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인계받는 중입니다

by 라프

#인수인계를 받다

몇 주 동안 인수인계를 받지 않으려고 그렇게 도망 다녔는데 결국 내가 인수인계를 받게 되었다. 인수인계를 받아보니 그동안 내가 무언가 새로운 제안을 할 때마다 담당 과장님이 왜 그렇게 싫어했는지 이해가 된다. 광고라도 하나 붙이면 그만큼 일이 늘어난다. 과장님이 인수인계를 받을 때만 해도 지면 광고뿐이었는데 입사 한 달 차이이며 온라인 마케팅을 담당하게 된 내가 오면서 온라인으로 벌어들이는 광고 수익이 늘어났고, 그 수만큼 일이 늘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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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매달 발행되는 월간지이다 보니 광고 관리, 구독자 관리, 배송 등 크고 작게 신경 쓸 일이 많았다. 거기에 본사에서 요구하는 보고용 자료 만드는 것도 꽤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다.


#수많은 엑셀 파일을 보며

여러 군데로 보내는 각기 다른 발송 리스트, 정기구독자를 포함한 구독자 리스트, 광고 리스트, 구독 리스트, 입금 리스트 등 매달 관리하고 정리해야 하는 엑셀 시트가 몇 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렇게 많은 엑셀 시트들을 보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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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어떻게 정리하지? 손이 안 가는 형태로? 어떻게?'


엑셀 전문가를 초빙해서 이 모든 데이터가 통합되게 하나의 엑셀 시트를 만들어 달라고 해 볼까? 그렇게 만들 경우 데이터 하나를 잘못 입력하거나 중간에 수식을 잘못 건드렸을 때 엄청 꼬여 버리게 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을 텐데 이건 좀 최악의 상황이다.


책의 입출입 관리도 해야 하니까 물류 시스템을 알아봐야 하나. 마침 계열사 중에 재고관리와 유통관리를 하고 있는 곳이 있어 물어봤더니 사용 중인 프로그램을 알려줬다.


#인수인계는 끝나지 않았다

과장님은 내일 퇴사를 앞두고 있다. 인수인계를 받지 않으려고 도망 다니던 몇 주 전부터 계속 내게 했던 말은


이거 인수인계하는데 시간 꽤 오래 걸려. 어떻게 하려고. 나야 나가면 끝이지만…


였다. 정리한 파일들을 하나씩 열어봤는데, 얼마나 꼼꼼하게 설명을 잘해 놓았던지 파일 정리하는 법 등은 그것만 읽어봐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정작 현재 광고주들과 진행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등이 정리가 안 되어 있어 내가 다시 정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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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이 맡고 있던 업무를 기존의 직원들이 나눠서 할지, 새로운 사람을 뽑아서 시킬지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어쨌든 퇴사를 앞둔 사람들은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갈 분은 기분이 무척 좋은 것 같다. 인수인계를 하고 자기 자리를 정리하는 데 왠지 신나 보인다.


#내가 퇴사를 한다면

사실 나 역시 틈만 나면 다른 곳에 입사지원을 하고 있다. 아직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번에 인수인계를 받으면서


나도 인수인계해 줄 내용을 평소에 조금씩 정리해 놓아야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향후 몇 년은 더 있을 것 같지만, 사람 일이라는 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혹여 갑자기 퇴사를 하게 된다면이란 가정 하에 매일 아니면 매주 조금씩이라도 내가 하고 있는 업무를 정리해 놓아야겠다. 누가 와도 내가 맡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말이다.


#내가 없어도 회사는 돌아간다

영업 담당 과장님도 그만두는 마당에 나까지 없어지면 회사가 돌아갈까? 이런 생각을 하지만 사실은 이런 종류의 생각은 기우일뿐이다. 사람 뽑는 게 힘들긴 해도 새로운 사람이 뽑히든 아니든 회사는 돌아가게 된다. 단지 불편해지긴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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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에디터, 영상팀, 사진팀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같은 자리를 거쳐갔다. 개개인의 역량에 따라 과정이 수월해지거나 어려워지기도 하고,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개인이 해내는 업무에서 개개인이 가진 가치-돈이든, 명예든, 성장이든-를 실현해내기 어렵다고 판단되면 그 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


에디터 한 명은 본인이 회사에 기여한 바가 무척이나 큰데 그에 비해 연봉이 너무 낮다고 얘기했고 그가 원해 연봉은 현재 회사에서 차장급이 받는 이상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붙잡을 수가 없었다. 또 다른 에디터는 기자임에도 글을 쓰는 게 어려워 매번 기사를 쓸 때마다 다른 선배 기자가 붙잡고 '이건 이렇게 써야 한다'라고 가르쳐야 했다. 가르치는 사람도 힘들지만 그렇게 배우는 사람도 힘들다. 결국 본인이 잘할 수 있는 곳으로 떠났고, 다른 에디터는 자신의 언어 능력을 살려 전혀 다른 분야로 진출하기 위해 떠났다. 영상팀 직원은 자신이 편집하고 싶은 분야에서 일하기 위해 갔고, 사진팀 중 한 명은 자기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떠났다.


회사는 영원하지 않고 그 자리의 사람 역시 영원하지 않다. 다만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때 최선을 다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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