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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캬닥이 Sep 29. 2021

자기가 우울한 걸 눈치채주세요!

<미처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감상평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은 2-30대 여성 우울증을 다루는 책입니다. 여성의 우울증이 과연 그들의 ‘예민한 성향' (과학적인 표현으로는 ‘에스트로겐’) 때문인지 문제를 제기하고, 취약한 환경에서 기댈 존재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옮겼습니다. 저자 하미나는 우울증을 겪는 여성들의 인터뷰를 지면에 옮기고 엄살부터 회복까지 나누어 정리했습니다. 힘들었던 자신의 경험도 함께 썼고요. 여러가지 연구와 문헌 조사로 객관성을 유지하면서도, 저자가 책을 통해 하고싶었던 이야기인 개인의 목소리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표지 출처 알라딘 (http://aladin.kr/p/k4zpH)


책을 읽기도 전부터 잔뜩 공감할 걸 예상했습니다. 동시대 여성이자 연구자로서 저도 힘든 시절을 겪었으니까요. 연구실을 다니던 시절, ‘입학 때와 달라졌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농담으로만 들었지 스스로 어떤 상태인지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연구실 동료의 권유로 학교 심리상담센터에 가면서 저자가 말한 ‘진단’의 안도를 느꼈지요. MMPI결과지에 나온 ‘우울 상위 2%’를 보고서야 제 상태가 어떤지 알았습니다. ‘나는 우울했구나, 지금 일이 힘든 것은 내가 모자라기 때문이 아니라 우울하기 때문이구나.’


책에도 대학원생 인터뷰이가 몇몇 있습니다. 석사 연구 주제를 발전해서 낸 책인 만큼 주변 사람들부터 연구를 시작한 이유가 크겠지만, 전공 불문 연구자라는 입장 자체가 우울에 취약한 것 같습니다. 대부분은 과거의 저처럼 자신이 우울한 줄도 모르고 시기를 버티고 넘어갈 것이고요. 그런 이들에게 이 책과 학교 상담 센터를 권하고 싶습니다. 우울증 환자들의 증언은 ‘너만 힘든 것이 아니다. 우울한 사람은 이렇게 많다'는 공감을 줄 것입니다. 진단은 ‘고작 이만큼만 힘들어도 우울한 것이다'고 위로할 것이고요.


책을 읽으며 마음속에서 스스로를 비아냥대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힘든데, 너는 고작 대학원 힘들었다는 네 기억만 떠올리냐’는 것이었지요. 때마침 저자가 말했습니다. 자신이 ‘이삼십 대 여성의 고통에 주목한 이유는 이들이 가장 아픈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이들이 고통의 목격자이기 때문(220쪽)’이라고요. 그때서야 마음속 목소리도 사라졌습니다. 우울을 나약함으로 보는 통념을 깨고 고통을 터놓고 나누기 위해서는 먼저 고통의 비교가 사라져야 할 겁니다.


‘우울증은 나약한 여성이나 걸리는 병’이라는 관점은 남성의 우울을 외면하는 결과도 함께 낳았습니다. 우울증을 포함한 정신 질환은 근대에 와서야 정의되었습니다. 우울증 환자가 항정신성 의약품과 함께 증가했다는(89쪽) 이야기만 봐도 진단의 임의성을 알 수 있고요. 게다가 항우울제 임상 시험은 여성 환자를 대상으로만 진행되었습니다. 우울증 자체가 여성의 증세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질병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102쪽). 편향된 진단 기준은 여성보다 남성의 자살율이 높은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나라 기준, 자살을 시도한 남성들 중 절반은 우울증이 아니라 알코올 사용장애였습니다(234쪽). 제대로 된 진단이었다고 봐도 될까요? 알코올은 삶에서 겪은 고통을 해결하려는 수단이었을텐데요.


'알코올 사용장애'는 '심리, 대인관계 문제'의 원인일까요 결과일까요


책을 시작으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고통을 목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고통을 믿고, 나누고, 어떤 방향이든 좋으니 아프지 않도록 나아가면 좋겠어요. 저로 말하자면, 저는 상담을 받으면서 대학원 자치회에 가입했습니다. 가장 힘들 때는 곁에 배우자가 있었고요. 지도교수님의 배려로 연구를 다시 시작하고, 졸업 후 새로운 일을 하며 회복했습니다. 하나라도 빠졌다면 우울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을 겁니다.


나아가,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귀울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책은 2-30대 여성의 고통으로 시작했고, 이들은 자신의 고통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니 좋은 출발이지요. 들어본 적 없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나아갈 길을 상상하면 좋겠어요. 낙수 효과는 강자에게 주는 이득이 약자에게 흘러 넘치는 식으로는 생겨나지 않습니다. 고통받는 이들에게 공감하는 사람들이 늘며 배려를 받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이야말로 진짜 낙수 효과일 거예요.





* 원래 브릭(ibric.org)의 서평 연재글에 올리려고 쓴 글인데, 개인적인 이야기가 많이 들어가 브런치에 올립니다. 바이오 전공자들 모두 행복하면 좋겠습니다...


알코올 사용장애 소개 자료 출처: 진료분야 > 알코올 사용장애 | 국립춘천병원 (cnmh.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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