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의 추억

by 라프

#2000년 여름

1학기 기말고사 시험기간, 중고등학생 시절 내 생일은 늘 시험기간에 포함되어 있었다. 고등학교에서 2학기 시험이 끝나고 집 앞에 도착했다. 대문을 열고 2층 슬레이트 지붕이 덮여 있는 마당을 지나 1층 피아노 학원 뒷문 앞에서 시작하는 계단을 올라 2층 집으로 향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신치의~~ 생일 축하합니다~~~!!!!

'이건 뭐지?'하고 어리둥절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지만 2학년 때는 뿔뿔이 흩어져 다른 반이 된 절친들이 깜짝 생일파티를 해 주기 위해 집 현관 앞에 숨어 있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은 생일 파티에 시험을 망쳤다는 사실도 잊은 채 친구들과 신나게 놀았다.


#2013년 여름

합정역 크리에이티브 살롱 9 카페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같이 일하고 있던 오랜 친구가 점심때 즈음 찾아왔다. 생일이라고 밥과 미역국 그리고 김치전을 만들어 왔다. 엄마 말고 생일 미역국을 끓여준 사람은 친구가 처음이었다. 늘 무심하고 공감도 못 해주는 친구라고 구박하지만, 이렇게 생일상을 챙겨주는 친구의 마음이 고맙고 또 미안했다.


#서른 살 생일에 쓴 글

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서른 즈음에>, 김광석


이 노래의 가사를 온전히 음미할 수 있는 나이 서른이 되었다. 서른 살 생일이다. 이십 대의 어느 날에는 빨리 서른이 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왠지 서른이 되면 삶의 방향이라는 것도 정해지고, '안정'이라는 테두리 속에 살고 있을 것 같았다. 남들처럼 대학을 졸업하고, 번듯한 직장생활을 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명함도 바뀌어 여자 서른에 맞이할 수 있는 커리어를 차근차근 밟아가고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계획대로 될 거라 믿었다. 하지만 계획들이 어긋날 때마다 좌절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계획에 대해 달리 생각하기로 했다. 프랑스 소설가 앤드류 모르아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한 번도 생활의 마스터플랜 같은 것을 세워 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단기간의 계획은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도 우연히 작용되어 계획이 말살되고, 때로는 묻혀 버리게 되고, 때로는 개선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뜻밖에 일어난 일이 나에게 주제를 제공하여 준 일도 있었습니다.

내게도 '무계획이 계획'이란 신념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닥치는 대로 우연에만 기대어 살겠다는 것은 아니다. 나름의 원칙을 세우고 살아갈 것인데, 몽테를랑처럼 두 가지 원칙을 지키며 살고 싶다.


"늘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일을 할 것, 늘 마음에 당기지 않는 것은 내일로 미룰 것"


서른인 지금이 좋다. 내가 기대했던 바와 많이 다르지만, 그토록 찾고 싶었던 '나'를 찾아가는 과정에 있는 이 시간을 값지게 생각한다. 내 멋대로 회사를 만들고, 하고 싶은 실험들을 하나씩 해 나가고 있다. 돈 되는 것들에 관심 기울이기보다 돈 안 되는 것에만 계속 손이 간다. 그래서 결국 시급 5천 원짜리 생계형 알바를 시작했다. 안정된 직장도, 매달 꼬박 나오는 월급도 없지만, 자유가 있어서 지금 현재의 내 모습이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자유를 위해 돈을 포기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자유를 선택하면서 '돈'이 따라오는 인생을 만들고 싶다. 10년 뒤 마흔이 되었을 때의 내 모습은 계획하지 않기로 했다. 단지 상상만 할 뿐. 모르아가 얘기했듯이 작가를 꿈꾸지만 <파우스트>와 같은 작품을 써낼 수는 없다. 어떤 작가들처럼 '인생 자체가 베스트셀러'인 작가가 되었으면 한다. 보잘것없는 인생을 쌓는데도 인생은 너무나 짧기만 하니까(모르와).


#내일모레 마흔 살을 앞둔 생일

이번 생일에는 예전에 타오 언니와 당일치기 여행으로 무작정 찾아갔던 무창포 해수욕장에 갔다. 그때는 바다를 잠깐 보고 바다 근처 카페에서 타오 언니와 함께 글을 썼다. 하루 종일 글을 쓰다가 느지막이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던 것 같다.


그때의 무창포 해수욕장을 다시 오니 왠지 감회가 새로웠다. 서른 살 생일에 쓴 글에서 '인생 자체가 베스트셀러'의 '베스트셀러' 정의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ㅎㅎ 지금 내 인생은 스스로 만족스럽고 행복하며 내 인생의 최고의 순간을 지나가고 있다. 뭐 굳이 얘기하자면 매 순간순간이 최고라고나 할까.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이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으니 최고일 수밖에...


5년 뒤, 10년 뒤의 생일에도 지금처럼 건강하고, 최고의 순간을 살고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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