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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사랑한미술관 Apr 25. 2022

작은 것들에서 비롯된 예술이 건네는 위로

우태경 작가 <드로잉들의 그림> @갤러리 조선 & 영화 <로마>


* 유튜브 영상의 스크립트입니다. 영상은 아래 링크를 참조해주세요.


작은 것들에서 비롯된 예술이 건네는 위로 | 우태경 작가 | 드로잉들의 그림 | 갤러리 조선 | 알폰소 쿠아론 감독 | 로마

https://youtu.be/RnjUk_ZJLPQ




안녕하세요. 내가 사랑한 미술관입니다.


영화 <그래비티>로 유명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작품 <로마>는 감독의 유년 시절을 다룬 자전적인 영화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감독 자신뿐 아니라 어느 누구의 시선도 빌리지 않고 객관적인 관점을 유지하며 어린 시절 그의 가족이 겪었던 개인적인 일들과 당시 멕시코 사회에서 있었던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로마>를 두고 쿠아론 감독은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진정으로 담아낸 최초의 영화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요. 감독 스스로도 이렇게나 특별하게 여기고 여러 시상식에서 수상도 많이 한 터라 어떤 영화일까 잔뜩 기대하고 봤는데 기대만큼 인상적인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특정 인물의 시선에서 흘러가는 이야기가 아니다 보니 주인공도 명확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기승전결이 뚜렷하지 않아서 제게는 좀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로마>는 여러 면에서 제게 익숙한, 소위 대중적이라고 말하는 영화들과 달랐는데요.


먼저 쿠아론 감독은 실제 인물과 최대한 닮은 사람을 찾기 위해 연기 경험이 없는 일반인도 가리지 않고 캐스팅했습니다. 거의 주인공이라 볼 수 있는 유모 역할을 맡은 배우마저 연기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배우들에게 대본을 주지 않고 캐릭터별로 알아야하는 내용만 각자에게 설명해주었고 리허설 또한 최소화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흐름을 영화로 담고자 했습니다. 쿠아론 감독은 담고자 하는 순간을 먼저 정하고 그 순간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로마>의 서사 구조가 뚜렷하지 않은 건 이 때문인 듯합니다. 여러 상을 받고 많은 사람들에게 호평이 자자한 영화라면 으레 연기 경력이 탄탄한 배우들이 캐스팅되고 잘 짜여진 대본을 가지고 감독의 의도대로 완벽하게 찍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로마>는 이런 예상과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진 영화였습니다.


<로마>와 비슷하게 전체적인 틀을 먼저 짜고 세부적인 것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부분에서 전체로 뻗어 나가는 방식으로 그려진 그림이 있습니다. 2020년 여름 갤러리 조선에서 열린 우태경 작가의 개인전 <드로잉들의 그림>에서 소개된 작품들인데요. 전시를 처음 보았을 때는 화폭을 가득 채운 다양한 형태와 색깔을 가진 아름다운 도형들이 시선을 빼앗았는데 그들을 하나 하나 눈으로 좇다보니 중간 중간 어색하게 놓여있는 작은 사각형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손톱만큼 작은 사각형이 캔버스 위에 덧붙여져 있었는데 사각형 안의 그림이 선명하지 않아서 사각형 바깥의 그림과 조금 어설프게 이어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한 작품만 그런 줄 알았는데 전시를 보다 보니 다른 그림들도 모두 비슷한 사각형이 군데 군데 붙어있었습니다.


왜 작품마다 이런 사각형들이 숨어있는 것인지 이들의 정체가 궁금했는데 나중에 전시 팸플릿을 읽어보니 이 사각형들이 그림의 출발점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저는 전시를 볼 때 작품을 먼저 보고 전시 설명을 나중에 읽는 편입니다. 작품을 보면서 궁금했던 내용이 설명문에 나와있는 걸 발견할 때면 작품의 핵심적인 부분을 알아봤다는 생각에 내심 뿌듯해하는데 그만큼 전시나 작품이 더 오래 기억에 남아 좋더라구요. 이 작품만 해도 설명을 먼저 읽고 작품을 보았다면 그림 속 숨어있는 사각형의 존재가 이만큼 인상적으로 다가오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면 우태경 작가는 온라인에서 수집한 익명의 회화에서 이미지의 일부를 발췌합니다. 그것들을 프린트한 뒤 캔버스에 붙이고 이들로부터 시작해 캔버스의 나머지 부분을 즉흥적으로 채워 나갑니다. 그림 속 군데 군데 숨어있는 의문의 사각형이 바로 이 이미지들이고 '드로잉들의 그림'이란 전시 제목도 이러한 작업 방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영화든 그림이든 보통은 전체적인 줄거리나 큰 밑바탕을 먼저 짜놓고 세부적인 것으로 들어가는 방식으로 만들거라 생각했는데 반대로 만들어지는 작품도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도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인생을 만들어 나가는 듯합니다. 영화 <로마>가 감독이 사랑하는 유모와 함께한 어린 시절의 소중한 순간들로부터 시작된 것처럼 우리도 과거를 세세하게 기억하기보다는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들을 먼저 떠올리고 거기서 파생된 부수적인 기억들로 지나간 시간을 메꿉니다. 우태경 작가의 그림이 작은 이미지들로부터 시작해 즉흥적으로 그려졌듯이 우리 인생도 미리 짜둔 계획대로 착착 흘러가기보다는 즉흥적인 선택이나 순간적인 감정, 불현듯 떠오르는 영감 같이 아주 작은 것들로부터 비롯되는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저는 이동진 평론가의 '하루 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 대로'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그만큼 계획을 잘 세우고 지키는 편이 아니어서 이렇게 작은 것들에서 비롯된 오늘 소개한 작품들이 더 흥미롭게 다가왔던 것 같은데요. 잘 짜여진 계획보다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나 즉흥적인 면에 중점을 둔 작품도 이렇게 아름답고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았습니다.


이번 영상에서는 예술 작품이 만들어진 방식을 가지고 이야기 해보았는데요. 제작 방식은 작품의 내용에 비하면 중요하지 않은, 부수적인 요소라고 볼 수 있는데 여기에 중점을 두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깨달음으로부터 앞으로 또 어떤 새로운 이야기들이 만들어질지 기대가 됩니다.


영상이 마음에 드셨다면 좋아요와 구독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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