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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락서 Jun 15. 2017

슬픔이 녹아든 진한 핫초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슬픔이 녹아든 진한 핫초코


  처음 그의 슬픔을 읽어 내려갔던 때는 중학교 때였다고 기억합니다. 공부방 책장에 질서 없이 꼽아진 책 중에 이 책을 골랐었지요.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제목이 맘에 들어서였을 수도 있고, 표지가 맘에 들어서였을 수도 있었겠죠. 그 시작이 무슨 연유였던 상관없이, 저는 곧바로 이 책에 매료되었습니다. 젊다고는 하나 저보다 나이가 많은 청년의 사랑과 슬픔. 비슷한 일을 경험해본 적도 없는 나이였음에도 그의 슬픔에 같이 마음 아파하던 저를 기억합니다. 이후에도 생각이 나면 읽곤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대학생 때, 그리고 작년과 올해 역시. 청년의 사랑이 어떻게 끝날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이야기의 말미를 읽을 때에는 마음이 아리고 슬픔이 차올랐습니다. 그리고 책을 덮을 때면 쉬이 손을 떼지 못했죠.


  누구나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을 작가. 독일의 대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앞서 말했던 그리고 지금부터 말할 책은 괴테가 20대에 썼던 작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입니다. 그를 유명 작가의 반열에 올려준 이 작품을 괴테는 단 4주 만에 써 내려갔다고 합니다. 그 스스로의 경험담과 지인 카를 빌헬름 예루잘렘의 자살이 계기가 되었죠. 젊은 주인공의 자살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결말이었습니다. 오죽하면 당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큰 유행이 사회적으로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까 하여 괴테의 책은 금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자살을 조장할 수 있다는 이유였지요. 하지만 단언컨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자살을 조장하거나 방조하기 위한 책은 아닙니다. 그저 빠져서는 안 될 사랑에 빠진 청년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일 뿐입니다. 비록 그 결말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길이었지만요.



  우리는 흔히 행복과 불행을 정반대의 개념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공존하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하죠. 행복하면 불행하지 않고, 불행하면 행복하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요? 삶에서 행복과 불행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인가요? 행복하면서도 불행한 순간은 없었을까요?


  행복을 느끼는 일과 불행을 느끼는 일이 서로 다르다면, 사실 어려울 것은 없습니다. 불행한 일은 최대한 피하고, 행복한 일을 가능한 한 열심히 쫓으면 되기 때문이죠. 그런데 만약 어떤 일이 행복을 주면서 동시에 불행을 주기도 한다면 어떨까요? 불행하기에 피해야 할까요, 아니면 행복하기에 쫓아야 할까요? 멀리 떠나온 도시에서 젊은 베르테르는 샤를로테(이하 로테)를 처음 만납니다. 그녀에게 약혼자가 있음을 미리 들었음에도 첫눈에 그는 로테에게 반하지요. 그리고 그 순간은 베르테르에게는 행복의 시작과 불행의 예견이었고, 축복과 저주의 시작이었습니다. 1771년 6월 16일, 친구에게 쓰는 편지에서 베르테르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는 그녀에 대한 말은 모두 역겨운 헛소리요, 그녀의 참모습을 조금도 표현해 내지 못하는 불쾌한 추상화에 불과하네.


  베르테르가 조심했다면 로테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하지만 어찌 조심할 수 있었을까요? 그녀를 본 순간 이미 베르테르는 사랑에 빠졌고, 시작된 사랑은 본디 감정의 주인조차 어찌할 수 없게 되는 법이지요. 물론 그렇다고 그 시작부터 베르테르가 극단적인 행보를 보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베르테르는 그녀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로테를 사랑하게 되었고, 태양을 따르는 해바라기처럼 자신에게 행복을 주는 로테를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로테에게 불가항력으로 이끌리는 베르테르는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음악과, 문학, 그리고 언제나 아이들이 함께했지요. 베르테르에게는 로테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행복에 빠진 이 시기를 거치면서 이미 베르테르의 사랑은 막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로테의 약혼자 ‘알베르트’가 돌아온 이후에도 말이지요. 더욱 괴로운 것은 알베르트가 몹시도 좋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알베르트가 조금이라도 나쁜 사람이었다면 베르테르는 로테를 위해 어떤 행동도 했겠지만, 베르테르가 대화해본 알베르트는 지극히 로테를 아끼고 사랑하는 좋은 남자였습니다.


아무튼 나는 알베르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네. 그의 침착한 매너는 감출 수 없는 내 불안한 성격과 너무나도 현격하게 대조를 이루었네. 그는 감정도 풍부했으며 로테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도 잘 알고 있었네. 그는 우울증 같은 것은 별로 없어 보였어.


  알베르트와 로테는 어느 모로 보나 어울리는 한 쌍의 커플입니다. 이는 베르테르도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그러니 누군가는 베르테르에게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만둬야 하는 게 맞아.”하지만 앞서 말했듯 이미 베르테르의 사랑은 그가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커져 있었습니다. 이성적으로는 그런 충고가 맞는 것이라 해도 베르테르는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나는 뿌드득 이를 갈며 처량한 내 신세를 비웃는다네. 그리고 누군가가 내게 다른 방도가 없으니 차라리 단념하는 편이 낫겠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에겐 두세 배의 조롱으로 갚아주겠네. 내게서 이런 허수아비들을 없애 주게나.


  시간이 지날수록 베르테르의 감정은 격해집니다. 그러나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는 비참한 신세에 점차 우울에 빠지죠. 원래 베르테르는 스스로 우울에 대해 혐오에 가까운 감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알베르트가 아직 도착하기 전, 로테와 함께 한 어느 모임에서 슈미트와 논쟁을 벌이기도 하죠. 이때의 베르테르는 우울증에 관해 아주 공격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마치 우울증은 본인이 충분히 노력만 한다면 극복할 수 있고, 주변에 나쁜 영향을 끼치지 때문에 악덕과도 같다는 듯이요.


“우울증이란 태만과 비슷한 겁니다. 아니 태만의 일종이지요. 우리 인간에게는 천성적으로 그런 기질이 있어요. 하지만 우리가 단 한 번만이라도 스스로를 다잡을 힘을 갖게 된다면 우리가 하는 일은 수월하게 이루어질 것이고 우리는 그 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젊은 친구는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을 컨트롤할 수 없으며 절대 자신의 감정을 통제할 수 없다고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네.


  이토록 우울증에 대해 강하게 공격하는 베르테르는 우울과 전혀 상관없는 인간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베르테르는 로테를 사랑하면서도 알베르트를 미워할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합니다. 그는 점점 우울해지지요. 그렇다고 베르테르가 우울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전에 말했던 것처럼 상황을 바꿔보려 노력하지요. 그래서 베르테르는 로테에게 인사하고 다른 지역으로 떠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결코 평안할 수만은 없었지요. 잘 지내는가 싶었지만 결국 사교계 모임에서 다시 상처받고 맙니다. 그리고 로테에게 돌아오지요. 이후에 베르테르가 친구에게 보내는 11월 3일 편지에서 베르테르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도 자주 다시는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아니 가끔은 그렇게 기대하면서 잠자리에 눕는다는 것은 하느님만이 아실 거라네! 그러다가 아침에 눈을 뜨고 또다시 태양을 바라보면 나는 비참해진다네. 아, 내가 그냥 기분 내키는 대로 모든 것을 날씨 탓으로 돌리거나 아니면 제삼자에게 전가하거나 실패한 사업에 책임을 물을 수 있다면, 내 마음속 불만의 참을 수 없는 짐의 무게는 반으로 줄어들 텐데. 딱하구나! 모든 잘못의 책임이 내게 있음을 나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 아닐세, 잘못은 아니지. 지난날 나의 모든 기쁨이 그랬듯이 나의 모든 슬픔의 근원 역시 내 안에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네.


  극도로 우울에 빠진 모습이지요. 결국 슈미트의 말이 맞았던 것일까요? 우울증은 태만이라고 비난하던 그가 스스로 우울증에 빠지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제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 어쩔 수 없는 감정이 바로 사랑일까요? 로테를 사랑하여 그토록 행복했던 베르테르는 로테를 사랑하여 이토록 불행하게 변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위태위태하게 버티던 베르테르를 충격에 빠뜨리게 만드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여주인을 사랑한 머슴이 불화로 쫓겨나자 새로 고용된 하인을 죽인 사건입니다. 전에 베르테르는 이 머슴과 마주친 적이 있었고 여주인과 머슴의 사랑을 아름답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결과가 처참하게 이어짐을 보았고 베르테르는 광기에 휩싸인 머슴에게 말 못 할 깊은 동정심을 느낍니다.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비참한 선택을 한 머슴이 마치 자신의 모습 같았기 때문이겠지요. 베르테르는 머슴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변호하는 마음으로 온갖 수단을 동원했지만 결국 실패합니다. 이에 힘들어하던 베르테르는 슬슬 마지막을 결심하게 됩니다.


어제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서 당신의 손을 뿌리치고 나와 그 모든 것들로 인해 온 마음에 짓눌림을 느끼며 당신 곁에서 지내는 기쁨도 희망도 없는 생에 끔찍하도록 차갑게 직면했을 때, 나는 내 방에 들어서자마자 정신을 잃고 털썩 무릎을 꿇었소. 오, 하느님! 당신은 이 쓰라린 눈물로 제게 마지막 청량제를 주시는군요! 수천 가지의 가능성과 계획이 내 마음속에서 몸부림쳤소. 그러다 결국 한 가지가 남더군요. 굳고 완전하게 말이오. 마지막의 유일한 생각, 나는 죽고 싶다는 것이오! 나는 자리에 누웠어요. 아침이 되어 차분한 마음으로 깨어났을 때에도 그 생각은 여전히 너무나 확고했소. ‘나는 죽고 싶다!’ 그것은 절망이 아니라 확신이었소.


  이 편지는 베르테르가 죽고 나서야 로테에게 전해집니다. 그리고 로테의 손을 통해 건네진 권총을 시종에게서 받아 자신의 방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던 것일까요?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다 보면 그의 절절한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그리고 더욱 크게 보면 로테에 대한 사랑으로 어둡게 변해가는 젊은 베르테르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죠. 젊은 베르테르는 사랑을 했고, 사랑을 견디지 못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사랑 때문에 환히 웃던 그가, 사랑 때문에 차가운 주검으로 변하고만 것이지요. 그의 사랑은 깨어지지 않을 만큼 강했으나, 젊은 베르테르는 이를 견디기에 너무나 연약했습니다.



  행복과 불행이 동시에 존재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랑을 해서 아프다면 그 사랑을 계속해야 할까요? 우리는 행복하고 이상적인 사랑을 바라곤 합니다. 서로가 좋은 연인이 서로 사랑하여 결실을 맺는 사랑을요. 베르테르의 사랑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상적인 사랑에 미치지 못했다고 하여 베르테르의 사랑을 격하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에 정답은 없기에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베르테르의 사랑에 마음이 아픕니다. 그의 진실된 사랑이 결국 이루어질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죠.


  초장에 말했듯 간혹 베르테르의 죽음을 두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불륜 혹은 자살을 조장하거나 옹호하는 이야기라고 폄하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물론 아주 잘못된 의견이지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베르테르라는 청년의 감정과 생각을 아주 세밀하게 표현한 텍스트입니다. 그의 생각과 기쁨 그리고 아픔을 따라가다 보면 그의 선택 역시 마음 아프지만 이해하게 되지요. 비록 아주 비극적인 선택이었지만요. 슬픔에 대한 이해를 제공하는 것과 그러한 행동을 권장하는 것은 아주 다른 이야기입니다.


  행복과 불행이 동시에 찾아온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다시 몇 번이고 읽는다고 하여도 정답을 찾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마 평생 가도 답을 내리지 못할 수도 있고, 제게 그러한 순간이 올 수도 있음에 조심한다고 하여도 속수무책일 수도 있죠. 한때는 비극적이고 슬픈 사랑을 해보고 싶다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너무 아플 것 같아 힘들 것 같습니다.


  비유해보면 제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진한 핫초코 한 잔과도 같습니다. 슬픔이 녹아든 이 핫초코는 너무도 진하여 혀가 마비될 정도로 슬픈 맛이 느껴집니다. 삼킨 뒤에도 진득한 슬픔이 입안에 얼얼하게 남아있습니다. 그러니 물론 매일 마시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가끔 슬픔이 너무나 절실할 때에는 괜찮지 않을까요? 언젠가 생각이 나면 언제고 다시 집어 들 한 잔이자 한 권의 책입니다. 이런 책 한 권쯤은 비상용으로 항상 마음 한편에 꼽아두려 합니다. 슬픔이 필요할 때 언제든 손 뻗으면 닿을 수 있게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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