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질" 잘 하기 위한 준비
소위 "종이질"을 잘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도 아주 빠른 시간 내에 감탄이 나올 정도로.
여기서 "종이질"이란 주로 국내의 IT나 컨설팅 업계에서 쓰는 용어다. 실질적인 업무나 시스템을 만드는 작업이 아니라 파워포인트 장표를 만드는 작업을 뜻한다. 결국 종이로 인쇄될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해서 "종이질"이라고 부르게 된 듯하다. 간혹 "장표질"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비단 컨설팅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발표가 일상적인 업무가 되다 보니 발표 자료를 만드는 것은 생산성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같은 분량의 일이 주어졌는데 나는 밤을 새 가며 열심히 만드는데 어떤 사람은 빠르게 만들고 일찍 퇴근해버린다. 머리가 안 따라주면 몸이 힘든 건가...
물론 발표 자료를 많이 만들어보면 당연히 유리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요즘은 새로 들어오는 신입사원들이 십 년 넘게 회사생활 한 선배들보다 발표 장표를 만드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단순히 파워포인트를 다루는 스킬이 아니라 듣는 청중이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낸다.
그런 "Wow" 발표 자료를 만들기 위해 생각해 봐야 할 내용들이다.
스토리텔링이 중요하다는 건 이젠 대부분 다 알고 있다. 실제로 그런 발표 자료를 찾아보는 게 쉽지는 않지만.
발표에 일가견이 있다는 한 컨설팅 회사의 임원은 이 스토리텔링을 극도로 중요시했다. 발표 자료를 리뷰할 때 제목으로 얘기가 안 되면 무조건 다시 만들어 오게 할 정도였다. 즉, 발표 자료 각 장의 제목들을 연결했을 때 스토리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각 장의 제목으로
" 우리는 이 프로젝트를 이렇게 이해합니다."
"이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지만 이런 위험 요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준비하려 합니다"
"그러면 이런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이렇게 스토리가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반드시 이런 길고 서술적인 워딩 Wording일 필요는 없지만 이렇게 스토리를 만드는 것을 구성에 도움이 된다.
Empathy. 감정 이입. 다른 사람 신발 신어보기.
상대방, 즉 청중의 입장에서 자신의 발표를 생각한다. 이렇게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만 생각해도 발표 자료를 준비하는 건 대부분 해결된다. 어떤 분량이 적당할지, 상세한 내용을 어디까지 포함시킬지. 가장 좋은 건 내가 발표를 듣는 사람이 되었던 경험을 떠올려보는 것이다.
말로는 쉬워 보이지만 생각보다 이걸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발표 자료를 만들다 보면 자신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 입장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 그래서 자료를 만드는 중간중간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으면 좋다. 매니저나 상사의 의견을 듣는 건 부담스러우니 동료로부터 피드백을 받는다.
Empayhy Map이라 불리는 도구를 이용할 수도 있다. 별다른 내용이 아니라 그저 상대방이 어떤 것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는지를 확인하는 도구이다. 이걸 간단히 써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된다.
발표 자료를 준비한다 하면 무조건 파워포인트를 여는 사람들이 많다. 시간은 별로 없고 해야 할 내용은 많으니 마음이 급해진다. 그럴수록 처음에 충분히 시간을 가지고 내용을 구성하면 나중에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고 듣는 사람이 공감하는 내용이 나온다.
종이에 연필로 직접 내용을 구성해 보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다.
전체적인 발표의 구성을 순서에 따라 짜보기도 하고, 각 장표 한 장 한 장도 어떤 모습과 내용이 들어갈지 그려본다. 화이트 보딩 식으로 핵심적인 스토리를 그려봐도 좋다.
파워포인트도 여러 가지 내용을 구성하는 모드가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종이에 연필로 다양하게 구성하다 보면 좀 더 발표 내용과 청중 자체에 집중할 수 있다.
이미지와 동영상은 매우 강력하다. 적절하게 들어간 이미지와 동영상은 수많은 텍스트보다 효과 있다.
사진 한 장이 1,000 단어의 효과가 있다고들 얘기한다.
글로벌 회사들도 점점 더 이 시각화 Visualization에 대한 걸 강조하는 추세다. 인포그램 정도의 노력이 들어가는 정교한 시각화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꼭 기억시켜야 할 중요한 부분은 이미지로 표시하면 좋다.
너무 많은 이미지로 어지러운 장표를 만드는 것은 피하자.
너무 많은 내용이 들어가 있고 어지러운 장표를 영어로는 Busy 하다고 표현한다.
예 : "This slide is too busy. Let's make it more simple and intuitive"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한다고 애니메이션 효과를 넣는 건 지양 (지향 X) 하자. 애니메이션은 없을수록 좋다.
앞서 얘기했던 발표 자료 준비의 속도는 사실 평소에 준비를 얼마나 해놓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기본적인 준비를 평소에 해놓으면 좀 더 좋은 발표 자료를 짧은 시간에 만들 수 있다.
우선 좋은 발표자료 Slide Decks를 보면 항상 모아놓는다. 무조건 모으기보다는 파일 제목에 어떤 용도인지를 분류해놓으면 좋다. 큰 발표인지/작은 발표인지, 발표의 목적이 제품 소개/설득/해결방안 인지 등등. 대부분 발표를 잘 하고 좋은 자료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은 좋은 자료를 모으고 분류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들인다. 예전에는 잘 나가는 컨설턴트라면 자료가 잔뜩 들어 있는 외장 하드가 가장 소중한 자산이었다. 요즘은 클라우드가 워낙 잘 되어 있고 다양한 분류 툴들이 많아서 더욱 편리하다.
장표 이외에도 좋은 클립아트가 보일 때마다 모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발표 자료를 만들 때마다 구글 신에게 물어보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이렇게 클립아트를 모아놓으면 한 가지 더 좋은 점이 있다. 자신의 취향에 맞는 클립아트들을 반복해 사용하다 보면 자신만의 발표 정체성 Identity가 확립된다. 어떤 발표 자료를 보면 '아 이거 누구 스타일인데' 느낌이 오게 된다.
사실 우리나라는 소위 이 "종이질"에 너무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발표 장표에 너무 많은 정보를 넣는다.
한 국내 대기업과 같이 프로젝트를 했을 때의 일이다. 시간에 쫓겨서 콘텐츠를 만들어내기도 힘들었던 프로젝트였다. 발표를 앞두고 발표 장표에 대해서 논쟁이 붙었다. 내용이 핵심적으로 표현된 장표에 불만을 표시했다. 테마도 보고를 받는 임원의 스타일에 맞지 않다 했다. 물론 듣는 사람의 기호에 맞추는 게 우선이다. 하지만 단지 듣는 사람의 "기호"에 맞추기 위해서 프로젝트를 1달 지연시키는 것은 그리 생산적이지 못했다.
거꾸로 너무 벙벙한 장표도 문제다. 외국계 기업에서 일하다 보면 외국에서 컨설턴트를 데려와서 발표를 시키는 경우가 왕왕 있다. 가져온 발표 장표를 보면 가관이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너무 일반적이고 하이레벨의 얘기다. (이를 벙벙하다고 표현한다.) 다시 우리나라 스타일로 작업해서 발표를 시키는 경우가 잦다.
외국에 가서 일하는 분의 얘기를 들어보니 이해가 갔다. 외국의 고객도 우리나라 식으로 정성을 들여서 이쁘고 많은 정보가 들어간 장표를 보여주면 좋아하긴 한다고 했다.
하지만 발표가 끝나고 받은 피드백은 '아 이렇게 정성을 들여서 좋은 발표 자료를 만들어줘서 고마운데, 뭐 이렇게까지... 핵심을 알려주고 서로 논의하는 게 더 중요한데' 이런 느낌?
중용을 지키는 건 항상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