낱장 일기19
어느덧 글을 쓰기 시작한 지 100일을 넘겼다. 그동안 단 하루도 빼먹지 않고 글을 썼다. 미리 써놓거나, 전날 분량을 다음날 쓰거나 했던 적 없이 언제나 자기 전에 한 장의 일기를 써왔다. 아주 완고하게 지켜온 규율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게 그렇게까지 지켜야 할 일이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매일 한 장의 일기 쓰는 일이 뭐 그리 중요할까. 쓴다고 돈이 벌리는 것도 아니고, 안 쓴다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니 지난 글쓰기가 현실적으로 무언가를 바꾸진 못했다. 오히려 매일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잠드는 안 좋은 생활 패턴을 갖게 해 줄 뿐이었다.
그럼에도 누구도 궁금하지 않을 이 글을 지난 백일 동안 지켜왔다. 매일 무엇을 써야 할지 머리를 싸매고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고, 좋은 문장이 아닌 그저 분량을 채우는 일에 급급했던 날들도 있었지만, 이젠 고집과 구분할 수 없는 어떤 사명감을 갖고 매일을 버텨냈다.
내게 이건 단순히 쓰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건 이미 나 자신과의 약속을 넘어 깨뜨릴 수 없는 계약이 되었다. 백 개의 글은 성취를 자랑하는 화려한 금자탑이 아니었다. 오히려 매일 하루를 살게 하는 허가증에 가까웠다고 말할 수 있다. 지나간 글들은 언제나 허가증으로서의 효력을 잃어버렸고 매일 새벽 글쓰기는 새로운 허가를 받기 위해 몸부림치는 행위였다.
어떤 목표나 의도를 설정하고 시작했던 일은 아니었다. 적어도 아주 초기 단계에서는 정말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행위 그 자체, 글을 쓰는 행위에 목적이 있었다. 그러니 어떤 글을 쓰는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이든 쓰고 나면 나아지리라 (무엇이?) 생각했으니까.
염치없게도 지금의 나는 이 행위의 효용성을 바라고 있다. 이것으로 뭔가 유용한 가치를 끌어내고 싶은 것이다. 책을 낸다던가, 글이 퍼져서 유명세를 탄다던가 하는 그런 유용함 말이다. 그렇게 된다면, 뻔한 인터뷰 대답처럼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이런 것을 바라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으나 다만 꾸준히 함으로써 운이 좋아 이렇게 감사한 결과를 만들어 냈다고. 다른 것은 바라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글을 쓰며 살고 싶다고.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마치 로또 낙첨 결과처럼 빤한 일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생각, 헛된 희망을 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 상황이 힘들면 힘들수록 그런 망상은 거부할 수 없이 부풀어 오르기 마련이니까.
백 일이 넘었다고 앞으로의 글쓰기가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매일매일이 독립 시행이라 생각하고 처음 쓰는 마음으로 그날의 글을 쓸 것이다. 너무나 피곤하거나, 쓸 말이 없거나, 분량이 적어져 현타가 와도 그래도 쓸 것이다. 언젠간 실패할 그날이 오고야 말겠지만, 그날을 최대한 뒤로 조금 더 뒤로 미루고 싶다. 그래서 그날에 뒤를 돌아보며 이 정도면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게. 멈춤을 받아들일 수 있게. 그런 마음이 가능해질 때까지 오늘 그리고 내일을, 계속해서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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