낱장 일기23 : 알베르 카뮈 '작가수첩Ⅱ을 읽으며
글을 쓴다는 사실 속에는 내게 부족해지기 시작하는 개인적인 확신의 증거가 담겨 있다. 무엇인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확신, 특히 무엇인가가 말해질 수 있다는 확신―자신이 느끼는 것, 자신의 존재가 모범으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확신―자신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라는, 자신이 비겁하지 않다는 확신. 나는 지금 그런 모든 것을 잃어가고 있다. 나는 내가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게 될 순간을 상상하기 시작한다.
(알베르 카뮈, 작가수첩Ⅱ, 103)
나의 글쓰기 행위에도 개인적인 확신의 증거가 담겨 있을까. 위의 글에 모든 부분이 나의 글 쓰는 동기와 일치한다고 할 순 없다. 그러나 지금 저 글은 3년 전의 내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2017년, 대학을 졸업한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 채 방황하고 있었다. 남들이 걸어가는 취업이라는 목표를 뒤따를 용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어왔는데 시간이 지난 지금 과거의 나에 대한 의구심이 드는 건 사실이다. 마치 카뮈가 확신을 잃어간다 말했던 것처럼) 그보다는 내가 바라는 것에 대한, 인생의 의미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나의 존재를 사로잡았었다. 당시 나로서는 그 궁극적인 질문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고 느꼈지만, 마땅히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역시 몰랐기에 아까운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혼란에 빠져 아무런 의욕 없이 한참을 비틀거리던 그해 가을, 나는 갑작스럽게도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소설을. 도대체 그 감정을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강렬한 충동. 그때에 나는 저 위에서 카뮈가 말했던 것과 아주 유사한 감정을 느꼈다고 확신한다.
어쩐지 글을 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글을 써야만 할 것 같았다. 속에서 내뱉어져야만 할 말이 있었다. 나는 이 근거가 없는 확신을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그건 거부할 수 있는 종류의 명령이 아니었다. 그렇게 제대로 글이라는 것을 써본 적도 없는 나는 그해 가을 무려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3개월이 지난겨울, 한 해의 마지막, 나는 첫 단편소설 ‘사막의 이정표’를 탈고했다. A4 20장이 넘는 이야기. 삶의 냉혹한 조건을, 자신을 감싸는 사면의 무정한 벽의 실재를 느낀 한 남자의 이야기. 미스터리한 M과의 조우와 그 이후 남자가 겪는 삶의 변화에 관한 이야기였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그건 정말 써야만 하는 이야기였다. 한계에 부딪혀 존재의 조건을 깨닫고, 그 메마른 사막으로 걸어갈 첫 발자국을 떼기 위해, 삶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곳으로 나아가기 위해, 나는 글을 쓰고 살아남았다.
시간이 흘렀다. 지난 의지는 눈밭에 찍힌 발자국처럼 더 이상 흔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옅어졌고,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이제는 마치 그 시절이 떠도는 전설에 불과한 풍문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잊지 말자. 그것은 나의 시간이었고, 내 삶의 조각이었다. 이제는 내게 더 이상 그때처럼 강렬한 확신은 없지만, 여전히 나는 내 가장 깊은 곳에 자그맣게 타오르는 잔불을 갖고 있다. 나는 그 불이 다시 타오르는 날을 상상한다.
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