낱장 일기18
오늘 과거를 걸었어. 그때 타던 버스와 그때 내렸던 정류장, 환승했던 지하철을 타고, 몸이 먼저 기억하는 방향을 향해서 걸었어. 마치 4년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더라. 그 친숙하고도 그리운 기분을 지울 수가 없더라고. 여기엔 카페가 있었는데. 붉은색 벽돌이 외관을 장식한 길쭉한 카페가. 향긋한 커피 향이 저녁을 채우고, 노오란 불빛이 각 층마다 창을 통해 새어 나오던 카페가 있었는데. 이젠 더 이상의 커피 향은 맡을 수 없게 되었지만, 그 텅 비어버린 공간에서 아직도 난 과거 속의 나와 당신들을 봐.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가지고 열띤 토론을 벌이던 우리를.
내 앞을 헉헉대며 뛰어가는 나도 보인다. 이쪽 방향으로 뛰어가는 걸 보면, 경제학 수업을 들으러 가던 거였겠지. 조금만 더 일찍 나오면 되는 거였는데 왜 그리 항상 뛰어다녔을까. 그 익숙한 파란색 백팩을 들썩이며. 그러고 보니 숨도는 아직 그대로네. 참 이쁜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고작 몇 번밖에 가보지 못했어. 그보다는 맞은편 새하얀 항구를 떠오르게 하던 카페를 종종 갔었지. 내부도 널찍하고 무엇보다 음료들이 아주 맛있었거든. 지금은 문구점으로 바뀌어 버렸지만 말이야. 그리고 저 멀리 선배와 칼국수를 먹으러 가는 모습도 보이고, 교수님을 따라 골목 안 쪽 중국집으로 가는 모습도 보이네. 다들 아직 있을까. 다시 가보고 싶다.
학교 정문에 다 와가니 너무 많은 것들이 겹쳐 보인다. 정문에서 벚꽃 나무가 줄지어 선 언덕을 올라가는 나, 커브 앞을 지나가는 나, 편의점에서 나오는 나. 모두 나의 시간이었는데 이젠 마치 꿈처럼 느껴진다. 나는 여전히 그대로인데.
차라리 신촌 방향으로 올 걸 그랬어.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럴 걸 그랬어. 거기에서도 과거의 나를 많이 찾을 수 있겠지만, 이쪽보다는 나았을 텐데. 지나간 시간이 너무 그리워서, 모든 시선에 추억이 걸려있어서, 그렇게 날이 좋은데도 불구하고, 나는 자꾸 죄진 마음으로 체념하는 마음으로 걷게 되잖아.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헛되이 그리워하게 되잖아.
그래도 좋더라. 그냥 좋더라. 그리고 다음에는 좀 더 일찍 나오고 싶더라. 여유를 좀 두고, 잠시라도 좋으니 벤치에 앉아 가만히 눈도 감아보고, 숨도 천천히 내쉬어보고 싶더라. 그러면 그리움이든 후회든 슬픔이든 뭐든 실타래 풀 듯 숨결에 풀어 보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완결되지 못한 채, 매듭이 엉켜버린 이야기를 차근차근 정리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이런 식으로 바라보고 싶지는 않았어. 금의환향을 바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초라한 모습을 바란 건 아니었는데. 그 모습들을 내가 만들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건 알지만. 가슴에 사무친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싶어. 지나간 시절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이, 그 시절의 내가, 이제는 손 닿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버렸다는 게 새삼 마음이 아리게 한다. 이상하게도 오늘 유독 그러네. 그리고 앞으로는 더더욱 그럴 것만 같고. 그립다. 나의 지난날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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