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엄마 엘리 Jan 28. 2020

엄마, 다리가 하나인 친구도 있지?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이란 것을 새삼 일깨워준 그림책

 살다 보면 만만하게 봤다가 큰 코 다칠 때가 있다. 안 매울 줄 알고 먹었는데 엄청나게 매운 청양고추, 방심하고 뛰어들었는데 얼음장같이 차갑고 깊은 수영장, 아이 그림책에서 예상치 못한 깨달음을 얻을 때가 바로 그렇다.


 나는 종종 아이에게 가볍고 느슨한 마음으로 그림책을 읽어주다 훅 들어온 감동에 눈물을 흘리거나(아이 책 읽어주다가 눈물이 났다), 순수하고 해맑은 동심에 비친 부끄러운 내 행동과 태도를 직시하고 반성한 적이 있다.


 이번 설 연휴에도 그랬다. 아이에게 무심코 읽어준 그림책이 지금까지도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고 있는 것이다. 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스토리보드 아티스트인 오스트레일리아의 작가 딜런 시어스비의 그림책 <거꾸로 시드>의 이야기다.




다양성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주는 딜런 시어스비의 그림책 <거꾸로 시드> © 엄마 엘리




 도서관에서 빌려올 때만 해도 별 생각이 없었다. 제목과 그림에서 풍기듯이, 남과 다름을 인정하고 다양한 친구들과 어울려 지낸다는, 4살 아이에게 읽어주면 좋을 내용의 책이라 여겼다. 책에 담긴 메시지도 좋았고 밝고 명랑한 색감과 일러스트가 마음에 들어 빌려 온 것이었다. 이 책이 이렇게 우리 모녀를 깊은 대화의 세계로 이끌어줄지 꿈에도 모르고서 말이다.


 책은 '다양성', '다름'의 인정과 존중의 메시지를 담았다. 모두 같은 방향인 세상에서 홀로 다른 방향으로 살아가는 시드를 통해서 말이다.


 시드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그렇지만 그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시드는 자신의 방식대로 생활할 수 있는 집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그는 자연스레 홀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게 된다. 그렇지만 시드도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생기기 마련이다. 가령, 누군가 창문을 깨서 유리를 고쳐야 된다거나 하는 일 말이다.


 유리창을 깬 친구들은 시드의 창문을 직접 고쳐주겠다고 말한다. 시드는 그들을 집으로 초대한다. 하지만 친구들과 집에 있으면서 시드는 무언가 잘 못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친구들이 떠나자 시드는 다시는 친구들을 볼 수 없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친구들은 시드가 없는 집에 들어가 시드의 방향대로 고쳐주고, 시드가 돌아오자 시드의 방식을 배려하고 존중하며 다시 한번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이제 시드는 혼자가 아닌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생활하는 방법을 터득한다.




남들과 달리 항상 거꾸로 생활하는 시드는 친구들과 세상 속에서 어울리는 법을 알아간다 © 거꾸로 시드




 책을 다 읽고 아이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과 다르게 매일매일 거꾸로 매달려있는 시드의 기분은 어땠을까?"

 "음.. 그러게."

 난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다시 한번 설명했다.

 "엄마랑 채유가 이렇게 앉아서 함께 책을 보는데, 시드는 이 방 천장에 매달려 있는 거야. 그럼, 시드는 이 책을 볼 수 없잖아."

 "구래. 맞아. 시드는 못 봐. 안 보여서 슬프겠다."

 아이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 슬프고 외롭겠지? 그런데 이렇게 친구들이 시드처럼 위로 가서 밥도 같이 먹고 TV도 같이 보고 하네."

 "응. 엄마, 봐봐. 시드가 기분이 좋은 것 같아."

아이는 시드가 웃고 있는 표정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이와 나누는 대화가 신기하고 재밌었던 나는 말을 이어갔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있어. 머리카락이 노란 친구도 있고, 피부가 까만 친구도 있고, 눈이 초록색인 친구도 있고."

 아이는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말한다.

"맞아. 다리가 하나인 친구도 있지?"

 나는 아이의 말에 살짝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리고 아이의 초롱초롱 빛나는 눈을 보며 답했다.

 "그럼. 팔, 다리가 없는 친구도 있지. 그래서 앉아서 다니는 사람도 있고."

 "맞아. 눈이 없는 친구도 있지?"

 아이는 무언가에 신이 났는지 목소리를 높여 맞장구를 쳤다.




'정상'적인 것은 없다




 순간, 나는 아이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세상이라는 것을.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이 한 가지가 아니라는 것을. '내'가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건대 난 평소 남과 다름의 차이를 인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차별을 정당화하는 쪽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와 함께 이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면서 단지 이 아이의 '엄마'라는 이유로 그런 책임감과 의무감 같은 것이 불쑥 고개를 치켜들고 말았다. (최근에 읽은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영향도 컸고.)


 여태껏 편협한 시선과 너그럽지 않은 마음으로 살아온 것이 부끄러웠음에도 불구하고, 난 아이에게 다른 신체를 갖고 자신의 방식대로 삶을 살아가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꺼냈다.




두 다리 없는 달리기 선수 겸 영화배우 에이미 멀린스, 루게릭병을 앓은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구필화가 임경식 작가 © 다음 검색



 "에이미 멀린스라는 달리기 선수는 두 발이 없이 태어났지만 세계에서 가장 빠른 달리기 선수가 되었대. 지금은 영화배우도 하고 모델도 하고 있대. 여기 봐봐, 멋있지?"

 "루게릭병으로 몸을 움직이는 것도, 쓰고 말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세계적인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할아버지도 있어."

 "손이 없어서 입으로 그리는 화가도 있고, 발가락에 펜을 잡고 그리는 화가도 있어."

“눈이 안보여서 귀로만 듣기도 하고, 귀가 안들리면 손으로 말하는 수화로 대화하기도 해.”


 내가 어디선가 보고 듣고 읽었던 사람들을 검색해 아이에게 보여주었다. 아이에게 설명해주면서 나 스스로도 그들의 인생 스토리를 다시 한번 읽고 그들의 긍정적인 마인드와 삶의 태도를 배울 수 있었다.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할 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아이를 통해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에이미 멀린스는 2015 세계여성경제포럼 참석 전 이데일리와의 서면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인류가 만든 가장 큰 역경은 '정상'이라는 개념이다. 보통이나 전형적인 것은 있어도 정상적인 것은 없다."

 

 그림책 <거꾸로 시드> 마지막 글은 이렇다. 그리고 그 글은 우리가 잊고 있던 다양성의 가치를 새삼 일깨워준다.


시드는 보통의 사람들과 조금 다르게 살아가지만,
그것이 친구가 될 수 없다는 뜻은 아니에요.
우리는 모두 다르고, 그래서 서로를 알아간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죠.


매거진의 이전글 생선구이로부터의 해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