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기간이었는지 평일 오후였지만, 모든 가족이 집에 있었다. 지나와의 사소한 다툼을 시작으로 아버지의 폭력과 폭언이 시작됐다. 말을 하진 않았지만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나 사춘기임'
이라고 써붙여 다니던 선미도 자극을 받았다. 점점 더 과격해지고 있는 아버지의 행동은 선미의 내면에 잠자고 있던 분노의 발화점에 불을 붙이고 말았다.
더 이상 참지 못한 선미는 부엌으로 달려갔고, 엄마가 아끼던 아주 큰 식칼을 손에 들고 거실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그 식칼의 끝은 아버지를 향했다.
다 죽여버릴 거야!!!
정말 아버지를 죽여버리고 싶었다. 어린 시절의 어느 새벽 난생처음으로 부모님이 싸우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 날 이불속에서 계속 흐느끼며 베갯잇을 적시고 있었다. 어려서 무슨 뜻인지도 모르지만 결코 좋은 말 같지 않은 아버지의 언어들은 온몸을 웅크린 채 눈물을 흘려대느라 머릿속이 아득해진 덕분에 기억 속에서 아스라이 잊혀 갔다.
아버지의 폭력과 폭언은 아이들이 자는 시간에 주로 이루어졌지만, 아이들 앞에서 한 번 보여주기 시작하자 때를 가리지 않고 자주 일어났다. 그리고 선미의 마음속에는 이런 희망의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아빠만 없으면 참 행복할 텐데…'
초등학생 때 아버지가 홀로 배낭을 메고 도보여행을 한 달 이상 떠난 적이 있다. 선미의 집에는 오지 못할 행복한 시간이 주어졌다. 아이들 셋의 웃음이 끊이질 않았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아버지가 곁에 없다는 것만으로도 긴장과 스트레스는 사라졌다.
아버지가 없는 그 한 달의 시간이 없었다면, 모르겠지만 한 번 맛 본 이상 선미는 그때의 기억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후에 줄곧
'아빠만 없으면…'
이 생각이 늘 선미의 뇌리에 박혀 있었다.
그리고 바로 평범했던 그 날 오후, 선미가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가정의 영원한 행복을 쟁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아버지를 영원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릴 그런 기회 말이다.
선미가 칼을 부엌에서 가지고 나오는 순간, 아버지는 일시정지의 상태가 되었고, 지나는 선미를 달래기 시작했다.
"우리 선미, 착하지. 그 칼 이리 줘."
처음 이불속에서의 그 날처럼 이 날도 선미는 눈물을 쏟고 있었고, 칼을 들고 있던 손 끝부터 머리 끝 그리고 발 끝까지 주먹을 꽉 움켜쥔 채 긴장하고 있었다. 눈 앞도, 머릿 속도 아득했다.
30대가 된 선미는 간혹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은 오히려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그때 정말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졌다면, 난 신문 한 면을 장식하고 지금처럼 평범하게 살고 있지 못했을 텐데…'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선미가 대학 졸업을 앞둔 해에 그토록 바라던 아버지와의 영원한 이별이 찾아왔다. 하지만 선미가 그토록 꿈꾸던 가정의 행복이 함께 찾아오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