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락서 Jul 05. 2017

"BIG BROTHER IS WATCHING YOU"

1984 - 조지 오웰

에릭 아서 블레어, 조지 오웰, 1984


  오늘은 저번 글에서 이야기한 대로 디스토피아 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조지 오웰 George Orwell'의 『1984』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언제나처럼 작가 조지 오웰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해볼까요? 이미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사실 조지 오웰은 본명이 아니라 필명입니다. 오웰의 본명은 '에릭 아서 블레어 Eric Arthur Blair'입니다. 작가들의 필명은 그리 낯선 것은 아니지만 당연하게 본명인 줄 알았던 이름이 필명이었다는 사실은 조금 놀랍죠.


  오웰이라는 필명을 쓰게 된 것은 그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의 집안은 일명 ‘젠트리 Gentry' 계급에 속했죠. 젠트리는 귀족은 아니지만 그에 가깝게 토지를 소유한 계급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젠틀맨 Gentleman'도 여기서 유래했지요. 하지만 그의 집안은 그렇게 부유하지 않았습니다. 신분은 상속되었지만 부(富)는 그렇지 못했죠. 그래서 에릭은 자신의 집안을 '상류 중산층의 하층 lower-upper-middle class'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오웰은 가난했지만 엘리트 교육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흔히 들어본 ‘이튼 스쿨 Eton School’에 다녔었죠. 재학 당시에 『멋진 신세계』의 저자 ‘올더스 헉슬리 Aldous Huxley’도 이튼에 있었다고 하네요. 디스토피아의 대표 작가로 꼽히는 두 저자의 인연이 신기하기도 합니다.  오웰은 생계를 위해 버마 지역에서 경찰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후 영국으로 돌아와서 오웰은 유달리 밑바닥 층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일부러 부랑자 생활을 하기도 하죠. 그리고 그의 이중적인 생활을 들키지 않기 위해 필명을 사용하게 된 것이지요. 이렇게 오웰의 삶을 대략적으로 살펴보니 『1984』에 나타난 비참한 사회가 이해되기도 합니다.



빅 브라더, 텔레스크린, 사상경찰


  자, 이제 『1984』의 세계에 대해 살펴볼까요. 『1984』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 Winston Smith’가 사는 국가는 ‘영사 Ingsoc'라 불립니다. 이는 '영국 사회주의 English Socialism'의 준말이지요. 영사의 특징은 ‘빅 브라더 Big Brother'라는 존재가 통치하는 사회로 '텔레스크린 Telescreen‘이라는 장치를 통해 당원들을 감시합니다. 당원들의 모든 행동, 말 한마디가 모조리 감시되죠. 그 어디에서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 '사상경찰 Thought Police'이 언제 어디서 잡아갈지 모르기 때문이죠. 겉보기로는 누가 사상경찰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모든 당원은 서로를 절대 신뢰할 수 없습니다.


텔레스크린은 수신과 송신을 동시에 했다. 윈스턴이 입 밖에 내는 말은 아무리 작은 소리라도 그 기계에 잡혔다. 더구나 이 금속판의 시계(視界) 안에 놓인 한 그가 하는 짓은 모두 보이고 들리게 되어 있었다. 물론 언제 감시를 받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사상경찰이 얼마나 자주, 어떤 조직으로 개인에게 감시의 촉수를 뻗치느냐 하는 문제는 추측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이러한 사회는 철학자 ‘제러미 벤담 Jeremy Bentham’이 만든 원형 감옥 '판옵티콘 panopticon'을 떠올리게 합니다. 누구도 자신이 감시받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없고 동시에 감시자는 누구나 감시할 수 있죠. 체포된 당원은 세계에서 사라집니다. ‘증발된다 vaporised'라는 표현으로 나타나는 이 말의 의미는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과거의 기록부터 모두 사라진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인 unperson'이 되는 것이지요. 사라진 사람은 존재한 적도 없는 것으로 되어버립니다.



신어, 이중사고


승리 맨션은 1930년경에 건축된 낡아빠진 아파트로 지금은 허물어져가고 있었다. 천장과 벽에서는 횟가루가 끊임없이 떨어지고, 수도관은 추워지기만 하면 터지고, 지붕은 눈이 올 적마다 새고, 난방 장치 역시 절약한다는 이유로 꽉 닫아버리거나 사용하는 경우라 해도 스팀이 반밖에 돌지 않았다. 제 손으로 직접 고치는 것 외에 모든 수선은 멀리 떨어져 있는 당위원회의 인가를 받아야 했으며, 창틀 하나 고치는 데도 2년은 걸려야 가능했다.


  정말 끔찍한 사회입니다. 우리 중 누구라도 저런 사회에서 살고 싶지는 않겠죠. 그런데 단순히 이러한 물리적 장치만으로는 사회가 유지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당은 어떻게 계속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것일까요?


  당은 감시만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모든 당원들이 반역 따위는 꿈꾸지 않고 당에 진정 충성하기를 바라죠. 그래서 당은 언어를 지배합니다. ‘신어 Newspeak’라고 불리는 언어를 만듭니다. 기존 영어와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신어의 주요 특징은 점차 단어 수를 줄여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좋은 good’, ‘나쁜 bad’이라는 낱말이 있습니다. 신어에서는 ‘나쁜’을 없애고 '안 좋은 ungood‘으로 바꾸어 버리지요. '썩 좋은 excellent'와 '훌륭한 splendid‘도 필요 없습니다. '더 좋은 plusgood’으로 충분하지요. 더욱 강조하고 싶으면 ‘배로 더 좋은 doubleplusgood'이라고 표현하면 됩니다.


  “신어의 완전한 목적이 사고의 폭을 좁히려는 데 있다는 걸 자넨 모르겠나? 결국에 가서는 사상죄도 문자 그대로 불가능하게 해놓자는 걸세. 왜냐하면 그걸 나타낼 낱말이 없으니까 말이야. 필요한 모든 개념은 정확하게 단 한 마디로 표현될 거고, 그 의미는 정밀하게 뜻을 나타내고 다른 보조적 의미는 지워져 잊게 될 테니까 말이야.


  게다가 이뿐만 아닙니다. 당원들은 언제나 ‘이중사고 doublethink'를 해야 합니다. 이중사고는 『1984』의 세계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개념이죠. 설명을 볼까요.


당원에게 적용할 때는 당이 요구하는 대로 흑을 백이라고 말할 수 있는 충성심을 뜻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흑을 백이라고 ‘믿는’ 능력을 말하며, 나아가서는 흑을 백으로 ‘알고’ 전에 반대로 믿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능력을 뜻하는 것이다. 이것은 끊임없는 과거의 변조를 요구하며 사실상 나머지 모든 것을 포함하는, 신어로 ‘이중사고’라고 알려진 사고체계에 의해 가능하게 된다.


  이중사고는 의식적이면서 동시의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작중에 당이 초콜릿 배급을 20g 줄인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오히려 초콜릿 배급을 20g 늘렸다고 이야기하죠. 실제로는 분명 줄어든 것인데 당원들은 후자의 발표를 듣고 이중사고를 통해 초콜릿 배급이 줄었다는 사실을 잊고, 초콜릿 배급이 늘었다는 이야기를 믿고, 이러한 사고과정을 거쳤다는 의식조차 잊어버립니다. 이것이 이중사고입니다. 그리고 그에 맞춰 모든 과거의 기록은 수정되지요. 결국 당이 말한 것은 언제나 진실이 되고 과거는 언제나 변하면서도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라고 당의 슬로건은 말한다.



The last man in Europe


  ‘유럽 마지막 인간’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까요? 원래 『1984』의 제목은 『The Last Man in Europe』이었습니다. 하지만 1948년 원고를 완성하고 뒤의 숫자를 바꾸어 『1984』로 제목을 정해 출판하기로 한 것이지요. 그렇지만 초기 제목의 흔적은 여기저기 남아있습니다. ‘마지막 인간’이라는 표현이 여러 번 등장하죠.


  “자네는 썩어들어가고 있어.” 그가 말했다. “몸뚱이가 조각조각 부서질 거야. 자네는 뭔가? 더러운 때 주머니야. 이제 몸을 돌려 거울을 다시 봐. 자네와 대면한 형체가 보이나? 저게 마지막 인간이야. 자네가 인간이라면 저게 바로 인간성이라는 거야. 자아, 다시 옷을 입으시지.”


  윈스턴은 당이 무너지길 바랍니다. 사상죄를 범한 것이지요. 그는 당이 내부에서 전복되기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이미 너무 많은 감시를 받기 때문이죠.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감시되는 상황에서 내부로부터의 전복은 불가능합니다. 윈스턴이 바라는 ‘인간성’을 당원에게 기대하기는 힘듭니다. 당원 간의 유대관계는 불가능하니까요.


옛 문명은 사랑과 정의 위에 세워졌다고 주장했지. 그러나 우리의 것은 증오 위에 세워진 거야. 우리 세상에 공포와 분노와 승리감과 굴욕감 외에는 감정이라고 할 게 없어. 그 밖의 것은 다 때려 부수는 거야. 모조리 말이야. 우리는 이미 혁명 전부터 존재해온 사고의 습성을 때려 부수고 있네. 우리는 이미 부모자식 사이, 사람들 사이, 그리고 남녀 사이를 끊어버렸어. 이젠 어느 누구도 여편네나 자식이나 친구를 믿지 않는 거야.



빵 한 조각, 포옹, 사랑


  당 내부로부터의 전복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윈스턴은 ‘무산자 proletariat'에게 희망을 갖습니다. 그들은 감시당하지 않습니다. 무산자들이 사는 곳에는 텔레스크린도 없습니다. 그들은 꺼릴 것이 없습니다. 영사 인구의 85%에 해당하는 무산자만이 당을 전복시킬 수 있다고 윈스턴은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들이 그럴 의식을 가지지 못하는데 있지요.


  그들은 의식을 찾을 때까지는 절대로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반란을 일으키기까지는 의식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무언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윈스턴은 그것이 ‘인간성’이라고 이야기하지요.


  노동자들은 인간성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내부는 굳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윈스턴이 의식적으로 분투하며 다시 배우려고 하는 원시적 감정을 가지고 살고 있었다.


  무산자들이 인간성을 가지고 있는 한 희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굶어 죽어가는 사람에게 아껴둔 빵 한 조각을 던져주는 것. 죽어가는 사람을 포옹하고 눈물을 쏟고 을 하는 것. 서로 사랑하는 것. 윈스턴이 희망을 거는 인간성이란 그런 것들입니다. 당원들은 그 어느 것도 하지 못하지만, 무산자들은 할 수 있죠.


노동자는 죽지 않는다. 마당에 있는 저 당당한 여자를 보면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에 가서는 그들도 각성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천년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새처럼 당이 가질 수도 죽일 수도 없는 생명력을 몸과 몸으로 전해가며 모든 불리한 조건을 견디며 살아남을 것이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숲에서 우릴 보고 지저귀던 지빠귀 기억나?” 그가 말했다.
  “우릴 보고 지저귄 게 아니에요.” 줄리아가 대꾸했다. “제멋에 겨워 운 거예요. 그것도 아니지, 그냥 울었던 거예요.”
  새들도 노동자들도 노래하지만 당은 노래하지 않는다. 세계 어느 곳에서나, 런던과 뉴욕에서, 아프리카와 브라질에서, 국경을 넘어서는 신비하고 발길이 금지된 나라에서, 파리와 베를린의 거리에서, 끝없이 펼쳐진 러시아 벌판의 마을에서, 그리고 중국과 일본의 장바닥에서―어느 곳을 막론하고 정복당하지 않는 굳건한 모습을 한 그 여인과 똑같은 사람들이, 일하고 아이를 낳느라 괴물같이 되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지독하게 일하면서도 여전히 노래를 부를 것이다. 저 힘찬 허리에서 언젠가는 의식 있는 종족이 태어날 것이다.



디스토피아, 『1984』와 『멋진 신세계』


  로이스 로리의 『기억 전달자』로 시작해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그리고 조지 오웰의 『1984』까지 왔습니다. ‘디스토피아 문학 dystopia literature’을 한 줄기로 훑어보고자 해서 시작한 여정이었습니다. 물론 여기서 다룬 작품 말고도 다른 디스토피아 작품도 많습니다. 다만 시작은 쉬운 것, 그리고 가장 유명한 것을 다루고 싶었습니다. 세 작품 모두 선택에 후회 없는 책이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합니다. 특히 미래에 대한 예측은 정말 제각각이지요. ‘유토피아 utopia'가 될 것인가 ’디스토피아 dystopia'가 될 것인가? 시대가 흘러도 끝없이 반복될 질문입니다. 『1984』와 『멋진 신세계』가 흥미로운 점은 둘 다 디스토피아를 상정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양식의 디스토피아를 그려냈다는 점이지요. 공포와 증오로 만들어진 사회와 쾌락과 행복으로 만들어진 사회. 그리고 각 사회를 지탱하는 구조들은 그 구체성에서 놀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처음 『1984』를 읽을 당시 ‘전쟁은 평화/자유는 굴종/무식은 힘’이라는 슬로건에 담긴 진의를 알았을 때의 충격은 정말 어마어마했습니다. 터무니없어 보이는 말의 무서운 진실에 놀랐죠. 『1984』가 불멸의 고전인 이유를 새삼 느꼈죠.


  물론 2017년인 지금 1984년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그렇지만 『1984』의 배경이 단순히 물리적 배경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 모두 알지요. 1984년이 지나갔다고 해서 『1984』의 가능성이 사라졌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당이 현재를 지배하고, 과거를 지배하고, 이윽고 미래를 지배하듯, 삐뚤어진 권력은 언제든 우리를 『1984』로 끌어내릴 수 있습니다. 끌려 내려가지 않기 위해서, 마지막 인간의 사멸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지키고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윈스턴의 시각을 빌리자면 그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빵 한 조각을 나누고, 죽어가는 이를 포옹하고,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할 것.’


"BIG BROTHER IS WATCHING YOU", 조지 오웰의 『1984』였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행복 속에서 불행을 찾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