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가끔 뵙는 엄빠의 얼굴이 빠르게 늙어간다는 느낌을 받았던 때 밥을 먹으며 문득 이런 제안을 드렸었다. 엄빠의 삶을 에세이처럼 마구 쓰셔서 나를 주셔라. 편당 얼마의 원고료를 드리겠다. 아니면 내가 자서전 작가처럼 인터뷰를 하겠다. 혼자 상상하길 여러 편 묶어 하나의 책으로 만들어 드리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두 분이 떠난 후에도 남겨진 것이 있어 참 든든할 거다. 뭐 그런.. 딴에는 기대에 무척 부풀었었다.
우리와 가장 가까이 오랜 시간을 공유하는 부모님이 우리의 부모가 되기 전, 한 남자, 한 여자로 살았던 삶에 대해, 당신들의 꼬마 시절에 대해, 어떤 꿈과 풋사랑에 잠 못 이루었는지에 대해 당신들의 동창이나 베프보다도 모른 채 살다 헤어져 버리는 게 마땅찮다고 생각한 것은 나뿐이었을 지도.ㅋㅋㅋ
결국 한 줄도 써주지 않으셨는데, 이번 설 연휴에 엄마가 외출하신 사이 아빠와 함께 점심을 먹으며 의도치 않은 아빠의 어린 시절 몇몇 에피소드를 듣게 됐다. 결혼에 대한 충고에서 시작된 것이었는데 ( 우리 엄빠는 참 특이하게 결혼 스트레스는 아예 주지 않으십니다만 ^^; ) 나이 들수록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말씀으로 시작, 그 에피소드들 중 영화 세렌디피티의 내용과 비슷한 도입의 스토리에 내 입꼬리가 빙긋이 오호라 ~ 이런 청년이었단 말이지. 뭐 그런 순간이 나와버렸던 거다.
아빠의 이야기 속 단어가 사뭇 아빠에게선 처음 들어보는 정서였는데, 그 누나, 기품 있는 사람, 천사 같은 아이들, 뭐 그런 표현에서 새하얀 얼굴로 흰 세일러복을 입고 휴가를 나온 스무 살 청년의 설레던 모습이 겹쳐 보였다. 해군에서 휴가를 받아 귀향 선물을 사러 백화점에 들렀다가 귀여운 아이가 넘어지는 걸 도와주며 뾰로롱, 아빠도 스무 살 즈음엔 연상에게 반하는 룰을 지키셨고, 도와준 것이 고맙다고 그 집에 초대되어 그녀의 남편과 밥을 먹고 발길을 끊었다.라는 것으로 허무하게 막을 내렸지만, ㅋㅋㅋㅋ 워낙 보수적이라 뻔하디 뻔하리라 생각했던 아빠의 청년 시절에도 나름 영화가 존재했구나 싶어 기분이 슬쩍 좋았다.
지금 곁에 여러분의 부모님들도 엄빠이기 이전엔 세상에 태어나 모든 게 처음이었던 풋풋한 꾸러기들이었다. 부부로 또 부모로 더없이 충실하셨던 우리 엄빠에게도 나는 알 수 없지만 분명 여자, 남자로의 젊은 날들이 있었으리란 걸 조금 엿본 이번 설 연휴. 키득키득
그렇기에 늘 말로만 듣다가 비디오로 찍으며 직접 목격한 엄빠의 무채 협동조합*은 더욱 사랑스러워 보였던 게 아닐까. 가족이란 참으로 아름답지 아니한가 말이다.
* 무채 협동조합은 언젠가부터 엄마의 엘보로 아빠가 반찬의 재료 손질을 거의 다 해주시는데, 무를 채칼로 썰어두시면 엄마가 양념을 하고 완성하시는, 반찬뿐 아니라 가사를 함께 하는 2인조 팀을 지칭하는 말로 제가 급조해 낸 제목입니다. 호호호 ( 실제로 이번 설 연휴에 만난 아빠와 엄마의 귀여움에 반찬특공대라는 브랜드를 만들어 꿈을 펼칠 기횔 드리... 응 아니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