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방 - 버지니아 울프
사유의 낚싯줄을 강물 깊이 담그기 위해선
여러분들은 여류 작가하면 누가 먼저 떠오르시나요? 사실 여성이 글을 쓰는 게 더 이상 이상하지 않은 사회에서 굳이 작가가 여성임을 인식하지 않게 되기도 하지만, 분명 여성 작가의 섬세함이 두드러지는 글들도 있습니다. 저는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가 가장 먼저 떠오르네요. 물론 머릿속에는 다른 작가들도 떠오릅니다. 제인 오스틴이나 샬럿 브론테, 에밀리 브론테, 그리고 마리 셸리 등. 현대 작가나 국내 작가도 으레 떠오르지만 굳이 다 적지는 않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무슨 순위를 매기려는 것은 아니니까요. 다만 그렇습니다. 제게는 ‘버지니아 울프’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울프의 책을 처음 접한 것은 학교에서 ‘여성 문학’을 수강했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첫 만남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유명한 울프의 글은 가뜩이나 원서 읽기를 힘들어하던 제게는 고역과도 같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장면을 몇 장이고 길게 묘사하기 일쑤였으니까요. 조금이라도 집중하지 못하면 몇 장을 거슬러 올라가 다시 읽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울프와의 인연은 몇 권을 더 거치고서야 어느덧 제 안에 자리 잡기 시작했죠. 오늘은 울프의 여러 작품 중 조금은 특별한 에세이를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바로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입니다.
『자기만의 방』은 울프가 1928년 10월 케임브리지 대학 뉴넘 칼리지의 예술 협회와 거튼 칼리지의 오드타에서 강연한 원고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후 원고를 수정하며 하나의 완성된 에세이를 발표한 것이지요. 일견 에세이라 하면 하나의 논지를 가지고 그 논지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제시하는 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글에도 하나의 주장이 있습니다. 오랜 고민의 끝에 내린 하나의 결론.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여러분에게 사소한 부분을 지적하는 의견 한마디, 즉 여성이 픽션을 쓰고자 한다면 돈과 자신만의 방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전하는 것뿐입니다,
흥미로운 주장입니다. 그리고 이 흥미로운 주장을 전하기 위해 『자기만의 방』은 조금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내부에 소설의 형식을 띤 것이지요. 역시 흥미롭습니다.
그래서 나는 소설가에 허용되는 모든 권리와 자유를 이용하여 내가 이곳에 오기 전 이틀 동안 겪었던 일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어깨에 짊어진 이 주제에 눌려 고개도 들지도 못한 채, 어떻게 그 문제를 고민하며 일상생활에서 끊임없이 생각했는지를 말입니다. 내가 지금부터 묘사할 내용이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는 아님을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요. 옥스브리지는 꾸며낸 대학이고, 퍼넘도 지어낸 칼리지입니다. ‘나’역시 실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부르는 편리한 용어에 불과합니다.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그 거짓말에는 진실이 섞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진실을 찾아내고 그중에 기억할 만한 것이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만약 그럴 만한 게 없다면, 내가 한 말을 통째로 쓰레기통에 넣고 잊어버리면 그만이지요.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생각한 바를 전달하기 위해 울프 스스로 가장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지요. 그리고 청중이면서 독자인 우리는 울프가 설정한 ‘나’의 생각의 여정을 따라가게 됩니다. 한 사람의 생각을 따라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나 그 안에 섞인 진실을 찾기 위해 기꺼이 따라가 보려 합니다.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에 골몰하는 ‘나’는 사유의 강에 낚싯줄을 던져 골몰하고 있습니다. 쉬운 주제가 아닌지라 몹시도 신중하고 집중하여 생각하며 걷고 있었지요. 그러던 그녀의 앞을 한 남자가 가로막습니다. 그 사이 물고기는 도망갑니다.
그 남자는 공포와 분노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순간 이성보다는 본능적인 깨달음이 도움이 되더군요. 그는 학교 관리원이었습니다. 나는 여성이었고요. 여기는 잔디밭이고, 길은 저쪽이었지요. 연구 교수와 학자들만이 여기를 지날 수 있고, 내게 허용된 길은 자갈길이었습니다.
여전히 여성 인권의 향상을 부르짖는 지금이지만, 채 100년도 안 된 과거 여성에 대한 차별적 대우는 놀랍기만 합니다. ‘저렇게까지?’라는 생각이 들죠. 단순히 일상에서의 차별뿐만이 아닙니다. 교육이라는 부분에서도 여성에 대한 차별은 만연했죠. 여성을 위한 교육 시설은 전무하다시피 했으니까요. 생각의 흐름을 따라 걷다 도서관에 도착한 ‘나’는 좀 전에 겪었던 당혹감을 도서관 앞에서 다시 느끼게 됩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은발 신사가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듯 내게 물러가라고 손짓을 하며 나타났으니까요. 갑자기 수호천사가 흰 날개가 아니라 검은 망토를 펄럭이며 길을 막는 것 같았습니다. 그 신사는 유감스럽지만 여자는 칼리지 연구 교수와 동행하거나 소개장이 있을 때만 도서관에 출입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습니다.
불평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어째서일까요? 도대체 무엇이 남성과 여성을 그토록 다른 입장에 있게 만들었던 것일까요? 원래 그렇지는 않았을 겁니다. ‘나’의 시간은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작가들의 오찬 모임에 참석하면서 그곳에서 멀지 않은 다른 오찬 모임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여기서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깨닫습니다.
먼저 앞의 오찬에 대한 묘사를 살펴봅시다. 이 오찬에서는 ‘다양하고 푸짐하게 나온 새고기’가 있고 ‘양배추는 장미꽃 봉오리처럼 잎이 겹쳐 있는 모양으로 촉촉하고 신선’합니다. ‘냅킨으로 주위를 둘러 장식한 설탕 과자’가 나오고요, ‘와인 잔은 노란색으로 물들었다가 붉은색으로 물들고, 또 비워졌다가 다시 채워지곤 했지요.’ 무엇 하나 모자랄 것 없는 오찬입니다. 음식도 분위기도 장식도 모두 훌륭하고 풍족하지요.
이번엔 후에 떠오른 오찬 모임을 살펴봅니다. 여성들의 교육을 위해 노력하는 여성들의 자리였고, 여성들이 주관하는 자리였습니다. 그곳에서는 ‘평범한 그레이비 수프’가 나오고, ‘접시에 패턴 무늬’같은 건 없었습니다. ‘노랗게 시든 양배추’와 디저트로 설탕 과자가 아닌 ‘자두와 커스터드 과자’ 그리고 ‘비스킷과 치즈’가 나왔지요.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이 아닌 ‘물병’을 돌리기도 했습니다. 두 오찬의 차이가 느껴지시는지요? ‘나’는 생각합니다.
그 모든 여성들이 해가 지나도 2천 파운드의 기금을 마련하는 일도 어렵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또 3만 파운드를 모으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여성의 빈곤이라는 비난할 수밖에 없는 사실에 비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우리 어머니들은 그 시절에 무엇을 했기에 우리에게 아무런 재산도 남기지 않았던 것이죠? 코끝에 분을 바르느라? 가게 창문 안을 들여다보느라? 몬테카를로에서 햇볕을 즐기며 과시하듯 걸어 다니느라?
여성은 빈곤했습니다. 여성의 재산권이 인정된 지 얼마 안 된 시절이었죠. 그전까지 기혼 여성의 경우 모두 남편의 재산으로 귀속되었습니다. 이러한 불균형은 재산뿐만 아니었습니다. 책의 경우 역시 극심한 불균형이 존재했지요. 서가에 꽂힌 남성이 여성에 대해 쓴 글은 아주 많았지만, 여성이 남성에 대해 쓴 글은 거의 없었습니다. 왜 그리고 남성은 여성에 대해 관심이 많았을까요? 상대 성에 대한 관심이 남자만의 전유물이었을까요? 그럴 리는 없었겠죠. 남성이 여성에 대해 그토록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바로 ‘자신감’때문이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다른 사람이 나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지요. ‘나’는 이렇게 비유합니다.
여성은 수백 년 동안 내내 남자의 형상을 실물보다 두 배로 확대해 비춰주는 마법 같은 달콤한 능력을 발휘하는 거울 역할을 해왔습니다.
여성을 비하하거나 여성을 낮출수록 남성의 지위가 높아진다고 느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요. 그래서 마치 남성이라는 성이 원래의 크기보다 더욱 크게 보이게 만들어졌다고 말입니다. 여성이라는 유리 잔을 통해. 여성이 다른 성에게 기댈 수밖에 없던 상황. ‘나’는 이런 상황이 불균형의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나’에게 돈은 단순히 화폐 이상의 가치를 지니지요. 그녀는 카페테리아에 앉아 식사를 하며 값을 치를 때 자신의 지갑을 보며 새삼 놀랍니다.
지갑에는 10실링짜리 지폐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이것은 내 눈길을 끌었습니다. 지갑에서 10실링짜리 지폐가 자동적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것은 여전히 숨이 멎을 만큼 믿기지 않는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모에게 상속받은 유산과 여성의 투표권에 대해 ‘나’는 자신의 손에 들어온 이 돈이 더 중요하다고 고백합니다. 왜일까요? 단순히 돈이 있으면 음식을 자기 맘대로 사 먹을 수 있다는 이유는 아니겠죠. 투표권도 중요하지만 돈이 있다면 무언가 여성으로서 삶이 변할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겠죠.
그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이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곧 사물을 그것 자체로 생각할 수 있는 자유였습니다. 예를 들어 저 건물은 내 마음에 드는가 안 드는가? 저 그림은 아름다운가 그렇지 않은가? 내 생각에 저것은 좋은 책인가 나쁜 책인가? 진실로 숙모가 남긴 유산은 내 머리 위 하늘을 가리고 있던 것을 벗겨 주었고, 한 남자의 키 큰 고압적인 형상 대신 밀턴이 끝없이 감탄해야 할 대상이라 했던 드넓은 하늘의 경관을 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돈은 여성을 자유롭게 해주었습니다. 일찍이 남성은 돈이 있었고, 그래서 자유로웠지요. 빈곤한 형편이었던 여성은 삶을 물질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어요. 당장에 주어진 적은 것으로 삶을 꾸려나가기 바빴던 여성이었습니다. 그리고 돈은 여성의 사고의 제한을 풀어주었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하늘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비로소 여유를 찾게 되어 삶을 온전히 누리게 해주었습니다. ‘해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나’의 사고는 여성의 삶에서 여성의 글쓰기로 넘어갑니다. 여성의 과거 상황을 고려하면 당연한 결과겠지만, 여성의 글쓰기는 언제나 무시당하기 일쑤였습니다.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여성의 글은 인정받기 어려웠지요. 그 결과 여성의 서가는 언제나 비어있습니다. 여성이 쓴 글은 찾아보기가 힘들었죠. 이 부분에서 셰익스피어의 누이 ‘주디스’라는 인물을 상상해봅니다. ‘나’는 이 상상에서 셰익스피어만큼이나 재능을 가졌다고 가정한 누이 ‘주디스’라도 결코 셰익스피어 시대에 셰익스피어 희곡을 쓰는 일은 절대 불가능함을 보여줍니다. 그녀가 자신의 재능을 펼치기 위해 극복해야 할 환경은 너무나 높은 벽으로 존재해왔습니다.
그 이유 중 중요한 한 가지로 꼽는다면, 강연의 처음에서 이미 말한 결론대로 여성에게 ‘자기만의 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만의 방을 갖는 것은 19세기 초까지도 부모가 몇 안 되는 부자이거나 매우 지체 높은 귀족이 아니라면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자기만의 방이 없다는 것은 차분하게 앉아 공을 들여 글을 쓸 시간도 공간도 없었다는 것과 같죠. 물론 제인 오스틴과 같이 자신만의 방이 없음에도 훌륭한 작품을 쓰고 그 안에 그런 영향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여류 작가도 존재했지요. 그렇지만 이는 극히 드문 경우였고,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울프는 그녀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뿐만 아니라 여성의 글쓰기가 적은 것에는 여성의 글쓰기에 대한 남성의 혐오감도 한몫했습니다. 이는 당시에 글을 쓰는 여성을 지칭하던 표현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글을 쓰는 여성을 비하하는 의미로 그런 여성들을 이렇게 말했죠.
“글을 끼적거리고 싶어 못 견디는 블루스타킹”
이러한 조롱에 여성으로서 제대로 된 글을 쓰기도 어려웠고, 그나마 글을 쓰더라도 서로 주고받던 편지라는 장르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편견을 넘어서는 그 시작에는 ‘애프라 벤’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최초의 소설 『오루노코』를 집필했다는 평을 받기도 하는 작가로서, 17세기에 이미 남편과 사별하고 여성으로서 글을 써서 돈을 벌었습니다. 여성이 글로 돈을 벌다니요. 시대를 감안하면 믿기 힘들 만큼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걸작은 홀로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작품은 수년간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일군의 집단이 생각해 낸 결과물입니다.
애프라 벤으로 시작해, 제인 오스틴, 샬럿 브론테, 에밀리 브론테, 그리고 수많은 알려지지 않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했던 여성들. 이들이 모두 여성의 글쓰기를 가능케 한 존재들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시작으로서 애프라 벤에 대한 ‘나’의 찬양이 이해가 가는 바입니다. 그녀가 없었다면 여성이 글을 직업으로 삼는 일이 얼마나 연기되었을지 모르니까요.
모든 여성은 다 함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는 애프라 벤의 묘비에(애프라 벤의 묘비를 그곳에 안치하는 일은 큰 논란을 일으키긴 했지만, 매우 적절한 처사였습니다.) 꽃을 바쳐야만 합니다.
이야기를 조금 건너뛰어 다른 생각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써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사실 여성 작가뿐만 아니라 남성 작가를 포함하는 공통된 질문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글을 써야 하는 것일까요? 이에 ‘나’가 언급하는 몇 가지 생각을 소개해보려 합니다. 먼저 ‘나’는 셰익스피어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요?
상처받은 것에 대해 항의하고 설교하며 비난하고자 하는 모든 욕망, 복수하고 하는 욕심, 세상을 어떤 고통이나 슬픔을 목격하는 증인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심이 그의 안에서는 모두 불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시는 자유롭게 유유히 흘러나옵니다. 만약 자신의 작품을 완전히 표출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셰익스피어입니다. 다시 책장을 바라보면서 생각했습니다. 만약 방해 없이, 빛을 발하며 타오르는 마음이 있다면, 그건 바로 셰익스피어의 마음이라고요.
‘나’는 말합니다. 주변에 영향들과 그로 인한 감정들에 휘둘리지 말고 작품 그 자체를 완전하게 나타내는 데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이죠. 그리고 그런 마음이 바로 셰익스피어의 마음이라고요. 여성들이 글을 쓰면서 겪어야 했던 차별과 물질적, 정신적 힘듦에 고삐를 내어주면 작품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잃고 방황하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에 초연하게 반응하고 글을 쓰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글을 쓴다면 글 속에 개성은 사라지고 글의 가치는 사라지겠죠. 그녀는 가상의 젊은 여류 작가 ‘메리 카마이클’의 작품을 읽고 생각하다 그녀의 작품의 놀라운 점을 깨닫습니다.
첫 번째 위대한 교훈을 완전히 익혔다고요. 그녀는 여성으로서, 그러나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잊고서 글을 썼습니다.
여성 작가와 남성 작가. 여성 작가의 문체와 남성 작가의 문체, 글의 분위기, 주제. 분명 두 성의 글은 차이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어느 쪽에도 치우쳐서는 안 된다고 ‘나’는 깨닫습니다. 여성으로서 글을 쓰더라도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인지해서는 안 되고, 남성의 경우도 마찬가지겠지요. 글에는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가 필요합니다. 어느 한 쪽으로 기울지 않고 조화를 이루어 글을 써야 하지요.. 이제 ‘나’가 눈앞에 보이는 평범한 장면에 매료되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애나멜 구두를 신은 한 소녀와 이내 갈색 외투를 입은 한 청년까지 데리고 가고 있었습니다. 또한 택시까지 싣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 흐름은 이 세 사람을 모두 내방 창문 아래까지 곧장 데리고 왔습니다. 택시는 바로 그곳에서 멈추었고 이내 소녀도 청년도 멈춰 섰습니다. 그들이 택시에 올라타자, 택시는 마치 이 흐름에 실려 또 다른 곳으로 휩쓸려 나가듯 미끄러져 갔습니다.
자연스러운 흐름에 남녀가 같은 택시를 타고 흐름 그대로 나아가는 장면. 그러니 ‘나’는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여기서 쓰고 싶은 제일 첫 번째 문장은, 글을 쓰는 이라면 누구든 자신의 성을 의식한다면 치명적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성을 의식하지 말고, 작품의 완전성을 나타내는 데 집중하고, 셰익스피어의 마음으로 쓰는 것. 이것이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대한 ‘나’의 대답이 아닐까요?
이야기가 끝나갑니다. 울프가 지어낸 거짓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되죠.
자, 여기서 메리 비턴은 말을 멈추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결론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여러분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여러분이 소설이나 시를 쓰려면 500년의 시간과 문에 자물쇠를 단 방이 필요하다는 그런 지루한 결론을 말이지요. 그녀는 이러한 결론을 이끌어낸 사고와 감정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녀는 여러분에게 부탁했습니다. 학교 관리원이 손짓하는 쪽으로 달려가고, 점심과 저녁을 서로 다른 곳에서 먹고, 영국 박물관에서 그림을 그리며, 서가에서 책을 빼내고, 창밖을 바라보는 자신의 여정을 따라와 달라고 말입니다.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위한 여정이 끝났습니다. 울프가 들려준 거짓 이야기에서 여러분은 진실을 찾아내셨나요?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면 과감히 쓰레기통에 버리라고 울프는 이야기했지만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안에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많은 진실들이 숨어 있으니까요.
『자기만의 방』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져있습니다. 챕터가 여러 개로 나누어져 있지만 그 이야기 어느 하나 흐름에 실려 있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눈앞의 생각에 급급하여 읽기보다는 넓은 틀에서 생각의 줄기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생각의 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완성된 아름다운 그림을 마주하게 되지요. 이것이 아주 독특하고 독보적인 울프 글의 특징이고, 흐름을 따라 읽는 것이 진정 울프의 글을 즐기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자기만의 방』은 페미니즘에 관한 에세이입니다. 애초에 강연 대상도 여성들이었죠. 하지만 이 책이 페미니즘에 대한 책이라 하여 페미니즘에 관심 있는 사람만이 읽어야 하는 책은 아닙니다. 페미니즘을 생각하는 여성들만을 위한 책은 더더욱 아니지요. 페미니즘에 대한 논란이 끊임없이 일고 있지만, 확실한 것은 페미니즘은 남성과 여성 모두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니까요. 그러니 누구든 거부감을 갖지 말고, 편견을 갖지 말고, 있는 그대로 울프의 생각의 여정을 따라 같이 걸어보기를 바랍니다. 분명 귀한 진실을 하나쯤은 발견하게 될 테니까요.
마지막 메리 비턴의 이야기를 마치고, 울프가 청중을 향해 던진 몇 마디를 뽑아 보여드리려 합니다. 이는 분명 여성들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여성들만을 위한 말은 아니겠지요. 누구든 살기 팍팍한 시기에 생각해봐야 할 말들입니다. 다시 한 번 그녀의 말에서 깨달음을 얻는 것을 어떨까요? 이상 『자기만의 방』이었습니다.
지적 자유는 물질적인 것에 달려 있습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여러분 스스로 여행하고 빈둥거리며 세계의 미래와 과거에 대해 사색하며, 책을 구상하며 길모퉁이를 어슬렁거리고, 사유의 낚싯줄을 강물 깊이 담글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돈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꿈꾸지 마십시오. 다만 사물을 있는 그대로 생각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