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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락서 Jun 16. 2017

누가 그대를 괴물로 만들었는가

프랑켄슈타인 - 메리 셸리

https://youtu.be/h_WhvooqbxY

아름다움이 만들어낸 괴물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흔히 공포 소설 혹은 공상과학소설로 구분되기도 합니다. 여러 시체 부위를 꿰어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설정은 비과학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혹은 최근의 과학기술 발달을 생각하면 또 과학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프랑켄슈타인』은 1818년 출간 이래로 많은 관심을 받아온 작품입니다. 연극과 영화로 혹은 다른 매체로 리메이크되곤 했죠. 물론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이 실은 우리가 생각하던 괴물의 이름이 아니라는 것은 이제 많은 분들이 아시지요. ‘프랑켄슈타인’은 괴물(The creature)을 만든 주인공 ‘빅토르 프랑켄슈타인(Victor Frankenstein)’을 말합니다. 작중 ‘괴물(the monster)’, ‘창조물(the creature)’, 혹은 ‘악마(the wretch)’라고 불리는 프랑켄슈타인이 만들어 낸 존재는 이름이 없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여러 가지 표현으로 불릴 뿐 이 존재는 이름을 따로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에게 이 존재가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당연히 피부가 초록색이라든가 머리에 나사가 박혀있다든가 하지도 않지요. 이는 미디어가 만들어 낸 잘못된 이미지일 뿐입니다. 이런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여러 오해 때문인지 일반적으로 『프랑켄슈타인』을 무섭게 생각하거나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프랑켄슈타인』을 읽어보면 엄연히 공포 소설이고, 괴기 소설임을 알게 되지요. 전혀 가볍지 않은 분위기, 끔찍한 사건들, 어두운 색채 등.


  작가 메리 셸리에 대해 잠깐 이야기하고 넘어가 볼까요. 메리 셸리는 일단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여성 작가입니다. 이런 괴기 소설을 19세기 초에 그것도 여성 작가가 썼다는 점은 당시대를 생각하면 매우 놀랍지요. 지난 포스팅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 생각나네요. 그 때문인지 첫 출판 당시에는 메리 셸리 자신의 이름을 걸고 내지 않았습니다. 이후 『프랑켄슈타인』이 유명해지고 몇 년이 흐르고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걸고 출판할 수 있었지요. 또한 더욱 놀라운 것은 메리 셸리가 무려 19살 때 『프랑켄슈타인』을 썼다는 점입니다. 메리 셸리는 1797년생입니다. 19살에 짧은 단편도 아니고 이런 장편을, 그리고 공포 소설에다가 주제도 범상치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메리 셸리의 천재성이 놀랍기만 합니다.


  작품의 시작도 흥미롭습니다. 낭만 시인의 거장 중 한 명인 퍼시 비시 셸리는 15살의 메리 셸리를 만나 첫눈에 반합니다. 하지만 그는 이미 결혼한 몸이었고 아내는 임신 중에 있었죠. 그러자 급기야 둘은 사랑의 도피를 떠납니다. 이후 아내가 병으로 죽자, 퍼시 비시 셸리는 메리와 결혼합니다. 그리고 그 해 1816년, 이 부부는 시인 바이런과 그의 주치의 존 폴리도리와 모임을 가졌고, 그 자리에서 무서운 이야기를 해보기로 합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프랑켄슈타인』이 처음 시작하게 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자리에 있던 존 폴리도리는 그의 작품에서 흡혈귀를 등장시켰고, 이는 이후 드라큘라에 영향을 준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작품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프랑켄슈타인』에서 나오는 주된 논의는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관계, 즉 프랑켄슈타인과 괴물(the creature, 이하 ‘크리처’)의 관계지요. 특히 창조주의 피조물에 대한 의무를 이야기합니다. 가까스로 만난 프랑켄슈타인에게 크리처는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나는 네 피조물이고, 우리는 둘 중 하나가 죽음을 맞지 않는 한 끊을 수 없는 유대로 얽혀 있다. 당신은 나를 죽이려 하겠지. 감히 당신이 이렇게 생명을 갖고 놀았단 말인가? 나에 대한 당신의 의무를 다하라. 그러면 나도 당신과 나머지 인간들에 대한 의무를 다하겠다.


  그리고 모든 비극을 겪고 마지막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서야 프랑켄슈타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열정적인 광기로 이성인 잃은 상태에서 나는 이성적인 존재를 창조했으니, 내 능력이 닿는 한 행복과 복지를 보장했어야 합니다. 그게 제 의무였어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창조주는 피조물에 대해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하고 의무를 행해야 할까요? 이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오늘 여기서는 다른 시각에서 『프랑켄슈타인』을 보려 합니다. 크리처의 입장에서 말이지요.



  크리처가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은 사실입니다. 그는 드 라세 가족의 집을 불태우고, 프랑켄슈타인의 동생 어린 윌리엄의 목을 졸라 살해하고, 이 혐의를 교묘하게 선한 유스틴에게 덮어씌우지요. 이뿐만이 아니라 프랑켄슈타인의 오랜 친구 클레르발을 살해하고, 프랑켄슈타인과 엘리자베트의 결혼식 날, 자리를 비운 사이 엘리자베트까지 목 졸라 살해합니다. 그리고 결국 이 충격으로 아버지까지 돌아가십니다. 프랑켄슈타인은 이 모든 비극에 대한 분노로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크리처를 쫓지만, 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크리처를 잡을 수는 없었죠. 어떤가요? 크리처가 벌인 일들을 보고 크리처를 끔찍한 악마라고 부르는 이유에 공감하실 수 있나요?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이 크리처에게 있는 것일까요? 단순히 사건들의 결과만 보면 크리처는 극악무도한 악마가 맞습니다. 하지만 작품을 읽어보면 조금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크리처가 시작부터 악한 존재는 아니었다는 것을요.


내 말을 믿어라, 프랑켄슈타인. 나는 선했고, 내 영혼은 사랑과 박애로 빛났다. 하지만 나는 외롭지 않은가? 참담하게 고독하지 않은가? 내 조물주인 당신이 나를 증오하는데 하물며 내게 아무것도 빚진 바 없는 당신의 동포들은 어떻겠는가? 나를 상대도 하지 않고 증오할 뿐이다.


  실제로 크리처는 나쁜 일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착한 일을 하기도 했었지요. 가난한 드 라세 가족을 보고 그들을 위해 일부러 많은 양의 장작을 몰래 가져다 놓기도 하고, 물에 빠진 여성을 구해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선행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반응은 증오뿐이었습니다. 왜 일까요? 어째서 크리처에 대해 이토록 모진 반응만이 돌아온 것일까요. 크리처와 프랑켄슈타인의 모든 비극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프랑켄슈타인』을 읽다 보면 유난히 ‘아름다움’에 대한 묘사가 많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의 소꿉친구이자 아내가 되는 엘리자베트에 대한 묘사를 보겠습니다.


그녀는 심성이 유순하면서도 선했지만, 여름날의 곤충처럼 쾌활하고 장난기가 많았다. 발랄하고 생동감 넘치는 성격이었지만 감성은 강인하고도 깊었으며 성정은 남달리 다정했다. 그녀는 누구보다 자유를 만끽하면서도, 속박과 변덕 앞에서 누구보다 우아하게 순종했다. 상상력은 풍요로웠으며, 응용력 또한 훌륭했다. 그녀의 외모는 정신을 그대로 드러냈다. 밤색 눈은 새처럼 초롱초롱하면서, 매혹적이고 부드러웠다. 몸매는 날렵하고 호리호리했다. 지독한 피로를 견뎌낼 힘을 지녔으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처럼 보였다.


  엘리자베트는 마치 천사 같습니다. 아름다움은 말할 것도 없고, 착하고 쾌활하죠. 막내 윌리엄 역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꼬마’라고 묘사합니다. 크리처가 호감을 보였던 드 라세 가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는 오두막 사람들의 완벽한 외모에 찬탄했다. 그 우아함, 아름다움, 그리고 섬세한 얼굴.


  이렇게 『프랑켄슈타인』에는 유달리 아름다움에 대한 찬탄이 많습니다. 그것도 인간의 아름다운 외모에 대해서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이들은 모두 선한 존재로 묘사됩니다. 하지만 크리처는 어떤가요? 프랑켄슈타인이 크리처를 만들 때, 그는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신경 씁니다. 하지만 결과는 끔찍했지요.


사지는 비율을 맞추어 제작되었고, 생김생김 역시 아름다운 것으로 선택했다. 아름다움이라니! 하느님, 맙소사!


  그리고 프랑켄슈타인이 거듭 말하듯이, 그는 크리처를 볼 때마다 극심한 공포와 혐오만을 느낍니다. 이러한 반응은 태생부터 마지막까지 크리처가 겪게 될 반응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크리처에 대한 혐오는 비단 프랑켄슈타인만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크리처는 이후 모든 마주치는 인간들의 얼굴에서 자신에 대한 혐오를 보게 되지요. 자신이 그동안 사랑하고 아껴왔던 드 라세의 가족으로부터, 길을 가다 마주친 인간들로부터, 심지어 인간의 생명을 구하고서도 자신에 대한 혐오를 그들의 눈에서 보게 됩니다.


그리고 나를 보더니 큰 소리로 비명을 질러대며 오두막 밖으로 뛰쳐나가 그 노쇠한 몸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벌판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간에 발을 들여놓기가 무섭게 아이들이 비명을 질렀고 한 여자가 기절했다. 마을 전체가 난리 법석이었다. 도망치는 사람들도 있고 나를 공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를 본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공포와 경악을 그 누가 표현할 수 있을까? 아가타는 기절했고, 사피는 친구를 돌보지도 못하고 오두막 밖으로 뛰쳐나가버렸다. 펠릭스가 달려 들어와 초인적인 힘으로 노인의 무릎에 매달려 있던 나를 떼어냈다. 분노에 넋을 잃은 그는 나를 덮쳐 땅에 쓰러뜨리고, 지팡이로 나를 심하게 내리쳤다. 나는 사자가 영양을 갈기갈기 찢듯이 그의 사지를 찢어발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내 심장이 쓰디쓴 슬픔에 젖어 있었기에 참았다. 다시 날 때리려는 그의 모습을 본 나는 고통과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오두막집을 뛰쳐나와 온통 격정에 휩싸여 남의 눈을 피해 축사로 돌아갔다.


  크리처는 인간들의 반응에 언제나 좌절을 겪습니다. 사실 윌리엄을 죽인 일도 의도를 가지고 했던 일은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거절당하는 자신을 보고, 혹여나 아직 편견이 없는 어린아이라면 자신을 받아들여 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윌리엄에게 다가간 것이지요. 하지만 역시나 돌아온 반응은 혐오였습니다.


아이는 내 형상을 보자마자 손으로 눈을 가리고 새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나는 억지로 얼굴을 가린 손을 잡아채고 말했다. ‘애야, 왜 그러니? 너를 해칠 생각은 없단다. 내 말 좀 들어보렴.’
  아이는 격렬하게 반항했다. ‘날 놔줘.’ 아이가 외쳤다. ‘이 괴물! 흉측한 쓰레기! 나를 잡아먹고 갈가리 찢으려는 거지! 네놈은 인육을 먹는 도깨비야. 놔주지 않으면 아버지한테 이를 테다!’


  이에 결정적으로 크리처는 자신이 인간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닫게 되죠. 『프랑켄슈타인』에서 크리처는 언제나 ‘못생긴’ 존재입니다. 그래서 절망하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절망은 인간에 대한 분노로 바뀌고, 결국에는 자신의 창조주인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분노로 귀결되죠. 그러니 『프랑켄슈타인』에서의 비극의 원인은 단순히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문제라고 할 수 없습니다. 비극은 크리처가 창조되었다는 사실보다는, 크리처가 ‘흉측하게’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크리처는 인간들이 자신을 보는 시선에 분노했고, 그 부정적 시선은 크리처의 외모에서 시작한 것이니까요. 한번 생각해봅시다. 만약 크리처의 외모가 흉측하지 않고 최소한 평범했더라면, 크리처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그랬다면 크리처는 인간 사회로부터 거부당하지 않고, 그 속에 들어가, 복수나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분노도 없이 평범하게 살아갔을 것입니다. 결국 크리처의 외모가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크리처의 외모가 비극의 계기가 되었다고 해도, 이는 인간들의 부정적 시각이 없었다면 비극으로 이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 인간들은 크리처에게 차갑고 잔인한 시선을 보내죠. 인간들은 크리처의 외침은 들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도망치기에 급급하죠. 이러한 태도는 “외모로 평가하지 말라”라는 도덕 명제를 무색하게 만듭니다. 인간의 차별적 태도에 크리처가 더욱 힘들 수밖에 없는 것은 크리처가 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프랑켄슈타인조차 크리처의 이성적인 발언에 놀라지요.


마음의 흔들렸다. 내가 동의한 후에 다가올 결과를 생각하면 전율이 흘렀다. 그러나 괴물의 논조에는 정당성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이야기, 그리고 지금 표현하고 있는 감정은 그가 섬세한 감수성의 소유자라는 증거였다.


  이성적인 크리처에게는 자신에게 행하는 인간들의 비이성적인 태도가 큰 상처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의 이런 행동의 근간은 무엇일까요?


  인간들의 크리처를 향한 잔인한 태도는 ‘미(美)’ 혹은 ‘아름다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것은 이로운 것이고, 아름다운 것은 선한 것이라는 인식이 그들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죠. 그러니 크리처의 아름답지 못한 그래서 추한 외모는 이들에게는 악이고 혐오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이제 크리처를 ‘악마’, ‘괴물’ 등으로 부르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인간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미의 개념이 선악의 판단 기준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그러니 크리처는 자신들로부터 배제해야 하는 존재로 판단합니다. 그러니 마지막까지 크리처는 외롭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존재입니다.


  결과적으로, 『프랑켄슈타인』에서의 비극의 원인은 ‘아름다움’의 존재입니다.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미’라는 개념이 크리처를 고립시키고 절망에 빠뜨린 것이죠. 이렇게 본다면, ‘아름다움’ 혹은 ‘미’라는 것은 매우 폭력적입니다. ‘아름다움’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추함’의 존재를 상정하게 되니까요. 그리고 동시에 둘을 분리시키고 어떤 것이 더 우월하고 열등한지 평가하게 합니다. 이런 수직적인 관계 속에서, 언제나 고통받는 쪽은 ‘추한’쪽이겠죠. 분명 프랑켄슈타인은 크리처를 만들 때 악한 존재를 만들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크리처는 그저 누구보다도 사회에 속하기를 원했고, 그러지 못해서 극도로 외로운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간절하고도 소박한 꿈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 처참하게 무너졌죠. 크리처를 만든 것은 프랑켄슈타인이지만, 크리처를 괴물로 만든 것은 ‘아름다움’이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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