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벽
생각의 벽
두개골(Skull)은 인간의 생각과 의식을 담는 가장 오래된 집이다.
겉으로 보면 매끈한 하나의 덩어리 같지만,
실제로는 22개의 서로 다른 뼈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정교한 조립 구조다.
이 둥근 벽은 우리가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경험의 출발점을 지켜왔다.
뇌두개골은 연약한 뇌를 감싸 충격을 흡수하고,
안면골은 눈·코·입이라는 외부의 문을 지탱하며
표정과 말투, ‘나’라는 인상을 완성한다.
그래서 두개골은 단순히 머리를 감싸는 뼈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의 형태와 삶의 방향을
가장 깊은 자리에서 떠받치는 보이지 않는 성(城)이다.
그 안쪽에서는 기억이 움직이고,
사랑과 미움이 조용히 몸을 틀고,
사소한 생각 하나가 인생의 궤도를 바꾸기도 한다.
우리가 누구에게 마음이 기울고, 어떤 회사를 선택하고 떠나는지—
그 모든 결정은 결국 이 22개의 조각이 만들어낸 공간 안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완벽해 보이는 이 보호막은 때로는 ‘세상과 나’를 가르는 벽이 되기도 한다.
생각을 지키려다 어느 순간 그 생각 속에 스스로 갇히는 순간이 찾아온다.
사회생활을 하며 나는 그런 장면을 적지 않게 보았다.
진심을 삼키다 턱관절이 굳어버린 사람들, 조직이라는 거대한 구조에 눌려 마음의 문을 스스로 닫아버린 동료들.
사실 두개골은 ‘단단함’만으로 이루어진 방패가 아니다.
오히려 틈이 있었기에 인간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태아 시절, 머리뼈에는 ‘봉합선(suture)’이라는 느슨한 틈이 있다.
그 틈 덕분에 좁은 산도를 통과할 수 있고, 태어난 뒤에는 폭발적으로 자라는 뇌가 스스로를 확장할 공간을 얻는다. 생존을 위해 남겨둔 여백이었다.
생각도 그렇다.
처음엔 유연하고, 다른 이야기에도 기울어지고, 새로운 관점 앞에서 스스로를 수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마음속 봉합선을 시멘트처럼 메우기 시작한다.
나를 지키기 위해, 내가 옳다는 확신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벽이 빈틈없이 완성되면 그 안은 안전하지만 고립되고, 견고하지만 고독해진다.
감각과 관계를 잇는 작은 구멍마저 막혀버리면 더 이상 새로운 공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그때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굳어진 관념을 반복하는 ‘기억된 존재’가 된다.
탄생과 죽음, 만남과 이별, 입사와 퇴사...
어떤 상황에서도 같은 상처를 되풀이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보호막이 더 이상 보호막이 아니게 되는 순간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두개골의 봉합선은 죽을 때까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뼈와 뼈 사이를 잇는 그 톱니무늬는 우리가 한때 얼마나 유연하게 세상을 받아들였는지를 보여주는 나이테 같은 흔적이다.
닫히기 위해 존재한 것이 아니라, 충격을 분산시키고 숨을 쉬기 위해 남겨진 틈이었다.
삶도 그렇다.
생각이 단단할수록 강해 보이지만, 실은 더 쉽게 부러진다.
균열이 있어야 숨이 쉬고, 의심이 있어야 생각은 살아 움직인다.
마흔 후반, 인생의 2막을 앞두고 이 벽을 처음부터 다시 더듬어보았다.
20여 년의 직장생활을 졸업하듯 떠나던 날,
나는 오래 품어온 신념과 습관들—
‘전문가’라는 이름 아래 굳어버린 나의 껍질을 마주했다.
지금 나는 그 벽을 조용히 두드리고 있다.
과도하게 메워버린 봉합선을 다시 찾아내려 한다.
두 번째 인생은 굳어진 생각이 아니라, 다시 벌어진 틈 사이로 들어오는 빛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진짜 보호는 빈틈없는 차단이 아니다.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유연함,
언제든 다시 흔들릴 수 있는 용기가
우리의 뇌와 인생을 가장 안전하게 지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