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를 부탁해.
나는 세상의 많은 부분을 UX의 관점으로 본다. 사람들은 왜 무언가를 사거나 열광하는지 알려면, 그 사람들의 취향과 관심, 행동에 대해서 보는 UX의 관점이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UX라는 도구에서 찾은 관점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관심이다.
위대한 병법가들과 전략가들은 환경을 통제하는 힘을 지녔다. 기후, 토양, 거리, 시간 그리고 인간을 통합적으로 생각하여 판단했다. 배달의 민족은 근래에 보기 힘든 성취를 이뤘고, 커다란 딜을 성공시킨 후에 B마트라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내가 B마트에 대한 글을 쓰는 이유는 냉장고 때문이다. 냉장고는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을 설명하고, 음식에 관련된 소비를 결정하는 중요한 도구이자 환경이기 때문이다.
냉장고가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내가 살았었다는 것이다. 냉장고가 없는 시절 주방은 부엌이라고 불렀는데, 이때는 저녁마다 구멍가게 가는 일이 일과였다. 집에서 보관하고 있는 쌀과 김치, 파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식재료를 구매해야 했다. 라면이나 통조림 정도가 집에서 보관하고 있는 재료의 전부였다. 아침에는 두부 장수가 돌아다니고, 저녁에는 찹쌀떡 장수가 돌아다녔다. 5시가 되면 나는 동전 몇 개를 쥐고 구멍가게에 갔다.
그때는 동네에 가게가 몇 군데씩 있었다. 5분 정도마다 가게가 하나씩 있었고, 그날그날 야채와 채소를 팔았다. 정육점도 두세 군데가 있었다. 그리고 냉장고가 생겼다.
처음에는 냉장고에 계란과 김치 정도가 들어갔다. 처음 산 냉장고는 내 키보다 작았고, 성에가 많이 끼는 물건이었다. 여름에 얼음 정도를 먹을 수 있었다. 냉장고는 내가 크는 속도만큼 성장했다. 냉장고는 해마다 계속 커졌고, 기능이 많아졌다. 신기한 일은 냉장고가 커지면서 동네에 있던 작은 구멍가게가 사라지면서, 슈퍼 마켓이 되었다. 그리고 더 많은 냉동식품, 주로 만두... 같은 것을 팔기 시작하면서 라면의 종류가 많아지고, 통조림의 종류가 줄어갔다.
냉장고는 계속해서 커져서 결국 어른 한 명이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은 크기가 되었다. 그러면서 대형 마트가 생겼다. 어릴 때는 비닐봉지 하나로 끝나던 쇼핑이 어느 순간부터는 라면 박스 한 개, 그 이후는 작은 차가 없으면 안 될 정도로 쇼핑의 규모가 커졌다. 하얗고 큰 마트를 몇 번 다니고 나니까, 동네에 구멍가게는 거의 없어지고 편의점이 생겼다. 언제부터인가는 동전보다는 지폐를, 지폐보다는 카드를 들고 다니게 되었다.
그때부터 저녁에 집에 갈 때는 편의점에 가고, 주말에는 마트에 가는 일상이 십 년 동안 이어졌다. 편의점에는 늦은 시간까지 열어서, 마트에는 많이 사면, 싸게 산다는 믿음이 있었다.
냉장고의 크기는 유통의 변화와 소비의 양극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냉장고의 크기가 커질수록 소비자가 유통의 보관 비용 일부를 부담한다. 원래는 소매점에서 부담하던 창고 비용의 일부가 소비자에게 분산된다. 냉장고의 크기가 커질수록 한 번에 구매하는 양이 늘어나고, 한 번에 구매하는 양이 많아질수록 하나의 단가는 싸지지만, 폐기 비용도 늘어난다. 같은 기간 창고에 보관하다가 폐기해야 한다면, 싼 가격에 팔더라도, 누군가가 가져가는 것이 파는 쪽에서는 이익이다.
1+1으로 제품을 같은 가격에 두 배 사지만, 그중에 10%를 매번 버린다면, 버리는 비용도 소비자가 부담하고 있는 것이다. 버리는 비용뿐 아니라 마트에서 물건을 싣고 와서 다시 정리해서 보관하는데 연료도 사용하고 시간도 대단히 많이 소모한다. 코스트코의 경우, 큰 포장의 물건을 산 후, 몇 집이 나눠서 가져가는 경우도 있다. 가족이 몇 명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큰 용량의 냉장고는 관리하기 힘든 물건이 된다.
냉장고는 클수록 효율이 증가하지만, 냉장고에 물건을 유지하는데는 큰 비용이 들어간다.
냉장고의 크기는 비용을 말한다.
신선한 식재료를 신선한 상태로 보관하는 것이 냉장고가 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신선한 식재료는 요리할 사람을 필요로 한다. 가정을 돌보는 사람이 없는 집이라면, 냉장고에는 식재료보다는 냉동식품, 데워먹는 음식이 많아질 것이다. 최근 집밥이 유행하기는 했지만, 집에서 식사를 만들어 먹는 것이 TV 프로그램에 나온다는 것은 그것이 로망이 되고 있다는 듯이다.
로망이라는 것은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은 구경할 때 가장 흥미롭고 재미있다. 내가 하지 못하는 수준의 축구 경기, 내가 하지 못하는 수준의 육아, 내가 하지 못하는 수준의 요리. 모두 돈은 물론이고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이제 집밥은 준비하는 것도, 먹는 것도, 치우는 것도 부담스럽다.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족들의 시계는 모두 따로 돌아간다. 냉장고에는 점점 같이 밥을 먹지 못한 가족들을 위한 반찬이 늘어난다. 늦게 오면 먹으라고 넣어 든 찌개를 데워 먹는다. 냉장고 한 구석에는 그렇게 냉장시켜 놓은 가족과의 저녁 시간이 들어있다.
냉장고에는 시간이 보관된다.
얼마 전, 재미있는 앱이 있었다. 편의점 냉장고 앱인데, 이 앱은 편의점에서 파는 물건의 일부를 맡아두게 할 수 있다. 편의점을 냉장고 대신 쓰는 앱이다. 편의점에서 파는 할인 상품이나 덤으로 주는 상품을 바로 소비하지 않고, 앱에 보관해 두고 나중에 먹을 수 있다.
구매 시점과 소비 시점을 비동기화할 수 있는 이 서비스는 한 기업에서 특허를 냈기 때문에 다른 편의점에는 없다고 했다.
다른 한 편으로 보면, 집에 있는 냉장고에 물건을 넣어 둘 수 없는 상황에서 구매가 일어나거나, 집에 있는 냉장고에서 꺼내 먹을 수 없는 상황에서 소비가 일어나는 상황이기도 하다.
혼자 살 수 있는 시대다. 누군가의 보살핌이 없어도 적당한 음식을 주문해서 먹거나, 보관된 음식을 데워서 먹을 수 있다. 가족의 보살핌은 이제 유료 서비스가 되었다. 육아, 교육, 거주, 식사의 대부분의 외주화 되었고, 비용이 되었다. 1인 가구에서 냉장고는 다시 작아진다. 1명이 한 끼를 먹기 위해서 한 끼 분량의 식재료만 살 수도 있고 실제로 미리 손질되어 단품으로 포장된 재료들을 마트에서 팔기도 한다.
음식 재료를 담아서 순서대로 요리할 수 있는 밀 키트가 판매되기도 했고, 관련 스타트업도 있었다. 식재료를 새벽부터 신선하게 배송할 것 같은 서비스도 많았다. 그런데 만드는 시간과 버리는 비용, 식사의 비용 대비 만족도, 얼른 먹고 조금이라도 더 잠을 자려면, 라면과 냉동만두가 주는 효율성을 포기하긴 힘들다.
비용과 시간이 문제인 상황에서 B마트가 등장했다.
사람들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배민이 음식을 먹는데 편리한 환경과 비용의 효율성을 제공하면서, 편리하기만 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다. 배민의 경우는 가성비를 맞추면서, 가성비를 넘어서는 사람의 감정을 채우기 위해 노력했다.
디자인과 마케팅의 역할이 컸다. 배달 음식을 시킬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배달 음식을 주문하는 것이 혼자 살거나 가족과 떨어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는 캠페인을 지속했다. 초기 캠페인에서는 당당함과 멋짐을 표현했지만, 서서히 무거움을 벗고 가벼운 위트가 많이 늘어났다. 그러면서 인식의 변화도 생겼다. 배민은 다양한 디자인으로 메시지를 강조했다. 배달 음식을 배달하지만, 그 과정에서 느낄 수 있는 부정적인 감정을 서비스가 제공하는 다른 재미와 감정으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용자가 처한 환경과 배민이 만들어낸 환경을 이용하여, B마트에 대한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있었던 예전 일상에서는 '봉다리'라고 부르는 비닐봉지를 들고, 구멍가게에 갈 때 햇반이나 라면을 사진 않았다. B마트가 제공하는 환경에서 똑같이 '봉다리'를 들고 가지만, 거기엔 햇반과 라면, 음료수 정도가 담긴다. 이렇게 되면, 인테리어와 인건비 부담을 지고 있는 편의점과 경쟁하지 않고, 더 싼 비용으로 물건을 보관하면서 '봉다리' 단위로 담아서 파트타임 배달 직종을 통해 빠르게 팔 수 있다.
그리고 아주 짧은 시간만 일하는 직업은 이미 있다. 심부름 서비스 혹은 다른 배달 직종들이 커뮤니티에 올리는 글을 보면, 이왕에 배달을 오는 김에 작은 물건 몇 가지를 부탁하는 경우도 꽤 있었다. 또 타다에서도 잠깐 일하는 고용형태가 있고, 배민커넥트, 쿠팡 플렉스처럼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배송에 참여하는 직종도 생기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B마트가 기존 편의점이나 마트에 비해서 지지부진하거나 소리 없이 사라질 수도 있겠지만, B마트에 긍정적인 요소들을 다시 정리하면 이렇다.
1. 카드 결제의 일상화
2. 소규모 배달을 하는 직종의 탄생
3. 가구의 구성원이 줄어들면서, 주방이 작아지는 추세
4. 간편 식품의 일상화
5. 1+1, 덤, 패키지, PB 상품 구매의 일상화
5. 레트로 스타일의 유행
6. 실생활에 침투한 편리한 앱 서비스
배민 대표는 냉장고의 변화를 만들겠다고 한다. 마트 혹은 편의점과 경쟁하는 것 같지만, 지금 B마트에서 파는 걸 봐서는 냉장고를 대체하려는 것 같다.
아마존이 책을 팔았던 이유는 책이 오래 보관할 수 있고, 다른 곳에서 사도 품질이 똑같기 때문이었다. 지금 B마트에서 파는 물건들도 굳이 냉장고가 필요 없는 물건이 많다. 오래 보관할 수 있고, 품질도 비슷하다. 상품 페이지의 디자인도 할인율과 가격에 맞춰 두었다. 그리고 '봉다리'로 소량 배달이 된다.
30분~1시간 정도면, 저녁 반찬으로 쓸 감자조림에 넣을 감자를 집으로 받을 수 있는데, 새벽에 받아서 냉장고나 베란다에 8시간 정도 감자를 놔둘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계층은 마트를 이용하는 사람이나 편의점을 이용하는 사람과는 다르다.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너무나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루는 라면을 먹고, 하루는 코셔 소금을 구해서 스테이크를 구워 먹는 세상이다. 혹은 비빔면을 비벼 먹던 사람이 다음 날은 미시 고랭을 해 먹을 수 있다. 먹는 것은 엄청나게 다양해졌다.
이 상황에서 냉장고를 대체할 만 가치와 이유를 주면 사람들은 냉장고를 사는 비용을 B마트를 이용하는데 쓸 것이다. 마트를 가는 사람들은 계속 마트를 가고, 편의점에 가는 사람들은 계속 편의점에 간다. 사람들은 B마트를 어찌 됐든, '마트'라고 생각할 것이다.
대부분의 UX에서 데이터를 분석하는 작업은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UX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계속 관심을 갖다가 보면, 흥미로운 점이 하나 보인다. 하나는 쿠팡 같은 경우로 필요한 곳에 필요한 정보나 인터페이스가 있다. 그리고 매우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정보가 나온다. 다른 하나는 배민인데, 여기는 필요한 곳에 필요한 것이 나오긴 하지만, 두 가지가 더 있다.
간단함과 위트다. 누구나 알 수 있지만, 요기요와 배민의 분위기는 다르다. UX 리서처가 그걸 어떤 관점으로 어떻게 분석할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기업은 배민이 했던 시도를 잘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그렇게 할 수 없는 '환경'에 있다. 상품을 구매하는 단위를 '봉다리'라고 했던 회사는 내 기억엔 배민 뿐이다.(그 이전에 사용한 쇼핑몰이 있다면 죄송합니다.) '장바구니'라는 용어가 20년을 버틴 시장이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 배민이 만든 것은 아주 작은 차이인데, 그 차이를 다른 회사가 따라 하기 힘들다. 그리고 고전적인 마케팅 책인 포지셔닝에 보면, 배민은 가장 높은 사다리에 이미 올라가 있다.
만일 B마트가 성공하게 된다면, 누군가 성공요인을 마케팅 책을 인용해서 말하지 않고, UX나 디자인으로 설명해줬으면 좋겠다.
** 추가: 지인과 이야기하던 중 논쟁이 된 부분을 덧붙인다 냉장고와 가족의 시간은 아주 작은 부분이다 이것을 비용으로 바꾸면 한 사람 당 얼마일지, 의미가 없을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 비용이 예를 들어 연간 100원이고 해서, 그 비용 100원을 배민이 가져간다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그 비용은 더 커진다.
‘봉다리’를 집중하는 이유다. 구매 단위를 통제하면, 비용을 통제할 수 있다. 이미 로켓배송도 단위를 통제한다. 그러나 봉다리와 로켓. 어떤 것이 ‘자연스러운’, ‘의식적인 개입’이 적을까? 봉다리는 비용을 흐리게 하는 유연한 메타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