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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 엘리 Aug 08. 2019

아이 책 읽어주다가 눈물이 났다

그림책이 이렇게 뭉클하다니, 이건 반칙이다

익히 들어서 정말 정말 익숙한데, 정작 그 예술가가, 그 철학자가, 그 브랜드가, 그 여행지가 왜 유명한지, 그것의 핵심 콘텐츠를 설명해보라면 말문이 막힐 때.


한 번씩 다 있지 않은가? (나만 그래요?)


니체, 셰익스피어, 베르나르 베르베르, 파리, 벤츠....


누구나 들으면 알지만, 완전히 다 알지는 못하는.. 지와 무지 사이의 그 괴리감.



뜻밖의 괴리감을 안겨준 너무도 유명한 백희나 작가와 그녀의 대표작 장수탕 선녀님 (출처 : 다음 검색)



최근에 아이랑 서점에 가서 그 괴리감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도서관이 아닌 서점을 찾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딱 한 권의 책을 사주겠노라고 일러두었더니 아이는 사막 동물 피규어가 잔뜩 들어있는 사막 동물 책을 집어 들었다. 그 책을 계산대로 가져가는 길에 핑크퐁 인형을 보더니 아이는 그전까지 애지중지 들고 있던 사막 동물 책을 내려놓고 핑크퐁 인형으로 돌진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핑크퐁 인형은 아이와 함께 데려올 수 없었다. 그 인형은 파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쉬워하는 아이 손을 잡고 나오는 길에 한 그림책과 마주쳤다. 선녀로 보이는 할머니가 빨대로 요구르트를 쪽쪽 빨고 있는 강렬한 표지의 <장수탕 선녀님>이었다.


아! 그래, 백희나 작가! 이 책이 그 유명한 백희나 작가의 그 유명한 장수탕 선녀님이구나!


왠지 모르게 나는 반가운 마음에 책을 집어 들었다. 아이는 그런 나를 올려보며 이거, 무슨 책이야? 물어본다. 응, 이 책은 유명한 그림책 작가의 책인데, 이 할머니가 선녀인가 봐. 그리고..... 음... 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아이에게 딱히 들려줄 말이 없었다. 나는 이 책을 읽어본 적이 없었고 그래서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저 신문에서, 어딘가에서 작가의 이름과 표지 정도만 들었었다. 그런데도 그렇게 반가워하며 아는 척을 한 것이라니. 아이는 그런 나를 어리둥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백희나 작가의 책들만 쭈르륵 대출했다. 아이 핑계를 대고 내가 읽고 싶어서.



집에 와서 백희나 작가가 쓴 책들을 찾아봤다. 그림도, 내용도, 이제까지 본 그림책들과는 많이 달랐다. 어떤 책인지 너무나 궁금해졌다.


다음 날, 도서관에 가서 백희나 작가의 책들만 쭈르륵 대출을 해왔다. 아이에게 읽어주겠다는 핑계를 댔지만, 실은 내가 읽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녀의 대표작, 구름빵은 상상력이 넘치면서도 따뜻한 마음을 담은 책이었다. 구름으로 빵을 만들어 가족들과 나눠먹는데, 아침을 안 먹고 출근한 아빠가 걱정된 아이들이 아빠에게 빵을 가져다 주기 위해 날아가는 장면은 우리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었다. 아이는 날아가는 책, 날아가는 책, 하며 몇 번씩 더 읽어달라고 성화였다.



눈물을 쏙 뺀 그림책 알사탕 (출처 : 다음 검색)



백희나 작가의 또 다른 대표작, 알사탕. 사탕을 좋아하는 아이가 흥미를 보일 것 같아 빌린 책이었다. 그만큼 책의 내용은 1도 몰랐다.


백희나 작가의 책들을 차례로 읽으며 느낀 점은 항상 생각지 못한 반전이 있다는 것이었다.


신선하고 기발한 상상력과 창의력이 버무려진 그녀의 책은 31개월의 우리 아이는 물론, 얼어붙은 나의 동심까지 자극했고, 우리나라와 동양의 색채가 뚜렷한 그림과 스토리는 아이가 위트와 재치 있는 우리 문화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게 해줬다. (더불어, 앤서니 브라운 등 외국작가의 그림책을 많이 읽힌 나를 반성하게 만들었다.)




흔한 아빠의 잔소리. 어렸을 적 들었던 부모님의 잔소리와 오버랩되었다. (출처 : 알사탕)



알사탕은 외톨이 동동이가 우연히 문방구에서 사 온 알사탕을 하나씩 먹으며 벌어지는 일을 그렸다. 알사탕을 먹으면 평소 들리지 않았던 마음의 소리가 동동이의 귀에 들리기 시작한다. 사탕을 먹으면 거실에 있던 소파가 잃어버린 리모컨을 찾아주고,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와 오해를 풀고, 돌아가신 할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신기한 경험에 빠져있는데, 집에 들어온 동동이 아빠가 평소와 다름없이 무지막지한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숙제했냐? 장난감 다 치워라. 이게 치운 거냐? 빨리 정리하고 숙제해라. 구슬이 산책시켰냐? 똥은 잘 치웠냐? 산책 갈 때 비닐봉지 챙겨서 나갔냐? 손은 닦았냐? 제대로  돌보지 않을 거면 개 키울 자격도 없다. 글씨가 이게 뭐냐? 창피하다. 자전거 열쇠는 찾았냐? 이름은 써놓았냐? 리모컨은? 똑바로 앉아라. 밥풀 흘리지 마라. 밥 먹다 화장실 가지 마라. 문 꼭 닫아라. 등 펴고 의자 당겨 앉아라. 나물도 먹어라. 꼭꼭 씹어라. 입 다물고. 알림장 제대로 적어왔냐? 물은 밥 다 먹고 마셔라. 밥 다 먹고 말해라. 가정통신문 있으면 식탁 위에 놓아둬라. 급식은 골고루 다 먹어야 한다. 손톱 깨물지 마라. 구슬이 밥 줬냐? 물도 줘라. 소리 내지 말고 살살 다녀라. 물통 꺼내놔라. 물은 왜 남겼냐? 어제도 목욕 안 하고 잤지? 오늘은 꼭 씻고 자라. 팬티도 갈아입고. 바지 뒤집어 벗어 놓지 마라. 머리 잘 헹궈라. 샴푸 조금만 짜서 써라. 귀 뒤에 거품 있다. 다시 헹궈라. 양치질해라. 치실했냐? 양치 다시 해라. 너 기침하더라. 가글도 해라. 팬티 갈아입었냐? 내복은 어제 입은 거 입어라. 빨래 가져가라. 가방 챙겼냐. 방과 후 준비물 제대로 확인해라. 일기장이랑 알림장 챙겨 넣어라. 내일 입을 체육복 꺼내놔라. 책 읽어라. 만화책 말고. 안 들린다. 큰 소리로 또박또박 읽어라. 물컵은 하나만 써라. 먹으면 물로 꼭 헹궈서 엎어둬라. 자기 전에 뭐 먹으면 안 된다. 양치 다시 해라. 조끼 입고 자라. 춥다. 9시다. 얼른 자라.


(이 페이지 읽을 때 31개월 된 우리 딸아이는 크게 웃었다. 마치 동동이의 기분을 안다는 듯이.)



문제의 아빠 속마음. 읽으면서 울먹이다가 급기야 눈물이 흘렀.. (출처 : 알사탕)




동동이는 아빠의 잔소리를 피하고자 마지막 하나 남은 사탕을 먹는다. 그 후, 부엌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ㅅ ㄹ ㅎ ㅅ ㄹ 해 사 라 해 사 랑 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끝없이 들려오는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그 소리는 다름 아닌 설거지를 하는 아빠의 등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그제서야 아빠의 마음을 안 동동이는 뒤에서 아빠를 꼬옥 껴안아준다.


아, 여기서 부터였다. 내 눈에서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한 것은.

무릎에 앉힌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내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엄마가 좀 이상해진 것을 느낀 아이는 슬며시 나를 올려다본다. 나는 페이지를 넘기며 아이의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반전이 있기로서니, 그림책을 읽고 눈물을 흘리다니, 이건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었다.


마음을 진정한 후 혼자 소파에 앉아 다시 아빠의 잔소리가 있는 페이지를 차분히 읽어봤다.


다시 한번 눈물이 났다.

어렸을 적, 우리 엄마, 아빠의 목소리와 오버랩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부모님도 저 깊숙한 곳에서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를 끊임없이 외치고 있었을까.


그 시절, 나에게도 동동이의 알사탕이 있었다면, 그랬다면 부모님과의 오해를 풀 수 있지 않았을까, 지금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엄마랑 둘도 없는 친구처럼 속마음도 나누고 함께 데이트도 하는 그런 관계를 꿈꾼적이 있었었다. 아빠랑 손잡고 길을 걸어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를 바란적도 있었었다.


현실은... 이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어졌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는 건 마음으로는 알겠는데,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동이처럼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은 알사탕이 없는 내게 여전히 어렵기만 한 숙제이다.


그보다는 우리 아이에게 나의 마음의 소리, 진심어린 눈빛을 자주 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알사탕 없이도 우리 딸이 내 마음을 잘 들을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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