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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어 Jun 07. 2016

자유의 정리

인생의 점, 선, 면에 대하여

어느 날 페이스북 담벼락에 흐르는 지인의 글 중 캡처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자전적 에세이로 출간한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의 한 페이지였는데,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장편소설을 쓸 경우, 하루에 200자 원고지 20매를 쓰는 것을 규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 좀 더 쓰고 싶더라도 20매 정도에서 딱 멈추고, 오늘은 뭔가 좀 잘 안되다 싶어도 어떻든 노력해서 20매까지는 씁니다. 왜냐하면 장기적인 일을 할 때는 규칙성이 중요한 의미를 갖지 때문입니다. 쓸 수 있을 때는 그 기세를 몰아 많이 써버린다. 써지지 않을 때는 쉰다, 라는 것으로는 규칙성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타임카드를 찍듯이 하루에 거의 정확하게 20매를 씁니다. ... 소설가란 예술가란 예술가이기 이전에 자유인이어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때에 나 좋을 대로 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는 자유인의 정의입니다.' -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중>


온몸에 전기가 흘렀다. 하루키의 마지막 정의에 따르면 난 분명 자유인이긴 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때에 나 좋을 대로 해오며 살았으니. 하지만 나의 자유는 하루키의 자유와 질감이 다르다. 무엇이 다른 걸까. 자유와 방종의 차이가 아닐까.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때에, 나 좋을 대로 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안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내 의식이 A, B, C 중 무엇을 취사 선호하는지를 안다는 것과도 같다. A, B, C 중 무엇은 좋고, 무엇은 그저 그렇고, 무엇은 싫다면.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다면, 나에겐 그 말을 뒷받침할만한 축적된 경험 또는 이성적 잣대가 서 있다는 말 일터.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나의 의식, 경험'과 상관관계가 있다. 이 판단은 철저히 나라는 사람의 관점을 필터로 삼기 때문에  나를 일인칭으로 치환한 '점'의 함수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좋아하는 때를 안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때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시간의 함수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적으로 관계의 함수와 더 깊이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어 방귀를 뀌고 싶은 사람 중 뀌고 싶은 시간 때를 고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꼭 방귀는 아침에만 뀌어야겠어!라고 선언하는 사람 따위 없지 않겠는가. 방귀를 뀔지 말지 고민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는 타인이 곁에 있는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다. 학교와 직장에서 12시 땡하면 점심 식사를 하는 건 그것이 내가 좋아하는 때라서 선택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사회적 관계 안에서 그때 다같이 먹는 게 낫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먹는 것이다. 만약 자유롭게 때를 선택할 수 있다면 좋아하는 사람과 배고플 때 먹으면 될 터. 나아가 이 관계는 사회적 관계 뿐만 아니라 자연물과의 관계까지를 포괄해야 할 것이다. 솨아아 빗소리 울려 퍼지는 밤에 뭔가 시작하고 싶을 수도 있고, 장엄하게 솟아오르는 일출을 보며 새로운 결의를 다지고 싶을 때도 있지 않은가. 새벽 이슬 내음을 맡으며 글쓰기를 좋아하는 내 모습에서도 자연과의 관계를 더듬어 찾아볼 수 있다.


좋아하는 때를 안다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다. 따라서 이것은 나와 너의 함수, 즉 '선'의 함수다.


내가 좋아하는 방식을 안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방식이라는 것은 행동이다. 행동은 반드시 변화를 일으킨다. 걸음을 떼면 위치가 변하고, 눈을 돌리면 관점이 변한다. 변한다는 것은 새로운 자극이 다른 자극을 밀어낸다는 의미로, '마찰'을 의미한다. 점과 선은 움직여도 마찰을 일으키지 못한다. 마찰과 변화는 오로지 점과 선이 뭉쳐 면이 되었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마찰이 있는 곳엔 반드시 변화가 있고, 변화가 있기 위해선 반드시 마찰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좋아하는 방식을 안다는 건 온갖 마찰(게으름, 주위의 반대, 환경적 여건 등)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참고 즐거이 추진할 수 있는 나의 행동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는 것과도 같다. 


따라서 좋아하는 방식을 안다는 건 '마찰, 도전'과 상관관계가 있다 하겠다. 이것은 그 근본이 마찰이므로 '면'의 함수에 해당한다. 


정리하자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때에, 나 좋을 대로 한다'는 것은 나라는 인간의 점(자아), 선(관계), 면(마찰/도전)을 깨닫고 있다는 것과도 같다. 즉, '자유롭다'는 것은 의식과 경험이 축적된 한 인간이 타자와의 관계에 따른 사회적 구성원으로서 도전적 행동을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 말을 쉽게 하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때에 좋을 대로 한다'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의식과 경험이 축적되지 않은 갓난아기에게 어른들에게 말하는 의미로 '자유롭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반대로 방종스럽다는 것은 무엇인가. 방종에는 의식과 경험이라는 필터가 없다. 그냥이라는 관성이 있을 뿐이다. 방종에는 남과의 관계가 없다. 꼴리는대로의 마성이 있을 뿐이다. 방종에는 도전이 없다. 될 대로 되라지 자포 상태만이 있을 뿐이다. 


아..그런데 하루키의 글을 읽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유로이 살아온 지난 내 세월이 시나브로 관성에 젖어, 아집에 파묻혀, 더 이상의 새로움 없이 흘러만 가고 있었던 게 아닐까. 나에게 미안하다. 자유로운 상태를 아무 생각 없이 방치했을 땐 방종이 되기 쉽다. 너무나 쉽게 부패하고 썩는 것이다. 그러나 방종의 상태를 자유의 자리로 되돌려 놓으려면 계속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화분에 햇살을 주듯이. 물을 주듯이. 나는 누구인가. 나와 너는 어떤 관계인가. 나와 너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내 인생의 점, 선, 면을 다시 생각해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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