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현의 딜레마
▶ 연극 <그때, 변홍례> 2018.5.18~27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3관
아트원씨어터 3관은 하우스를 오픈한 이후에도 무대 설치에 여념이 없었다. 관객이 들어서고 있는데 배우와 스탭이 회의를 하고, 몸을 풀고, 무대를 만든다. 지금 내가 객석에 앉아 있는 게 맞는지, 8시에 공연이 시작할는지 혼란스러움이 찾아든다. 그러면서도 공연 준비를 하는 분주한 모습을 힐끗거리게 된다. 이윽고 8시,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이어지며 본격적으로 막이 오른다. 39회 서울 연극제 공식 선정작 연극 <그때, 변홍례>는 그렇게 시작했다.
공연이 시작되어도 갸웃거리긴 마찬가지. 수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차례로 따라가보자. 커다란 빔프로젝터엔 변홍례의 사건 기사가 띄워진다. 배우들은 기사를 함께 읽으며 마커 펜으로 화면에 밑줄을 긋고, 단어를 강조하며 공연을 위한 스터디 작업을 진행한다. 아,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공연 시작 후의 얘기다.
자기들끼리 협의를 마친 후엔 공연 안의 공연을 시작한다. 어라, 근데 무대의 양 끝에서는 배우들이 음향 효과를 내고 더빙하고 있다. 밝은 조명 아래 공연의 모든 장치들이 노출된다. 극중극을 만드는 거의 모든 요소가 투명하게 공개되는 거다. 백스테이지 움직임 역시 자연스럽게 노출된다. 극중극에 집중하다가도 관객의 눈은 이곳저곳을 관찰하기에 바쁘다. 흥미로운 것 투성이다.
이 연극이 주는 흥미는 엔딩까지 꾸준하다. 어쩌면 엔딩이 가장 충격적일 것이다. <그때, 변홍례>는 변홍례 사건이란 실화를 바탕으로 극을 구성했지만, 실화 이상을 담아내지 못한다. 결국, 그게 다라며 팔짱을 껴버린다. 변홍례 역의 배우와 형사 역의 배우가 이렇게 끝이냐고 되묻지만, 연극이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라며 선을 그어버린다. 연극은 연극을 필사활동(必死活動)하면 그만이라며, 그 이후의 이야기에 대해선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버리는 거다. 이는 연극이 원본을 넘어설 수 없음을 인정해버린 모양새다. 연극이 재현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라는, 일종의 자백이자 반성이다. 재현의 윤리로 여러 작품이 도마 위에 오르는 이때에, <그때, 변홍례>의 자기반성 혹은 고해성사는 더할 나위 없이 흥미롭고 특별하다.
그렇담 연극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야기의 가치는 무엇일까? <그때, 변홍례>의 연출, 윤시중 연출가의 생각이 궁금해지는 찰나였다.
"推理小說가튼"(추리소설 같은)
"마리아" "미녀교살" 사건을
"必死活動(필사활동)"으로 연극화한
그때, 윤시중 연출가를 만나보자.
관객들이 종이 스크린을 잊어버리길 원했습니다
E. 연출님께서도 <그때, 변홍례>를 재미있게 보셨나요? 공연을 올린 소감이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 객석에서 공연을 보고 있으면 배우들의 연기에 빠져들어 있거나, 새롭게 해석한 디테일이 나오는 걸 볼 때 가장 기쁩니다. 초연 공연을 올려놓고는 작품의 완성도보다는 앞으로의 가치나 방향에 대해서 고민하게 됩니다. "조금 더 연습을 해보면 더 힘이 생기지 않을까?" 혹은 "이번 작품은 여기까지가 끝인 것 같다"는 판단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때, 변홍례>는 계속 재공연을 통해, 새로운 연극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심을 낸 작품입니다.
E. 객석에 입장했는데 배우들이 무대 셋업 중이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셋업과 연습을 하우스 오픈 후에 하는 이유가 따로 있나요?
: 관객에게 완성된 무대의 환상보다는 극장 벽이 보이고 종이로 스크린을 만드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무에서 무대가 만들어지는 것을 확인시키고, 극 중 환상에 가서는 관객들이 종이 스크린을 잊어버리길 원했습니다.
E. 극중극 형식이다 보니 매일 조금씩 바뀌는 부분이 있는 것 같던데요. 그래서 특히 이 작품은 팀원들 간의 호흡과 공동체 작업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 초연이기에 어떤 방식으로 작업할지를 배우들과 스탭들이 같이 고민하고 시도하는 과정을 가집니다. 우리가 서로 합의가 되면 집중적으로 한가지 방향을 찾아가지요. 극장까지는 매일 새로운 형식을 시도하고 극장에 와서는 배우들이 스스로의 연기를 완성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E. 다양한 시도로 개성 있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극단 하땅세 답게 <그때, 변홍례>의 무성영화 스타일도 참 신선하고 재미있었어요. 무성영화 방식을 택한 이유가 따로 있을까요?
: 무성영화나 오래된 더빙 영화를 보면 지금의 시점으로는 촌스러움과 이질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번 변홍례 사건을 조사하면서 그 사건의 신문기사들을 보면, 그들 나름대로 사건에 진지하게 접근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있어요. 그걸 지금의 시각으로 본다면 매우 과장되었고 촌스럽다고 느끼겠지만요.
결국, 31년도 사건을 그 시대의 영화라는 매체로 표현한다면 어떨까 고민했어요. 무성영화의 표현법이 그 시대를 표현하는 가장 진정성 있는 표현법이었겠구나 판단했습니다.
E. 영화적 기법을 구현하기 위해 고전 영화를 많이 참고하셨더라고요. 고전 영화의 어떤 점을 참고하셨는지, 작품 내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궁금합니다.
: 우리나라에 남겨진 고전 영화들을 많이 참조했어요. <미몽>에서부터 1960년대 영화까지요. 제가 좋아하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라는 서부영화도 참조를 했고요.
처음에는 영화를 많이 참조 안 하려고 노력했어요. 지금 공연을 올린 후 보니, 다시 더 진지하게 그 시대의 영화를 연구해보고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창작자로서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방식과
그 반대편의 한계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E. 이 작품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욕망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욕망을 가진 변홍례를 관객들에게 어떻게 보여주고 싶었는지 연출님의 의도가 궁금합니다.
: 어단비 작가가 쓴 희곡 속 변홍례의 욕망과 주변인들의 욕망을 사실적인 단계보다는 그 시대의 영화 방식으로 과장되게,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결국, 우리 연극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면서 표현 양식에 대하여 다양한 시도를 해보았습니다.
E. ‘각 인물들의 욕망이 잘 드러난 희곡이기에 준비 과정에서 배우로서, 그리고 스텝으로서 욕망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씀해주셨는데 연출님이 연출로서 이 작품에 가지는 욕망은 어떤 걸까요?
: 가장 큰 연출의 욕망을 관객과 행복하게 만나고 싶다는 거지요. 그런데 ‘변홍례’라는 한 사람의 죽음을 공연의 소재로 다루는 것에 대한 책임감이나 창작의 허구에 대해서 부담을 느꼈어요. 그래서 그 부담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했지요. 창작자로서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방식과 그리고 그 반대편의 한계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E. 엔딩 장면에선 머리가 띵하고 울리는 기분이었어요. 실화를 대하는 연극인으로서의 고민이 제대로 담긴 엔딩이라 개인적으로 정말 좋았습니다. 한편, 연극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조금 무력하기도 했어요. 그렇담 “연극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들더라고요. 이에 대한 연출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 저도 같은 생각의 과정을 겪었어요. 그러다가 변홍례 역할의 이수현 배우의 몰입을 보고 ‘아’ 하고 발견을 했어요. 연출은 변홍례를 위로하거나 구해줄 수 없어도 변홍례가 되어 본 저 배우만큼은 누구보다도 변홍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그리고 수사를 해나가는 형사의 모습 또한 홍례를 이해하려는 몸부림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이 작품을 써준 작가 역시 홍례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구나 생각했어요.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E. 개인적으로 재공연이 너무 기다려지는 작품입니다. 재공연 계획이 있다면 다음 공연에서 시도하고 싶은 연출이 있는지, 아니면 극단 하땅세가 어떤 작업을 준비 중인지 살짝 힌트를 주실 수 있을까요?
: 이 작품은 한 호흡 기다렸다가 다시 한 단계 올려 보려 합니다. 배우들의 창의력을 더 활용하고 이번 공연에서 프로젝터를 사용하면서 발견한 ‘빛과 그림자=명암 ’의 방식이 작품 속 인물들의 의미와 연결되도록 그리고, 일제 강점기의 상징인 기차의 의미를 확장하려 합니다.
올 하반기 작업으로는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라는 소설을 연극화시키는 작업을 준비 중입니다.
E. 마지막으로 관객 여러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 다음번 <그때, 변홍례> 공연은 관객들이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흥미로운 공연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경험하러 오세요.
*
윤시중 연출가의 답변대로 <그때, 변홍례>는 아무것도 없는 무대에서 변홍례를 이해해보려고 발버둥 친다. 그 끝에 한계점이 있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윤시중 연출가의 도전, 극단 하땅세의 도전은 한 마디로 '무한도전'이다. 실패를 무릅쓴 채 전진하고 답이 없는 곳을 향해 천착한다. 연극은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실화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윤시중 연출가와 극단 하땅세는 끊임없이 고민하며 구도한다.
그 치열한 모습은 아름답다. 동시에 고맙다. 실화를 자극적으로, 신파적으로 재현하며 예술이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고 젠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게 <그때, 변홍례>의 미덕이며, 이 시대에 주목할 만한 창작진의 태도다.
쉽지 않은 길이다. 그 끝엔 낭떠러지가 있을 수도, 깜깜한 허무의 어둠만이 도사리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극단 하땅세의 도전은 무모할지언정 무한할 것. 무모할지라도 답이 없을지라도 그 도전이 멈추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부디, 앞으로도 필사활동(必死活動)!
http://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354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