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함은 연구실 밖에서
졸업으로 시작하는 분자생물학 공부
생명과학을 전공했는데도 분자세포생물학을 듣지 못하고 졸업하기가 못내 아쉬웠다. 시간이 남아 집에서 교과서를 읽기 시작했다. 무턱대고 읽다간 한 두번만에 끝날 게 뻔해 '챌린저스'라는 앱에도 가입했다. 매일 목표에 돈을 걸고 달성하면 환급해주는 앱이다. '2주 간 하루 한 시간 공부하기'를 신청하고 매일 읽은 교과서의 인증샷을 찍었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한 단원을 읽었다. 학교 수업도 일주일에 세 시간, 한 단원 씩 나가니 효율은 비슷하다. 앞으로 계속할지는 솔직히 자신 없다. 대학원 1년짜리 수업에 해당하는 내용을 여섯 달 동안 독학할 의지는 돈을 주고도 사기 힘들다.
의지를 돈 주고 사는 앱 챌린저스. (https://www.chlngers.com/)
분자세포생물학 교과서는 멋진 게임이나 소설보다야 재미가 덜하다. 하지만 '과학적 사실에 기반한 재미'는 다른 데 없을 신기함이 있다. 오늘 본 교과서에는 유전자가 통째로 복제되며 일어나는 진화 내용이 있었다. 글로빈 단백질(산소 분자를 담을 수 있는 단백질)의 유전자가 우연히 통째로 복제되었다. 복제된 유전자가 조금씩 변해 글로빈은 알파 글로빈과 베타 글로빈으로 나뉘었다. 서로 다른 글로빈 분자가 모여 글로빈 넷짜리 헤모글로빈이 되었다. 헤모글로빈은 글로빈 하나보다 산소를 운반하는 효율이 높다. 몸 곳곳에 산소를 효율적으로 운반하게 되자 동물의 몸집이 커졌다. 작은 유전자 하나에서 생긴 변화가 동물계의 진화를 이끌었다는 결론은 경이롭고 재미있다.
정작 한참 연구하던 시절에는 교과서 공부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분야의 최신 연구를 따라잡기에도 시간과 기력이 부족했다. 특히나 생명과학 특성 상 일과 시간을 대부분 실험에 쓰다보니 모든 공부 시간이 논문 읽기의 기회비용으로 느껴졌다. 실험실의 연구 분야란 넉넉히 잡아도 교과서 전체 중 두세 단원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철 지난 연구가 대부분이라 시간을 들여 읽을 가치가 없어보였다. 이제와서 연구 부담이 사라지니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는 즐거움만으로 교과서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대학원을 나올 때가 되자 전공 공부가 재미있어지니 아이러니다.
내 책은 맨 위의 4판이다. 연구실 다닐 때는 책장 칸막이로나 썼다 (출처 MBoC 페이스북 (https://ko-kr.facebook.com/GarlandScience.MBoC/
한편으로는 대학을 떠나며 전공 공부하는 즐거움과 멀어져서 아쉽다. 인문학 학습 공동체는 슬슬 보이는데 자연과학 공동체는 학계 밖에서 본 적이 없다. 교양 과학이나 SF 소설을 읽는 모임은 있어도 과학 전공서를 읽는 모임은 못 봤다. 졸업 후 여유가 생긴다면 비슷한 사람들을 모아 과학 공부 모임을 만들거나 취미 과학인들에게 지식을 나눠주고 싶다. 당장은 내 공부가 먼저다. 새로운 개념을 이해하고, 경이를 찾는 감각을 쭉 유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