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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민케이 Apr 17. 2016

K는 지금 에너지 절약 모드

게으름에 대한 예찬

K는 매우 한가한 일요일 오후를 보내고 있다.


이제 중학교에 들어간 딸은 1달이나 남은 중간고사 준비에 벌써 들어가서 하루 종일 수학과 씨름 중이고, 아내는 블로그의 방문자 수가 요즘 줄어들었다며 포스팅에 한창이다.  K는 오늘 하루에만 얇은 소설책과 에세이를 포함해서 3권의 책을 읽어해치웠다.

한가로운 듯 보이지만 사실 K의 속은 편하지 않다. 차주에 또다시 호주와 싱가포르에서 회사 매니저들이 서울을 방문한다. 비즈니스를 점검한다는 명목이지만 실상은 쪼러 오는 거다. 겉으로는 웃고 유머스럽게 얘기하지만 말하는 내용은  채근하고 독촉하는 빚쟁이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신혼집에 시어머니와 시누이 둘이서 손잡고 방문해서 청소는 되어 있는지, 밥은 뭐 해 먹고 사는지 확인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평소 같으면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1주일 전부터 열심히 준비를 했을 거였다. 방문 스케줄을 챙기고 해야 할 일정도 만들고, 점심 저녁을 어디서 먹을지 식당도 고민하고. 자료도 파워포인트로 멋지게 만들어놨을 터였다.


하지만 K는 지금 에너지 절약 모드다. 이 모드가 주기적으로 오는지 어떤 상황에서 오는지 K도 잘은 모른다. 다만 경험적으로 봤을 때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모두 쏟아붓는 일을 하고 나면 대부분 찾아왔다. 그게 일이 끝나고 언제 올 지 모르는 게 문제였다. 어떨 때는 큰 프로젝트가 끝나고 바로 찾아와서 며칠 쉬면 나아질 때도 있었다.

이번에는 4개월 만에 찾아왔다. 1년여 동안 맘고생하며 맡고 있던 일이 끝나고 새로운 업무를 맡아서 오히려 시간은 많아졌다. 새로운 시간을 새로운 업무를 기획하며 보내고 있는 중 그 모드가 돌연 찾아왔다.


에너지 절약 모드가 찾아오면 K는 이렇게 된다. 우선 업무 우선순위 기준이 느슨해진다. 그 전에는 우선순위 1~7까지의 일을 하루에 처리했다면 이제는 1~3 정도의 일을 처리한다. 순위 자체의 기준도 달라진다. 그 전에는 중요하면서도 긴급한 일을 위에 놓았다면 이제는 긴급도가 우선이다. 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일이 관계된 것들을 최우선으로 처리하게 된다. 내가 에너지 절약 모드라고 남들 일을 방해하거나 지연시킬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업무의 우선순위가 자기도 모르게 조정되면 (K가 이런 우선순위를 계획적으로 그리고 매우 논리적으로 조정하지는 않는다.) K는 자신의 남는 자원을 평소에 못하던 작업에 돌린다.


업무 우선순위에 밀려 못 보던 회사 내 WebEx  교육을 듣는다. 다행히 K의 회사에는 직접적 업무와 관련 없는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물론 듣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교육 담당자의 뛰어난 실적으로만 존재할 뿐이었지만)

책을 읽는다. 업무와 직접 관련은 없지만 재미있고 나와 내 가족의 미래가 달려있는. 알파고 와 이세돌의 대국 이후로 갑자기 온 국민의 관심을 얻은 인공지능은 당연히 읽어야지. 디지털 혁신과 산업 4.0도 산업과 회사들의 지형 자체가 어떻게 바뀔지 가늠을 하게 해주는 주제다. 소설책은 당연히 읽어야 한다. 움베르토 에코가 그랬다지. 대낮에 소설책을 읽는 것은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고.  퇴근 후 집으로 달려와 오랜만에 스티븐 킹의 중편소설집을 집어 들고 읽어 내려간다.


사실 에너지 절약 모드니 예전처럼 열정적으로 이 모든 일을 해치우지 못한다 (않는다?) 상대적으로 멍해있거나 상념에 빠져 있는 시간이 많아진다. 의도치 않게 월급루팡이 되는 느낌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K를 처음 만났을 때 K가 위치한 모드에 따라 K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극과 극을 달렸다. K가 풀파워 모드에 있을 때 만난 사람들은 K의 열정과 노력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반대로 K가 에너지 절약 모드에 있을 때 K를 만난 사람들은 "음... 사람은 괜찮은데 엄청 일을 열심히 하는 스타일은 아니다"라고 점잖게 표현했다.


K는 두 가지 모드를 왕복하는 것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를 포기하지 않는다.


모두가 K와 같이 두 상태를 오가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K와 다르게 고른 상태를 유지할 줄 안다. 자신의 에너지와 자원을 매일 적절히 분배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진폭과 주기가 다를 뿐 모두가 에너지가 충만한 때와 에너지를 절약하는 모드를 오간다. 에너지를 절약하고 모으지 않으면 충만한 에너지를 마음껏 발산하기는 쉽지 않다. 서점에 많이 나와 있는 "혼자만의 시간" "너무 열심히 하지 마라"같은 책들은 사실 모두 이 에너지 절약 모드의 중요성을 강조한 책들이다.


혹시 게으른 듯 보이고 뭔가 나사에 빠진 듯한 사람이 보이면 게으르다고 욕하지 말고 한 번쯤은 의심해 볼 것. 그 사람이 에너지 절약 모드에 있는 것은 아닌지. 그저 나와 다른 사이클에 있을 수도 있다. 뭐, 그저 항상 게으른 사람이었을 가능성도 존재하지만.


그나저나, K가 다음 주에 매니저에게 영어로 몇 시간이고 쪼이다가 못 참고 이렇게 얘기하면 그 매니저들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I'm not lazy, I'm just on power-saving mode!

(나 게으르지 않아. 그냥 에너지 절약 모드에 있을 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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