. 어딘가 꺼림칙함을 느낀 폴라는 그레고리에게 가스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죠. 하지만 그레고리는 그녀가 과민반응하는 것이라며 되려 그녀를 몰아가요. 자신이 위층 가스등을 켜서 아래층 가스등이 희미해졌다는 사실을 들킨다면 위층에서 무엇을 했는지 설명해야 했으니까요. 결국 폴라는 자신의 기억력과 판단력을 의심하는 상황까지 이르고, 자신이 환자라고 믿으며 모든 것을 그레고리에게 의존하게 된다고.
그러던 어느 날,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브라이언 경위가 집으로 찾아와요. 그 역시 폴라와 대화를 나누던 중 갑자기 희미해지는 가스등을 보았고, 위층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는 것에 공감하며 그녀는 미치지 않았다고 이야기해주죠. 게다가 가스등이 희미해졌다는 건 그레고리가 저택 어딘가에서 다른 가스등을 켰음을 증명하는 거였어요. 이를 통해 브라이언 경위는 사건의 진상을 밝혀나가기 시작했죠. 이후 그레고리는 폴라의 이모를 살해한 혐의로 포박당하는데요, 그레고리는 폴라에게 본인을 도와달라며 간절히 청하죠.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레고리의 계략임을 깨달은 폴라는 “미친 여자가 어떻게 남편을 돕죠?”라는 말을 하며 영화 <가스등>이 마무리된다고.
어떻게 보석 하나 때문에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릴 수가 있는 걸까요? 너무 무서워요..그런데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가 이 영화에서 비롯된 것이라면서요?
맞아요. 사실 희곡과 영화에서부터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진 않았어요. 미국의 정신 분석가 로빈 스턴이 자신의 저서 <가스등 이펙트>에서 처음으로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를 정의했죠. 가스라이팅은 가해자가 상대방의 심리와 상황을 조작해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든 후, 피해자에게 지배력을 행사하며 상대를 파멸에 이르게 만드는 현상을 뜻해요. 가스라이팅은 두 사람의 관계에 신뢰가 기반이 되어야 가능하죠. 그래서 더욱더 끔찍하고 악랄한 심리 조작 수법이라고.
가스라이팅은 크게 불신, 자기방어, 억압의 3단계로 묘사되는데요, 이 과정은 앞서 소개해드린 영화 <가스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어요. 그레고리가 숨긴 브로치를 폴라가 자신이 잃어버렸다고 사과하는 장면을 보면, 스스로의 행동을 의심하는 불신이 시작됐음을 알 수 있죠. 그 후에 폴라가 희미한 가스등과 생생한 발소리를 직접 보고 들었다며 그레고리에게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장면은 자기방어 단계를 나타낸다고.
하지만 억압의 단계까지 가게 되면 사회적으로도 점차 고립되어 피해자는 가해자로부터 벗어나기 힘든 상태가 돼요. 실제로 브라이언 경위가 방문한 이후, 그레고리와 하녀는 저택에 사람이 방문한 적은 없다며 시치미를 떼죠. 그러자 폴라는 자신이 꿈을 꾼 것이라 여겨버려요. 이렇듯 영화 <가스등>에서는 가스라이팅의 피해자인 폴라가 무너져가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치밀하게 묘사했죠. 그레고리가 상대를 조종하고, 심리적으로지배하는 과정의 디테일 또한 관객들의 몰입을 도왔어요. 영화 <가스등>이 평론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아직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가 낯설어서 알쏭달쏭해요... 혹시 대중적으로 알려진 작품에서도 예시를 찾을 수 있을까요?
여러분도 아실 만한 유명한 작품에서도 가스라이팅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데요, 대표적인 예시로 디즈니의 영화 <라푼젤>이 있죠. <라푼젤>에서는 마녀 고델이 라푼젤에게 가하는 가스라이팅이 생생히 그려지고 있어요. 라푼젤은 어머니인 왕비가 마법의 꽃을 달여 먹고 낳은 아이인데요, 덕분에 머리카락에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마법을 지닌 채 태어나죠. 이를 알게 된 마녀 고델은 라푼젤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젊음을 유지하고자 라푼젤을 납치해 성에 가두고 키우기 시작한다고.
고델은 라푼젤에게 '너는 쓸모가 없고, 제대로 하는 일이 없다'며 그녀를 수차례 비하하죠. 라푼젤이 성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 고델은 바깥세상은 위험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성 안에 있는 것이 안전하다고 겁을 주기도 해요. 깡패, 폭력배, 뱀, 전염병 등 온갖 무시무시한 것들이 도사리고 있다면서 말이죠. 영화 <라푼젤>에 삽입된 OST 'Mother Knows Best(엄만 다 알아)'라는 노래가 고델의 가스라이팅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고.
https://www.youtube.com/watch?v=-7jWt3JvJto
그런데 가스라이팅은 가해자의 비난만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에요. 영화 <가스등>에서는 폴라가 잘못했다고 사과하면 남편 그레고리는 괜찮다며 자신만 믿으라고 그녀를 위로하는데요. <라푼젤>에서도 고델은 라푼젤을 납치한 범죄자이지만, 그녀를 진심으로 아끼는 엄마인 척 평소에는 다정하게 아껴주고 칭찬해주죠. 이러한 점 때문에 가스라이팅 피해자들은 어마어마한 혼란을 느끼고 시간이 지날수록 가해자에게 크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하지만 <가스등>의 폴라가 그랬듯이, 라푼젤도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 고델에게 맞서는 장면이 나와요. 라푼젤은 고델이 한 모든 이야기가 거짓이었음을 깨닫고 탑에서 나가겠다고 얘기하죠. 그러면서 “내가 바로 납치됐던 공주예요. 제가 웅얼거렸나요?”하고 묻는데요. 이는 과거 고델이 어린 라푼젤에게 “말 웅얼거리지 마라. 너 그럴 때마다 정말 짜증 나더라.”라고 말한 것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죠. 고델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라푼젤은 드디어 탑에서 탈출하는데, 그 과정에서 라푼젤의 상징과도 같았던 황금빛 긴 머리카락은 어둡고 짧아져요. 이는 라푼젤이 비로소 고델의 오랜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되찾은 것을 상징한다고.
여기 가족 사이에서 일어나는 가스라이팅을 다룬 작품이 또 있어요. 바로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 이 작품에서는 숙부로부터 주인공 히데코에게 가해지는 가스라이팅을 찾아볼 수 있어요. 어릴 적 부모를 잃고 유산을 물려받은 히데코는 숙부 코우즈키의 보호 아래 살고 있죠. 숙부 코우즈키는 오랜 시간 교육을 빙자한 폭력을 행사하며 히데코를 자신의 손안에 두려 했어요. 오직 자신의 욕구를 위해, 아내와 조카로 하여금 남성들 앞에서 음란 서책을 읽도록 하는 낭독극을 열곤 했죠. 책 읽는 것을 거부하면 때리고 목을 조르기까지 했다고.
이를 견디다 못한 코우즈키의 아내는 목을 매달아 자살하고 마는데요, 이후 낭독극은 모두 히데코가 도맡아 하게 되죠. 그러던 어느 날, 저택에 새로 들어온 하녀 숙희의 도움으로 히데코는 숙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는 것에 성공해요. 히데코는 숙희와 함께 음란한 서책을 찢어버리고 방을 완전히 망가뜨려 버리죠. 이는 히데코가 숙부의 오랜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영화 <아가씨>의 감독인 박찬욱의 또 다른 이야기가 궁금한 분은 여기를 클릭하세요!)
이처럼 가스라이팅은 다양한 작품에서 살펴볼 수 있어요. 가스라이팅은 아직 범죄가 아닌 심리 현상의 하나로 다루어질 뿐, 명확한 처벌 방안이 없기 때문에 그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또 피해자가 이것이 심각한 폭력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자신의 힘으로는 스스로 이 관계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기 때문에 가스라이팅이 더욱더 위험한 것이죠. 심지어는 가해자 또한 자신이 가스라이팅을 하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그래도 세 영화 모두 주인공이 자신의 삶을 되찾는 결말이어서 다행이에요! 그런데 이와 같은 위험한 사랑이 아닌 건강한 사랑을 다루는 연극을 대학로에서 만나볼 수 있다구요?!
극단 그림일기의 연극 <창수>는 남편이 이혼 소송 중에 아내를 살해하고 사망보험금을 얻으려 한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어요. 여기에 비리 경찰, 물질 만능주의 등의 소재를 엮어 느와르 장르의 연극이 완성됐죠. 장르 특성상 어두운 분위기로 극이 진행되어, 때로는 불편함을 느낄 수 있어요. 하지만 <창수>는 우리의 현실 또한 불편한 순간이 많음을 나타내고 싶었고, 이를 위해 데이트 폭력과 가정 폭력에 대한 내용을 다루게 됐대요. 이를 통해 '건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고.
주인공 창수와 두만이 운영하는 흥신소에는 어느 날 한 통의 의뢰 전화가 걸려와요. 의뢰인은 아림이라는 여성으로, 가정폭력 때문에 이혼 소송 중인 전남편이 자신을 자꾸 찾아온다며 신변 보호를 요청하죠. 경찰이 접근 금지 명령이 내려졌으니 안심하라는 말만 반복하며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자, 그녀는 흥신소를 찾게 돼요. 창수는 아림의 신변 보호를 담당하고, 두만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아림에게 접근해요. 둘은 같은 보육원에서 자라 친형제 같은 사이였지만, 창수는 경찰 신분으로 두만의 흥신소 일을 도와주다가 비리를 저지르고 교도소에 다녀왔죠. 돈이라면 무엇이든 하는 두만, 목숨을 걸고 신변 보호를 요청한 아림, 그리고 그 사이에서 어떤 것이 옳은 선택인지 고민하는 창수. 이 세 사람의 이야기는 어떻게 끝이 날까요? 아림도 창수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자신의 삶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아림이도 자신의 삶을 되찾을 수 있을지 너무 궁금해서, 직접 연습실 참관을 다녀왔어요! 짧은 후기 들려드릴게요~
에디터 H의 참관 후기
극장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에서 진행되는 연습에 연기하는 배우를 쳐다봐도 되는 걸까, 몰입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어요. 그런데 문득 시계를 보니 30분이 훌쩍 지나가 있는 거예요! 그 순간만큼은 연습실이 아니라 눈앞에서 펼쳐지는 연극을 실제로 보고 있는 기분이었어요.
무거운 주제를 다룬 작품이라 불편할 수 있다는 연출님의 말씀을 듣고 참관을 시작했는데요, 중간중간 너무 리얼한 연기에 오히려 웃음이 터져 나올 때가 많았답니다. 저는 쌀쌀한 계절이 오면 왠지 모르게 느와르 영화가 생각나곤 하는데, 여러분도 이번 기회에는 영화가 아닌 느와르 연극 한 편 즐겨보는 건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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