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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캬닥이 Oct 17. 2019

어슐러 르 귄, 세상을 듣던 이의 삶

<어슐러 르귄의 환상특급> 감상

<어슐러 르귄의 환상특급 (World of Ursula K. LeGuin)> 을 보고 왔다. 황금가지 출판사 이벤트 덕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르귄의 책을 SNS에 소개해 13회 여성인권영화제 초대권을 받았다. 르귄의 작품을 홍보하기 위한 행사에 당첨된 만큼, 존경과 감사를 담아 감상평을 올린다. 르귄을 알지만 영화를 보지 않은 이에게는 마음을 함께 나누고 아직 책을 읽어보지 않은 이는 그의 세계에 엿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영화를 상영한 13회 여성인권영화제


<어슐러 르귄의 환상특급>은 작가의 생전 사진과 영상을 모아 생애를 재현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몸이 반응했다. 르귄의 목소리였다. 십수 권 책에서 작가의 목소리를 들었건만 실제로 듣기는 처음이었다. 낮고 선명해 그와 어울렸다. 


대표작으로 어스시 연대기와 헤인 사이클 몇 편을 소개했다. 작가가 그린 지도와 컴퓨터 그래픽으로 된 우주와 행성이 나왔다. 서사를 압축한 유화 애니메이션은 한 장 한 장 그린 듯했다. 닐 게이먼을 비롯해 영미 작가들의 해설이 잇따랐다.


작가로서 르귄만큼 부러운 사람이 있을까. 그는 항상 이야기를 상상해서 쓰는 대신, '주인공에게 이야기를 듣고 온다'고 말했다. 르귄의 SF 연작 헤인 사이클은 인류가 먼 행성에서 새로운 사회를 살아가는 이야기다. 르귄은 자신의 우주를 누비며 행성 거주민과 그들을 잇는 조직인 에큐멘의 이야기를 들었다. 다짜고짜 이야기를 들어 달라던 로캐넌을 시작으로, 겨울 행성 게센에서는 겐리 아이의 말을 듣고, 행성 우라스와 위성 아나레스 쉐벡의 사연을 받아 적었다. 내게도 그런 상상력이 살아있다면 최고의 작가가 되지 않더라도 홀로 내 우주를 날았을 터다. 나처럼 그 세계를 부러워하는 사람이 많았나 보다. 르귄은 독자와의 만남에서 말했다. "작가가 되는 일에 쉬운 길은 없다. 그러나 그 일은 평생을 걸 가치가 있다."


평생을 걸지 않는 이상 르귄의 상상력에는 닿지 못하리라. 그러나 잘못과 모자람을 인정하는 태도는 본받을 수 있다. 그는 잘못을 인정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었다. 6-70년대는 르귄의 전성기였다. 어스시 사이클 1-3편, 헤인 사이클 <어둠의 왼손>, <빼앗긴 자들>이 나왔다. 그러나 르귄은 이 시기 자신을 '남자인 척 글을 쓰는 여자'라고 평한다. 앞서 언급한 작품의 주인공은 모두 남자다. 딱 한편 <아투안의 무덤>의 주인공 테나만 여자였으나, 관습에 따라 무녀가 되고 남자 마법사 게드에 의해 구출되는 역할이었다.


르귄은 서서히 변했다. 비판을 받아들였다. '양성인이 사는 행성의 대명사가 남성형', '남자밖에 없는 마법 학교' 등 얼렁뚱땅 넘긴 세부 설정에 대한 지적이었다. 작품을 성찰하고 자신의 우주에 더욱 귀를 기울였다. 상상의 세계에서조차 너무 작아서 들리지 않았던 약한 사람들이 비로소 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 끝에 어스시 사이클 4편 <테하누>가 나왔다. 어스시 사이클의 1-3편이 이후 판타지 장르의 토대가 되어 끊임없이 변주되었다면, <테하누>부터는 현재까지도 르귄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로 남아있다. 헤인 사이클도 변했다. 장편보다 중·단편이 늘었다. 영웅의 긴 서사보다 작은 사람들의 힘겨운 이야기에 집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용서로 가는 네 가지 길>, 단편집 <세상의 생일> 등이 그렇다. 우리와 다른 행성과 사회에 사는 사람들조차 불합리에 좌절하고 끊임없이 욕망하는 모습이 힘겹다. 


그는 잘못을 인정하되, 과거 작품을 수정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주인공에게 직접 듣고 온 이야기를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으니까. 한편으로는 과거를 인정하고 자신의 세계를 해쳐나가는 모습이 르귄다웠다.

자신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사람들에게 자기 말과 글을 알리는 이는 얼마나 용감한가. 이름이 알려지던 1960년부터 죽기 직전까지, 르귄은 자신의 위상을 자각하고 이용했다. 자신의 작품은 물론이고 작가 자신으로서도 세상과 접촉해 세상을 바꾸려 노력했다. 행동이 정점에 달한 순간은 2014년 전미 작가상의 수상 소감을 발표할 때였다. 닐 게이먼의 말을 옮기면 '아마존의 후원을 받아 열린 수상식에 아마존을 비판했다'. 영상 속에는 고급 테이블에 앉아있는 수많은 사람, 연단 위에 올라선 허리가 굽어가는 할머니, 그에게서 나올 리 없을 강한 목소리와 그보다 더 강한 메시지가 있었다. 


생애를 관통하는 반성, 반성이 낳은 말과 행동에 세상이 변했다. 독자들과 SF/판타지 장르 모두 그를 따라 성장했기 때문이다. 르귄을 두었던 미국 문학은 운이 좋았다. 작품이 번역되어 한국어로 읽고 누리는 우리도 복이 많다. 영화에는 이따금 모르던 작품이 나왔다. 아직 읽어야 할 르귄의 책이 많아 행복하다. 


르귄이 곰방대를 피우는 모습이 멋져 곰방대 배지를 구입


여성인권영화제 행사도 많았다. 르귄 덕분에 좋은 영화제 하나를 알았다.


커버 이미지 출처: https://worldsofuk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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