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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락서 Jul 02. 2017

행복 속에서 불행을 찾다

멋진 신세계 - 올더스 헉슬리

행복 속에서 불행을 찾다


  ‘어떤 삶을 살고 싶으세요?’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무어라 대답하실까요. 돈을 많이 버는 삶? 건강한 삶? 대답은 여러 가지로 나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분명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돈, 건강, 명예든 뭐든 어찌 보면 전부 행복하기 위해서 아닌가요?


  행복’이라, 행복. 참 듣기만 해도 기분 좋은 단어입니다. 행복하기만 하다면 바랄게 더 있을까요? 그러나 막상 행복할 때에는 행복한지 자각하기 쉽지 않고, 불행할 때에는 지나간 행복이 얼마나 소중했음을 깨닫기 마련입니다. 손에 잡힐 듯 말 듯 쥐었다 생각하면 어느새 모래처럼 스르르 빠져나가지요. 행복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그런데 이렇게 바라마지않는 ‘행복’이 보장된 사회라면 어떨까요? 그런 세계에서 살 수 있다면 여러분은 고민하지 않고 가시겠어요? 모두의 행복이 보장되어 모두가 행복한 ‘멋진 신세계’. 오늘 이야기할 책은 ‘올더스 헉슬리 Aldous Huxley'의 『멋진 신세계 Brave New World』입니다.


  먼저 헉슬리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과학사에 조금 관심이 있으신 분이라면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일지 모릅니다. 올더스 헉슬리는 진화론의 수호자 ‘다윈의 불독 Darwin's Bulldog'라 불렸던 ’토마스 헨리 헉슬리 Thomas Henry Huxley‘의 손자입니다. 아버지는 ’레너드 헉슬리 Leonard Huxley' 작가였고, 형은 '줄리언 헉슬리 Julian Huxley' 유네스코 초대 사무총장이며, 이복동생 ‘앤드류 헉슬리 Andrew Huxley'는 노벨상 수상자입니다. 어마어마한 가문이죠. 올더스 헉슬리의 천재성은 그의 가문을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입니다.


  헉슬리는 원래 의사를 꿈꿨습니다. 하지만 학생 시절 갑작스러운 병으로 몇 년간 실명하게 됩니다. 이후 시력을 차츰 되찾기는 하였지만 이 시기를 기점으로 작가로 전향하게 되었죠. 애당초 헉슬리의 관심분야와 그의 가족 내력을 생각하면 『멋진 신세계』에 나타나는 과학적 상상력은 당연하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또한 그는 일전에 소개한 적 있던 SF 작가 ‘허버트 조지 웰스’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하죠.



  『멋진 신세계』의 영제는 'Brave New World‘입니다. 이는 그 유명한 ’윌리엄 셰익스피어 William Shakespeare'의 극작품 『템페스트 The Tempest』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작중 ‘야만인 The Savage'로 불리는 ’존‘이 멋진 신세계를 보며 외치는 말이죠. 도대체 어떤 세계이기에 존은 그토록 멋진 신세계라는 말을 읊조렸던 것일까요?


  이 멋진 신세계의 주된 특징은 엄마, 아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상하죠? 엄마, 아빠가 존재하지 않는다니? 그렇다면 도대체 인구는 어떻게 유지할까요? 멋진 신세계에서 인간은 인공적으로 제조됩니다. 공장 컨베이어 벨트 위에 줄지어 놓인 유리병에서 인간이 만들어지죠. 그러니 이 멋진 신세계에서 엄마, 아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컨베이어 벨트 위 유리병에서 태어나니까요. 혹여나 임신이 될까 여성에게는 불임 수술이 권장되죠.


“6개월 치의 봉급에 해당하는 상여금이 지급된다는 사실은 논할 필요도 없겠거니와, 수술은 사회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한 다음, 도려낸 난소를 산 채로 보존하여 활발하게 발육하도록 만드는 몇 가지 기술을 계속해서 설명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런 수술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사회 구성원들은 조금의 의심도 없이 당연하게 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이죠. 게다가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모체 태생과 관련된 것이라면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낍니다.


  “간단히 얘기하자면 이렇다.” 국장이 요약해서 말했다. “부모란 아버지와 어머니다.” 사실은 학구적인 어휘였지만, 출생에 관한 얘기를 더러운 음담패설이라고 여겨 갑자기 크게 당황한 소년들은 입을 다물고 눈길을 돌렸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컨베이어 벨트 위를 지나는 태아에게는 적절한 조작이 가해집니다. 계급이 먼저 정해지고, 그에 따라 모든 투입 요소들이 결정되죠. 목적에 맞게 맞춤형으로 인간은 태어납니다.


  “계급이 낮으면 낮을수록 그에 따라서 산소를 더 적게 공급합니다.” 포스터가 말했다. 가장 먼저 영향을 받는 기관은 두뇌였다. 다음으로는 뼈대, 정상적인 수준의 산소 가운데 75퍼센트만 공급을 받으면 난쟁이들이 태어난다.


  이런 것들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할까요? 낮은 계급의 사람은 어떻게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애초에 그럴만한 지능이 주어지지 않는 것도 이유겠지만 철저히 수면 유도와 훈련을 통해 세뇌시키기 때문입니다. 각 계급은 모두 자신이 속한 계급에서 진정 행복하다고 느끼도록 세뇌당하죠. 어떤 기만도 아닌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도록 유도합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사랑한다는 것―.” 국장이 단호하게 힘주어 말했다. “그것이야말로 행복과 미덕의 비결이다. 불가피한 사회적인 숙명을 사람들이 좋아하도록 만드는 훈련, 모든 습성 훈련이 목표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모두는 모두의 것이다’라는 가치 아래 남녀는 제한 없이 성관계를 갖도록 권장되고, 소마 Soma'라는 마약이 합법적으로 모두에게 적절히 제공되는 사회. 이상이 멋진 신세계의 모습입니다. 어떤가요? 정말 멋진 신세계인가요?


  받아들이기 힘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사회가 어떻게 ‘멋진 신세계’냐고 어이없어 하실 수도 있겠죠.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그들의 세계가 너무 이상하고 때로는 끔찍하기도 하니까요. 문제는 이 멋진 신세계 속 사회 구성원들은 모두가 행복하다는 점이죠. 그렇습니다. 모두가 ‘행복’해요. 누구도 불행한 사람이 없습니다.


“어쨌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가 누구였든지 간에 살아있을 때는 행복했으리라는 점이죠. 지금은 누구나 행복하니까요.”
  “그래요, 지금은 누구나 다 행복하죠.” 레니나가 맞장구를 쳤다. 매일 밤 150번씩 반복되는 이 말을 그들은 12년 동안 들어왔다.


  이들은 자신들의 세계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럴 기회가 애초에 주어지지 않으니까요. 세계가 고르고 골라서 준 것만을 느끼고 인지하죠. 그러니 행복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오직 멋진 신세계 외부에서 살았던 야만인 ‘존’만이 이 세계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죠.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그가 처음에는 감탄의 의미로 내뱉었던 ‘멋진 신세계여.’라는 말이 점차 의미를 달리하는 게 보입니다.


  모두가 행복한 멋진 신세계. 이에 분노하는 야만인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그를 미친 사람 취급할 뿐입니다. 마지막 통제관과의 대화에서 존의 외침은 아이러니를 느끼게 합니다.


  “하지만 난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
  “사실상 당신은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는 셈이군요.” 무스타파 몬드가 말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야만인이 도전적으로 말했다. “나는 불행해질 권리를 주장하겠어요.”
  “늙고 추악해지고 성 불능이 되는 권리와 매독과 암에 시달리는 권리와 먹을 것이 너무 없어서 고생하는 권리와 이虱투성이가 되는 권리와 내일은 어떻게 될지 끊임없이 걱정하면서 살아갈 권리와 장티푸스를 앓을 권리와 온갖 종류의 형언할 수 없는 고통으로 괴로워할 권리는 물론이겠고요.”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런 것들을 모두 요구합니다.” 마침내 야만인이 말했다.


  ‘행복하면 된 거 아닌가?’라고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데 정말 행복하기만 하면 되는 걸까요? 멋진 신세계는 분명 모두가 행복한 세계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된 걸까요? 진짜 멋진 신세계처럼 행복해도 일단 행복하면 그만인가요?


  행복은 한 가지가 아닙니다. 다양한 종류가 있고, 서로 층위를 달리하죠. 행복에도 질적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니 어떤 행복은 다른 행복보다 더 나을 수도 있죠. 물론 선택할 수 있다면 어느 것을 선택하는지는 개인의 자유겠지만요.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실래요? 멋진 신세계에서의 행복을 누리시겠습니까? 아니면 지금 우리 세상에서 행복을 찾으시겠습니까? 솔직히 쉽게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그만큼 우리 세상이 살기가 팍팍하기 때문이지요. 이런저런 고민과 어려움에 치이기보다 그냥 아무것도 모르더라도 멋진 신세계에서 행복하면 좋지 않을까? 도대체 얼마나 행복이 귀해졌으면 행복의 질을 고려하지 않게 된 걸까요. 『멋진 신세계』를 읽고 계속해서 저를 괴롭히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행복은 언제나 불행보다 나은 것이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존의 외침을 듣고 나니 조금 생각이 달라지네요. 정말 행복은 무조건 불행보다 나은 것일까요? 어떤 행복은 어떤 불행보다 좋지 않을 수도 있는 거 아닐까요? 그래서 존은 행복하기를 거부하고 불행하질 권리를 주장했겠죠.


  간혹 이런 생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합니다. 답 내리긴 힘들고, 주변에 묻기에도 조금 난데없는 감이 있죠. 어째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고민만 늘어나는 느낌이네요. 그래도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읽고 행복과 불행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역시나 명확한 답을 내리진 못했지만요.


  한번 여러분도 읽어보시고 같이 고민해보는 건 어떠신가요? 함께라면 어쩌면 답을 찾을지도 모르니까요. 『기억 전달자 The Giver』에 이어 디스토피아 문학의 대표 격인 『멋진 신세계』를 살펴보았습니다. 다음번에는 『멋진 신세계』와 항상 같이 언급되는 ‘조지 오웰 George Orwell'의 『1984』를 다시 읽어봐야겠네요. 이상 행복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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