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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윙크의사 Dec 31. 2022

실명 소식을 들은 동생은

착한 울보 내 동생..

어릴 때 별명이 울보였던 내 동생 연수는, 1993년생으로, 나와는 3살 터울의 여동생이다.


유치원 때부터 자주 울음을 터뜨렸던 연수는, 욕심 많고 적응력이 빨랐던 나와는 꽤나 다른 종류의 아이였다. 겁도 많고 그저 순진하고 착해서, 주변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 거나 이용당하는 일도 잦았다.


내가 어린 시절 공부를 잘해 동네에서 유명 했기에 (별명이 올백이었다), 동생은 본인 이름보다는 ‘서연주 동생’으로 더 많이 불려지곤 했다. 어딜 가나 ‘오, 너가 연주 동생이야?’ 라는 말을 들었고, 그만큼 부담스러운 기대와 시선을 견뎌야 했다.


가족들에게도 늘 동생보다 내가 먼저였다. ‘연주 갖고 싶은 것’ 이 매번 우선이었고, 동생은 쓰던 것을 물려 받았다. 오죽하면 동생과 내 이름을 바꿔야 한다고 그랬다. ‘수’에 작대기 하나 그으면 ‘주’가 되어 물려주기 편해지니까. 그렇게 동생은 ‘연주’라 쓰여진 가방까지 메고 다니며, 언니의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는 존재로 지냈다.


나 같으면 질투도 생기고, 억울함도 생기고, 그러다 밉기도 했을 것 같은데. 착한 동생은 그런 티를 전혀 낼 줄 몰랐다. 언니와 비교 당하고 울면서 들어올지언정, 동생은 변함없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언니 동생이라 좋아. 나는 언니가 너무 자랑스러워.” 라고. 내 동생은 정말 그랬다. 자랑스러운 언니로 존중해주었고, 사춘기시절 못되게 굴던 나를 여러모로 품어 주었다.


성인이 된 이후 늘 바쁜 척 하며 밖으로 나돌던 나 대신, 동생은 알뜰살뜰 부모님을 챙겼다. “언니 집에 좀 와~ 엄마가 보고싶어해.”라며 엄마 대신 할말을 전했고, 나 대신 집에서 장녀 역할을 해냈다. 늘 ‘연주’가 먼저 였던 부모님 곁을, 나 대신 ‘연수’가 지켰다. 대신해서 많은 것을 해주는 동생 덕에 나는 한결 가볍고 자유로웠다. 그렇지만 내가 가벼워진 만큼 무거운 책임은 그렇게 동생 몫이 되고 말았다.


내가 갑작스런 사고로 실려왔을 때, 겁 많은 울보 연수는 응급실 문 앞까지 와서도 우느라고 들어 오지를 못했다. 평소 자랑스러워 하던 언니의 다친 얼굴을 보는 것이 무서웠는지, 그렇게 한참을 밖에서 꺼이꺼이 울기만 했다. 진통제 때문에 의식이 몽롱해진 상태로 응급 수술방으로 실려가는 롱카 위에서, 나는 멀리 울먹거리는 동생 형체만, 동생은 삐져나온 내 발 끝만 겨우 보았을 뿐이었다.


자정이 넘어 끝난 수술 후 나는 입원 병동으로 올라갔다. 이후 코로나로 인한 면회 금지 정책때문에 동생을 물리적으로 볼 수가 없었다. 가끔 아빠가 생필품을 전해주러 들르셨지만, 동생 연수는 그 긴 입원기간 내내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는 사고 이전에 그랬듯, 그저 가족 카톡방을 통해 서로 안부를 나눌 뿐이었다. 사고 당일 응급실 문 앞까지 왔으면서도, 나를 보러 들어오지 않은 (혹은 들어오지 못한) 동생이 한편으론 서운하고, 또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매사 느리고 조심스러운 동생과, 매사 빠르고 과감 했던 나. 같은 뱃속에서 태어났는데, 어찌 이렇게 다를 수 있는지. 늘 자랑스러워 하던 언니가 다쳐 실려가는 모습을 보며, 동생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일주일이 지난 후, 엄마는 “지금까진 이야기 안 했는데.. 연수가 너 실명 했다는 소식 듣고 뭐라고 했는지 아니, 나 정말 놀랐어.” 라며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연수가 너 실명 얘기 듣자마자, 자기 눈 빼 주겠다고 하더라. 자기는 컴퓨터 작업만 해서 눈 하나라도 상관 없다고. 언니는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할 일도 많으니까, 나보다 눈이 더 필요할거라고. 자기가 안구이식 해주겠다고...”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보았다. 과연 동생이 사고로 한 쪽 실명을 하게 된다면, 과연 나는 내 눈을 빼어줄 마음을 먹을 수 있을까. 그날 그렇게 응급실 밖에서 우느라 날 놓친 내 동생 연수는, 대신 본인의 소중한 눈을 내어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보다. 그것도 모르고, 그것도 모르고.. 못난 언니를 용서해다오.


원래, 못 해준 사람이 그만큼 더 아프고 후회한다고 했나. 천천히 조심스러운 성격이지만, 그만큼 더 깊고 믿음직한, 너무나도 예쁜 내 동생이다. 동생의 당연했던 양보와, 스며 들듯이 익숙했던 배려를 절대 잊지 않기로 다짐 한다. 어릴 때 나로 인해 못 누린 만큼, 이제는 하고 싶은 것들은 다 할 수 있도록 해줘야지. 아직은 못나고 철없는 언니지만, 앞으로 남은 생은 동생이 포기하려 했던 한쪽 눈의 은혜 만큼, 조금씩 갚으며 살아야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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