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게 삶을 재정비하는 마음으로.
매년 3월, 새 학기를 시작하는 아이의 마음으로 내 마음도 함께 술렁거린다. 1월에 산 다이어리에 새해 결심을 적고 작심삼일에 좌절하다가, 2월까지 얼레벌레 시간을 보내기 마련. 3월이 되면 또다시 새 학기의 결심을 한다. 이 결심 또한 언제까지 유효할지 모를 일이나, 3월은 항상 나에게 '두 번째 결심의 시간'이었다. 새 학기가 3월에 시작한다는 건 그래서 1월의 결심을 지키지 못한 나에게 유예기간을 주는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작년 11월부터 글을 쓰면서 생긴 긍정적인 변화는 자주 내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지금껏 생각 없이 살다 몸에 배어버린 패턴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강렬하게 하기 시작했다. 나의 지금은 이전 10년간의 생활이 만들어낸 것의 총합이라고 생각하면, 더 열정적인 30대를 살걸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육아를 핑계로 나를 돌보지 않았던 시간들, 생각 없이 소비에 집중했던 시간들, 책을 멀리하고 넷플릭스를 끼고 살았던 시간들이 합쳐져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어긋나 있던 부분들을 하나하나 되돌리려 하니 시간과 품이 많이 드는 게 당연하다.
마침 3월이 다가오기 얼마 전 <아주 작은 습관의 힘>이라는 책을 읽었다. 저자는 야구 선수를 하다가 심한 부상을 당하고 나서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맞는다. 자기 스스로의 생활을 정돈하며 규칙적인 일들을 습관으로 만들어, 놀랍고도 엄청난 변화를 스스로 이룩해 냈다. 저자는 습관을 내 의지로 만드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고, 몸과 마음이 편하게 적응할 수 있는 시스템을 작은 것부터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시스템이 잘 작동하게 하려면 나의 정체성을 시스템에 맞추는 과정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서 정리하는 습관을 들이고자 한다면 나의 정체성은 '정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정리하는 사람의 관점으로 일상생활을 한다면, 당연히 모든 면에서 정리정돈을 쉽게 하게 된다.
이 책은 자제력을 쉽게 잃을 수 있다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한다. 자제력을 발휘할 필요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제시하여, 습관 만들기를 좀 더 쉽게 끌어주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포인트이다. "굳이 애쓰지 마. 시스템을 만들고 실천해 봐. 그럼 저절로 되는 거야."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내가 궁극적으로 되고 싶은 사람은 스마트폰을 내 의지로 조절해 사용하는 사람이다. 스마트폰을 사용한 지 10년이 넘었는데, 이 신문물이 내 손에 들어온 순간부터 나는 철저히 지배당하고 있다. 내가 주인인지, 얘가 주인인지 이번 기회에 확실히 해주겠다는 나의 의지는 늘 실패로 돌아간다. 침대에 쏙 들어가 온수매트 틀어놓고 스마트폰을 손에 쥐면 이보다 더한 꿀세상이 없다. 달콤하고 거부하기 힘든 그 세상. 하지만 그러다 보면 한두 시간은 훌쩍 지나있고, 하고자 했던 것들은 저 멀리 어느 별엔가. 하루이틀 쌓이게 된 이런 날들로 나의 10년이 채워져 있었다.
작은 것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다. 스마트폰을 덜 사용하겠다는 목표로 봄방학동안 아이덕에 생긴 책 읽는 습관을 합쳐서 <씻고 스마트폰 거실에 두기+자기 전 30분 독서+바로 잠들기> 세트를 실천해 보았다. 책벌레인 아이의 도움을 받고자 자기 전 30분 독서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더니, 흔쾌히 엄마옆에 와서 함께 책을 읽는다. 그리하여 며칠간 이 과정을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게 되었다.
"엄마, 엄마가 스마트폰 조절하는 방법을 확실히 알게 되면 나도 사줄 거야?"
이런, 내 목표를 공유했더니 부작용이 있다. 희망에 찬 아이가 금세 틈을 비집고 들어오지만, 그건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다음 스텝으로 시작한 일은, 아침루틴 세트.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멍 때리며 스마트폰으로 손이 가기 전에 침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집정리는 사실 집에 손님이 올 때 하는 것이었다. 평소에는 대강 어질러진 채로 있다가, 누가 집에 온다고 하면 대청소에 들어갔다. 어질러진 집이 아이의 창의력에 좋다더라 하는 어디서 주워들은 말을 신봉했다. 정신없는 침대며, 마구 쌓아뒀던 책, 옷등을 구석구석 정리하기 시작하면 왠지 모를 쾌감이 느껴졌다. 어질러진 집을 보며 '아 이제 손님이 올 때가 되었는데'하고 기다린 적도 있었다.
그러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항상 손님들을 위해서만 집을 정리하고 있지? 내 집에 사는 나를, 나의 가족들을 위해서도 정리할 수 있는 거 아냐? 실제로 침대 정리를 시작해 보니 2-3분 남짓이었고, 이 3분의 시간이 나로 하여금 나와 가족을 위하고 아낀다는 느낌이 들게 했다. 그러고 나서 맑은 정신으로 침대에서 잠깐 명상하듯 멍 때리는 시간을 갖는다. 그다음, 평소 하던 대로 아이를 꼭 안아주고 미지근한 물을 조금 마신다. <침대정리+멍 때리기+아이를 꼭 안아주기+미지근한 물 마시기>의 루틴이 생겼다.
이렇게 해서 생긴 나의 아침저녁 루틴.
씻고 스마트폰 거실에 충전시켜 놓기-책 30분 읽기-바로 잠들기-아침에 일어나서 침대정리-멍 때리기-아이를 꼭 안아주기-미지근한 물 한잔
별거 아닌 것 같지만, 확실히 스마트폰과 함께 눈을 뜨고 감지 않아도 되니 목표에 한발 다가간 느낌이 든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던가. 이제 또 어떤 습관을 저기에 합쳐볼까 고민하다가, 쓰지 않고 모셔두기만 한 예쁜 노트더미를 발견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매년 구입하던 다이어리 대신, 요즘은 예쁜 노트나 수첩을 구입한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갈 때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사게 된 것들이 몇 개나 쌓였다. 남편으로부터 '노트수집가'라는 영광스러운 별명을 듣게 한 장본인들이다. 글이 늘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고자 글쓰기에 대한 책을 이것저것 보다 보니, 필사만큼 좋은 방법이 없다고 한다. 이제 방향성 잃은 나의 노트들은 필사노트들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노트들에게도 마치 새 생명이 주어지는 것과 같은 일이니, 얼마나 영광인가. 아침습관으로, <빠른 아침 집안일 후, 거실 식탁에 앉아서 클래식을 틀어놓고 커피 마시면서 필사하기>를 추가해 본다. 이름을 붙여놓고 보니, 왠지 근사하다. 성공하면 여기에 한두 가지를 덧붙일 것이다.
우연히 마주친 이웃집 아주머니께서 아이를 다 키운 어른의 입장으로 내게 이것저것 말씀해 주셨다. 도움이 되는 말씀이 많아 귀 기울여 듣게 되었다. 아주머니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마음에 내내 남았다.
“무엇이든 용기를 내서 일단 시작해 보세요."
그녀와의 대화를 복기하다가, 20년 전 내가 제일 존경했던 교수님께서 내게 보내주셨던 문자가 떠올라 울컥했다. 사진첩을 뒤져보니, 옛날 핸드폰에서 캡처한 문자가 아직 남아있다. 1년간 학교를 쉬고, 하고 싶었던 거 다 해보고 여행도 다녀오겠다고 했을 때, 여기저기 교수님들께 불려 가 혼이 나면서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나를 울린 건, 내 지도교수님의 문자 한 통이었다. 유일하게 믿어주신 나의 교수님. 제일 존경했던 교수님. 부모님한테조차 혼나던 나에게 용기를 주셨던 교수님.
아무것도 안 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30대를 후회로 보내고, 내 일상의 아주 작은 변화부터 주도해 보겠다며 결심을 한 지금, 응원의 말을 또 들은 건 이번만큼은 꼭 용기 내어 뭐든지 해보라는 뜻인가 보다. 나를 믿어주신 천사교수님께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야겠다는 3월의 다짐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