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아, 숨겨진 형제를 찾아가라
한낮 여름의 공증인* 사무실. 얼마 전 어머니를 여읜 쌍둥이 남매 시몽과 잔느는 어머니의 친구이자 변호사인 에르밀 르벨에게 충격적인 유언 내용을 전해 들어요. 그 내용은 바로 전쟁 중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와 존재조차 몰랐던 또 다른 형제를 찾아가 밀봉된 봉투를 전해 달라는 것이었죠. 예상치 못한 유언을 듣고 충격을 받은 잔느는 말문이 막히고 시몽은 급기야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욕설까지 퍼붓는데!
돌아가신 어머니께 욕까지 할 정도였다니... 시몽은 왜 이렇게 화가 난 거예요?
사실 어머니 나왈은 어느 날 전쟁 범죄와 관련한 재판에 다녀온 뒤부터 아무하고도 말을 하지 않았거든요. 그녀의 눈은 영혼이 떠나간 것처럼 흐리멍텅했고, 사흘 동안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죠. 상태가 좋지 않은 어머니를 걱정하는 아이들을 두고도, 나왈은 죽을 때까지 그 누구 앞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이렇게 평소 자식들에게 애정 어린 말 한마디 건네지 않은 나왈이, 죽어서까지 충격적인 유언을 남기자 두 남매는 망연자실 한 것이죠. 그래서 처음에는 시몽과 잔느 둘 다 유언을 따르길 거부해요. 하지만 나왈의 친구인 에르밀 르벨의 설득으로 결국 둘은 아버지와 이름 모를 형제를 찾아 나왈의 과거 행적을 쫓게 되는데!
*공증인: 당사자 또는 관계인의 위탁에 의해 법률행위나 기타 사건에 관한 사실에 대해 공정증서를 작성하고 증서에 인증을 부여하는 권한을 가진 자를 말한다.
나왈의 고향은 그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전쟁을 치르던 지역이었어요. 이 지역엔 같은 조상을 둔 토착민과 난민들이 조화롭게 살아가고 있었죠. 하지만 이들 사이에 언젠가부터 알 수 없는 증오의 굴레가 시작되면서, 그녀의 고향은 늘 복수의 피로 물들었어요. 이런 나왈의 고향에서 잔느와 시몽은 몇 가지 놀라운 사실들을 알게 돼요. 먼저 나왈이 고향에서 열다섯 어린 나이에 아들을 출산했고, 출산 직후 아들을 적군에게 빼앗기게 됐단 것을 알게 되죠. 그리고 이후 빼앗긴 아들을 찾던 과정에서 그녀가 무장 단체의 일원이 되어 민병대 대장을 암살하려 했다는 것까지도요. 심지어는 암살 시도로 체포된 후, 지하 감옥에 수감되어 입에 담기조차 힘든 모진 고문들을 받았던 과거까지 발견하게 되는데!
이후 나왈의 과거 행적을 계속해서 쫓던 두 남매는 더욱더 충격적인 현실과 마주하게 돼요. 그리곤 마침내 그녀가 왜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는지 깨닫게 되기도 하죠. 희곡의 마지막을 장식한 나왈의 추가적인 유언은 엄청난 반전과 더불어 전쟁의 비극 속, 사랑이라는 보편적 인류의 정신을 보여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고.
너무 흥미진진해요.. 마치 추리소설 같은 느낌? 그런데 이 내용이 오늘 소개할 희곡의 줄거리인 거예요?
세계적인 명작, 화염
맞아요! 위에서 설명한 작품의 줄거리가 바로 희곡 <화염>의 내용이에요. 이 희곡은 와즈디 무아와드란 작가가 집필한 전쟁 비극 3부작 중 2편에 해당하는 작품이죠. <연안 지대>, <화염>, <숲> 으로 구성된 이 전쟁 비극 3부작은 2003년에 완성돼 세계적인 연극 축제 프랑스 아비뇽 연극제에서 초연되었어요. 이 연극은 3개의 작품을 연달아 공연한 만큼 런닝 타임이 무려 11시간에 가까웠지만, 관객 호응이 뜨거워 매회 전석이 매진될 정도였죠. 이를 계기로 희곡 <화염>은 세계 각지의 무대로 퍼져나갔고, 우리나라에선 2020년에 상연되어 백상예술대상 백상연극상을 수상하기도 했다고.
성공적으로 연극 무대에 오른 희곡 <화염>은 그 명성과 작품성에 힘입어 2011년에 영화화되기도 했어요. <그을린 사랑>이라는 제목의 영화로 재탄생한 <화염>은 베니스 국제 영화제, 토론토 영화제, 아카데미 시상식 등 세계적으로 저명한 영화제에서 각종 상을 수상하며 그 작품성을 증명했죠. 국내에선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선보였고, 예술영화로서는 최다 관객을 동원하기도 했죠.
대단해요! 그런데 무아와드는 어쩌다가 이런 세계적인 명작을 집필하게 된 건가요?
그건 무아와드가 2001년 파리의 조그마한 아파트에서 한 여성을 만난 이후부터였어요. 그 여성은 바로 희곡 <화염>속 나왈의 실제 모티프이기도 한 ‘소하 베차라’라는 레바논 사람이었죠. 소하 베차라는 어렸을 적 레바논의 전쟁을 피해 프랑스로 망명한 무아와드와 달리, 레바논에서 전쟁의 참상을 피부로 겪었어요. 베차라는 희곡 속 나왈과 마찬가지로 레바논 민병대 지도자를 암살하려다 체포되어 10년간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고, 그곳에서 갖은 고문을 당하기도 했죠. 이런 베차라를 인터뷰하며 무아와드는 큰 죄의식을 갖게 돼요. 그녀와 비슷한 연배였음에도 조국이 겪은 전쟁의 역사에 대해 무지했던 스스로를 책망한 것이죠. 무아와드는 이러한 죄의식을 바탕으로 피비린내 나는 레바논의 역사를 직면하려 노력했고, 그 결과 그 유명한 전쟁 3부작을 집필하게 된 것이라고.
작가 자신과 관련 깊은 내용을 작품으로 녹인 거군요! 그 외에도 작품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이 있을까요?
무아와드의 전쟁 비극 3부작의 줄거리는 어느 정도 유사성을 띠고 있어요. 세 작품 모두 주인공들이 전쟁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자신의 뿌리를 추적해 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거든요. 특히 <화염>의 경우 작가는 전쟁이 일어나는 지역의 명칭과 실제 모티프가 된 사건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아요. 그보다는 비극적인 운명의 실타래를 풀어야 하는 한 가족의 뿌리와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하죠. 이를 통해 무아와드는 끔찍한 증오, 폭력과 전쟁으로 상처 입은 존재 역시 그 본질은 위대한 희생과 사랑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조명한다고.
두 쌍둥이 남매가 마주한 충격적인 진실에 한동안 말문이 막혔을 정도였어요! 두 남매가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찾아 떠나는 흥미진진한 여정에 대한 이야기, 강력 추천해요.
여전히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지만 우리 대부분은 일상에서 전쟁을 실감하진 못합니다. 전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도 뉴스나 영화에서 본 장면, 교과서에서 본 사진 정도입니다.
<화염>에선 가족을 통해 전쟁이라는 무겁고 막연한 주제를 구체적이고 뼈아프게 그려냅니다. 그리고 '누가 누구에게 왜 쏘는지도 모르는 것'이 전쟁의 본질이란 사실을 이해하게 됩니다. 처음부터 비장하게 전쟁을 얘기했다면 무거운 마음으로 주제에 공감하려 애쓰느라 금세 지쳐 버렸을 것 같습니다.
무아와드는 첫 장면에서 나왈의 유언이라는 미스터리한 미션을 던져 주곤 독자가 주인공들과 함께 진실을 추적하게 극을 꾸몄습니다. 덕분에 책장을 넘기는 순간 몰입했고, 진실에 다가갈수록 불길한 예감에 숨이 막혔습니다. 마지막 반전 앞에선 주인공들과 함께 통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화염>은 전쟁과 무관한 일상을 사는 우리를 전쟁 한가운데로 천천히 끌고 들어가 그 비극성을 몸소 깨닫게 하는 희곡입니다.
플롯 레터
5분 만에 읽어보는 쉽고 재밌는 예술 이야기!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예술 교양 뉴스레터 플롯레터와 함께하세요!
▼ 구독하기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649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