낱장 일기17
때가 있더라. 노오란 은행잎이 머리 위에서 팔랑이며 떨어지는 것을 보노라면 가을이 왔음을 느끼고, 사부작대는 소리 하나 없이 세상이 조용해지면 새벽이 왔음을 느끼고, 지나치는 길에서 당신들이 떠오르면 지나간 과거가 추억이 되었음을 느낀다.
오늘 또 하나의 결혼식을 보며 느꼈다. 운명이나 필연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일에는 때가 있다는 것을. 물론 시간이 지나 그때의 결과가 좋지 않음으로 드러나서 그때는 그렇게나 반짝였던 시간이 모든 불행의 시작으로 여겨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시간을 돌린다고 하여도(개인적으로 이런 가정을 좋아하진 않는다. 시간을 돌릴 수가 없다는 걸 다 알지 않은가?) 그때가 다른 때로 여겨질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때는 여전히 그때로 여겨지고, 다시 모든 것이 익숙한 자리를 찾아가리라. 그러니 그 순간 우리가 느꼈던 ‘때’는 진실을 품고 있었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나에게도 많은 때가 있었다. 사랑, 즐거움, 분노, 혼란이 찾아오던 때가 있었다. 시간이 지나 생각해보면 이제는 초연해진 마음으로 왜 그리도 감성적이었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그때가 모두 나의 삶이었음을 지울 수 없는 쐐기의 흔적과도 같은 시간이었음을 알고 있다. 그때마다의 부딪힘, 하나하나의 끌질로 밉든 곱든 지금의 내가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으랴.
그러나 가만히 앉아있다고 때가 찾아오진 않는다. 그런 경우가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당신이 매주 로또를 사면서 어떤 결과를 받아왔는지 생각하면 납득하기 어렵진 않을 것이다. 하다못해 로또도 일단 사야 당첨이든 낙첨이든 될 거 아닌가.
운명이 이끈다는 소리를 하진 않을 것이다. 운명이 이끌긴 뭘 이끄나, 이따위로 이끄는 것이라면 차라리 돌풍에 몸을 맡기는 홀씨의 궤적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우린 그걸 보통 이끈다고 하지 않는다. 휘둘린다고 할지언정.
때로는 스트레스가, 때로는 고통이, 때로는 어떤 감정의 발현이 우리가 때를 만날 수 있게 한다. 쌓아왔던 모든 시간이 내 마음의 그릇을 채우고, 넘칠 것 같지 않았던 감정들이 아슬아슬한 지점에 이르러 표면에 찰랑이면, 작은 돌멩이 하나, 발바닥을 울리는 지하철 소리, 보랏빛으로 물드는 어느 날의 저녁 하늘에, 그 작은 파문에 넘쳐흐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때에 우리는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모로 비틀어 본다. 때가 온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어떤 때에 이쪽이 아닌 저쪽으로 발길을 돌렸다고 해서 인생에 기가 막힌 반전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그건 드라마에나 있는 일이다. 로또 이야기를 또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쨌든 당신은 때를 만났고, 방향을 틀었다. 어쩌면 그것만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전부일지 모른다. 일어나버린 일들을 즐기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그 정도의 낙천적인 성격이라면, 이 글을 만날 때가 없을 테니까. 알아서 잘 사시라. 다만, 잘 기억하길 바란다. 각자의 삶에서 저마다 때가 있었음을. 지금 내가 두발 딛고 있는 이 좌표가 어떤 길을 통해왔는지. 직선으로 여겨왔던 인생이 어떤 굴곡을 거쳐 왔는지. 그리고 나는 어떤 선택을 했었는지. 그것을 기억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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