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검은 상자에 소중한 내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있기에
살다 보면 두 눈을 의심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집에서 나와 지하철을 타러 들어갈 때까지 분명 해가 쨍쨍했었는데 도착해 지하철 개찰구를 빠져나오니 거짓말처럼 세찬 비가 쏟아져 내릴 때.
잠시 지도를 보는 사이, 트렁크 위에 올려둔 손가방이 감쪽같이 사라졌을 때.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눈이 마주친 좀도둑의 손에 내 가방이 들려있는 것을 봤을 때도.)
분명 방금 전까지 내 앞에서 꼬리를 살랑대며 애교를 부리던 강아지가 주인이 나타나자 나를 향해 으르렁거리며 짖을 때.
다소 황당하고 믿기 힘든 일들이 종종 벌어지곤 한다.
새벽 5시 40분.
직감 상 알람이 울릴 때가 되었는데도 알람이 울리지 않는 것 같은 묘한 기분에 이끌려 눈이 저절로 떠졌다. 의식은 깨었지만 눈은 다시 감은 상황. 손을 더듬거리며 머리맡에 있는 핸드폰을 손에 쥐고 나서야 눈을 슬쩍 떠보았다. 지금 몇 시쯤인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런데 웬걸, 아무리 액정을 톡톡하고 건드려봐도 핸드폰은 선글라스의 그것처럼 새카만 화면만 내보일 뿐이었다.
어라? 분명 자기 전까지도 썼었는데...
상체를 일으켜 본격적으로 핸드폰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먹통이다. 이번엔 핸드폰 케이스를 벗겨내서 입으로 후, 후, 바람도 불어 본다. 전원 버튼과 볼륨 버튼을 동시에 꾹- 눌러본다. 여전히 반응이 없다.
장난치지 마라. 진짜!
정신이 번쩍 나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시계가 있는 거실로 향했다. 무반응인 핸드폰은 여전히 한 손에 꼭 쥔 채로.
아, 오전 6시 40분이잖아. (이때 경황이 없었는지 시간도 잘못 봤다.)
일어난 김에 노트북을 켜고 앉았다. 글을 써야 하지만 나도 모르게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아이폰 전원 안 켜져요>, <아이폰 xs 전원 안 켜짐> 따위를 입력하고 있었다. 찾아보니 나와 비슷한 증상을 보인 이들이 참 많았다.
충전을 했는데 자고 일어나니 전원이 안 켜진다, 어디 떨어진 적도 없고 물에 빠뜨린 적도 없는데 별안간 전원이 나갔다, 그 어떤 버튼을 눌렀는데도 전원이 안 켜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친절한 답글들.
가까운 수리센터에 가보세요.....
볼륨 업 버튼과 다운 버튼을 차례로 누른 후 전원 버튼을 누르는 강제 리셋 기능을 해보세요...
저도 그랬는데 그러다 2분 후에 갑자기 켜지더라고요....
강제 리셋 기능이 뭔지는 몰라도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글을 보고 따라 해 봤다. 안된다. 아. 절망적이다.
내일 아이랑 같이 바닷가에 놀러 가야 하는데. 가서 사진도 많이 찍어주고 영상도 많이 남기고 해야 하는데. 하필 토요일에 이럴게 뭐람. 사진들 업데이트 다 안 해놨는데, 사진 다 날아가면 어쩌지? 아이폰 보험도 따로 안 들어놨는데... 메인보드에 결함이 있는 건 아니겠지?
어느샌가 머릿속에는 온통 절망적인 생각들로 꽉 들어차게 되었다.
뻔히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그래, 그냥 마음 편히 먹고 서비스 센터 오픈 시간에 기다려서 방문해보자. 하면서도 나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내 양손은 핸드폰을 꼭 쥐고서 볼륨 버튼과 전원 버튼을 10초 이상 주기적으로 꾸욱- 꾸욱- 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내 터치 한 번에 촤르륵 바뀌며 영롱한 빛과 색을 드러냈던 화면이 검게 그을린 숯처럼 까맣게 타 내 마음을 애태운 지 2시간이 지나자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고작 가로 7cm * 세로 14.3cm * 높이 7mm 밖에 안 되는 이 작은 검은 상자에 소중한 내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있구나.
이 상자는 나와 세계를 연결해주는 매개체로 이게 되지 않는 순간, 나는 곧바로 세상과 단절되는구나.
내 몸에 붙어있지만 않지 내 열한 번째 손가락과 다름이 없구나.
이런 생각을 하며 쳐다본 그 까만 액정에 내 얼굴이 비치는데 갑자기 양 팔에 소름이 끼쳤다.
말 그대로 소름 끼치게 무서웠다. 이른 아침에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이런 게 기계문명에 길들여진다는 건가. 이미 흠뻑 길들여졌는지도.
아니, 진즉에 스마트폰의 노예가 되어버린 게 확실하다!
수리센터에 가니 다행히 소프트웨어 문제인 것 같다고 하며, 만약 강제 리셋을 해보고 켜지면 돌아가도 된다고 했다.
강제 리셋을 누르는 떨리는 10초.
볼륨 업 버튼 1초.
볼륨 다운 버튼 1초.
전원 버튼 1초, 2초, 3초, 4초, 5초, 6초, 7초, 8초...
10초가 지나자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 시커먼 액정에 한 입 베어 문 사과가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내 표정도 조명이 켜진 것처럼 순식간에 밝아졌다.
휴. 정말 다행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도 모르게 몇 번이나 큰 소리로 감사의 인사를 외치고 발걸음도 가볍게 사무실을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덤으로... 연애뿐만 아니라 강제 리셋 방법도 글로 배워선 안된다는 교훈도 얻었다.
아이폰이 꺼진 오늘 아침의 6시간 하고도 30분은 다행히 해프닝으로 싱겁게 끝나버렸다. (천만다행이다.)
하지만 그 390분 동안, 나는 혼자서 정신적 공포를 감내해야만 했다.
내 인생의 소중한 부분이 하루아침에 훅 하고 사라질 수 있다는 데이터 삭제에 대한 공포를.
손 안의 기계가 먹통이 되는 순간, 세상과 단절이 된다는 그 막막함을.
손에 든 이것은 단순히 기계가 아니라, 필수적이면서도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는 신체의 일부와 다를 바가 없음을.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럴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의식적으로라도 이 기계에 너무 의존하지말아야지, 하고 다짐해본다.
적어도 내 정신을, 내 일상을 흔들리게 하지는 말아야겠다, 는 생각을 해본다.
포노 사피엔스로 살아갈 날이 더 많은, 앞으로의 내가 갖춰야할 자세가 아닌가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