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진한 짝사랑이 여자였기에 나는 더 애달았다
선머슴 같은 짧은 머리, 꺽다리처럼 큰 키에 허스키한
목소리, 강변가요제 대상 축하 소감에
”마이클 잭슨“를 목청껏 외치던 갓 스무 살이던
가수 이상은!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내가 열세 살, 초등학교 6학년 때 일이었다.
하루아침에 벼락스타가 종종 탄생하던 시절,
‘담다디’로 혜성처럼 등장한 그녀의 인기는
마치 로켓을 쏜 것 같았다.
내 가슴에도 쿵 로켓 파편이 심장에 박혔다.
당시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 사진을 코팅해서 책받침으로 쓰거나 연예인 얼굴이 새겨진 지우개,
연예인 사진을 마분지에 더덕더덕 부친 필통이 유행했다.
그러나 그것은 물이 조금이라도 닿으면 흐물거리다
안이 벌어지고 책받침은 사각의 각진 모서리 부분이 조금씩 입을 헤 벌리다 결국 안에 종이와 코팅이
분리되어 쫙 찢어지는 일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나의 스타를, 나의 언니를 내가
상처 주고 있다는 생각에 책상에 엎드려 펑펑 울었다.
처음엔 놀라서 관심을 보이던 친구들이나 선생님도
그 이유가 고작 연예인 때문이라는 것에
황당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여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건 박남정이나 소방차를
좋아하는 것보다 100배는 더 힘들었다.
나는 자꾸만 그녀를 닮고 싶었다.
허스키한 목소리, 꺽다리 같은 걸음걸이,
연필을 쥐는 특이한 손 모양까지...
다 닮고 싶었다.
어느 날, 나는 몇천 원을 모아 미용실에 가서
긴 머리를 싹둑 잘랐다.
옷도 오빠 것을 주워다 입고 목소리도 괜히 낮게 깔았다.
목욕탕에 가서
“ 어머 얘! 남탕은 이쪽이야!”
하는 소리를 들으면 나도 그녀와 같은 에피소드를
경험했다는 것이 뛸 듯이 기뻤다.
엄마는 하나뿐인 딸이 변화에 몹시 못마땅해했지만
이미 사랑에 빠져버린 나를 엄마도 어찌하지 못했다.
여러 예능프로에 나오고 10대 가수상을 받으며
급기야 영화까지 찍는 이상은 언니의 인기는
날로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조금씩 이상은을 예사롭지 않게 좋아하는 친구들이 등장했다. 우리 상은 언니라는 친구의 말도 눈에 거슬리고, 나보다 자기가 더 많이 좋아한다는 말에
눈을 부릅뜨고 증명해 보라고 다그쳤다.
매일 그녀의 라디오를 듣고 그녀가 나오는
모든 프로를 기다렸다가 보고 언제 나올지 모르는
1분 광고를 비디오에 녹화했다.
내가 중학생이 되기까지 그녀는 나와 함께 했다.
그녀가 돌연 방송을 중단하고 미국 유학을 결정하자
그 맹신했던 사랑도 서서히 시들어갔다.
내 머리는 다시 자랐고 나는 가끔 치마를 입는
평범한 중학생이 되어 신혜철이나 ‘사랑일 뿐야’를
부른 김민우 같은 미소년 오빠에 관심을 가졌지만
그 이후에도 이상은처럼 그렇게 열렬히 사랑했던
연예인은 없었다.
인생에 단 한 번 찾아오는 첫사랑, 첫 짝사랑의
가슴 설렘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열세 살, 인생에서 처음 맛보는 감정이
왜 하필 연예인이었냐고, 왜 여자였을까 생각해본다.
그 사람에게 마음을 뺏겼을 땐 이미 내 하얀 원피스는
커피 자국이 깊게 베어 버린 후다.
자전거 거울에 반짝 비친 그 사람의 한 조각이
단단히 마음에 박혀 도려낼 수 없는 자국을
남긴 것 같다.
그 사람이 훅하고 공기 중에 밀려와
나는 이유 없이 아프고 얼굴이 달아오르고
하루 안에 그 사람만 가득하다.
나보다 그 사람이 더 많이 내 머릿속에 들어가
나만 봤으면 좋겠고 나하고만 이야기했으면 좋겠고
그 사람에게서는 좋은 샴푸 향이 나고 그 사람은
항상 반질반질 잘 닦인 마룻바닥같이 빛이 난다.
그 진한 짝사랑이 여자였기에 나는 더 애달았다.
울면 진심으로 토닥토닥해줄 것 같고
매일 같은 고민에도 밤새워 위로해줄 것 같은 언니였기에..
예쁜 커피숍에서 사랑스러운 마카롱을 나눠 먹으며
3시간도 넘게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 꽃을 피울 것 같은 언니였기에..
결혼 후 서로의 아이를 들여다보고 외삼촌보다 가까운 이모로 영원히 내 곁에 있을 것 같은 언니였기에..
나는 더더 애달았다.
여자가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남자를 사랑할 때보다
더 힘들다. 그래서일까.
내 기억 속 그 짝사랑은 이후 수많은 나의 연애 기억 중에 아주 오래 숙성한 포도주처럼 더 진한 여운을 가지고 있다.
남편과 아들 둘,
도합 남자 셋과 살고 있는 나는
그래서 여전히 언니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