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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철현 Aug 04. 2023

후배의 이직과 선배의 품격

나는 이런 선배가 참 멋있더라

출근 하자마자 같은 언론홍보 파트 후배 S가 느닷없이 면담을 청해 왔다. 느낌이 왔고 역시나 이직 통보였다. 편의점 회사를 떠나 커피 회사로 . 어쩐지 요즘 연차를 자주 쓰더라니.. 담담한 척했지만 예상치 못한 소식에 충격이 적지 않았다. 언론 실무는 나와 S를 포함해 총 3명이었고 조만간 한 명을 더 뽑아 4명 체제를 구상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계획한 충원이 예상치 못한 원으로 급반전을 맞은 것이다. 일은 많고 사람은 줄어드니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앗 뜨거!


퇴근 후 이 소식을 아내에게 전했더니 그보다 더 충격적인 코멘트가 돌아왔다.

"오빠가 빌런이었네"

"어? 내가?"

일 년 전 S의 사수이자 당시 나의 직속 후배 E가 이직한 걸 두고 하는 말이었다. 밑에 후배 둘이 릴레이로 회사를 떠나는 것이니 정황상 범인(?)은 나였다. 아.. 진짜 또라이는 자기가 또라인 걸 모른다더니 내가 그 말로만 듣던 T.O.P 또라이었단 말인가?! 《식스센스》의 브루스 윌리스처럼 대혼란에 휩싸였다. 하지만 나는 이를 단호히 부정했다. 그동안 나는 단 한 번도 후배들이 이직을 고민할 정도로-그들이 워낙 출중했기에-거친 훈계를 한 적이 없었고 빈곤한 잔고에도 언제나 지갑을 활짝 열었으며 공사 구분 없는 배려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떠나는 후배들도 특별히 나에 대한 감사와 미안함을 전했고 무엇보다 우리는 인간적으로 했으니..(말이 길어질수록 내가 점점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 같은데.. 아무튼 나 빌런 아니라고!)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팀원들이 특별히 모나거나 험상궂은 것도 아니었다. 이에 대한 근거는 블라인드에서 어느 익명의 직원이 '홍보팀=북유럽 같은 팀'이라 평한 걸로 갈음하겠다.


S의 송별회는 회사 근처에 새로 생긴 궁중보양식 맛집에서 성대하게 치뤘다. 우리는 가게 주인의 따가운 눈초리에도 아랑곳 않고 수육 전골에 육수를 무한 리필하며 늦은 시간까지 석별의 정을 나눴다. 그간의 관계를 정산하기엔 야속한 밤은 짧기만 했다. S의 마지막 변은 ‘모두들 정말 고마웠고 저는 새로운 도전을 하기 위해 아쉽지만 회사를 떠난다’는 것이었다. 마지막 자리에서까지 런 정제된 멘트를 날리는 걸 보고 ‘짜식~ 홍보맨 다 됐네’며 기특해 했다. 그러면서 “도전은 무슨. 니가 엄홍길이야? 그냥 솔직히 연봉 때문에 간다고 그래~”라고 농을 던졌다(나는 빌런이 맞나보다). 그런데 실제로 들어보니 S는 자신이 생각한 연봉보다 더 높은 금액으로 옮긴다고 다. 대략 5년 선배인 나보다도 더 높은 것 같았다. 그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왼쪽 눈엔 부러움, 오른쪽 눈엔 씁쓸함이 번갈아 스쳐 지났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영화배우 故강수연의 명언은 이럴 때 써야 나 싶었는데 정작 나는 돈도 없고 가오도 없어서 돈도 얻고 가오도 모두 얻은 S를 진심으로 더 축하해 줄 수 있었다.


사실, S는 내가 추천해서 영업에서 홍보로 데리고 온 친구였다. 홍보의 하나부터 열, A부터 Z까지 하나씩 알려주며 꼬박 3년을 같이 일했다. 중간에 윗분들이 S의 재능에 의구심을 품고 교체를 논의할 때도 누구나 끓는점까지는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한 법이라고 나 반대하며 그의 성장을 적극 도왔다. 지만 분명히 밝히고 싶은 건 내가 그렇게까지 했다고 해서 이직하는 S에게 결코 배신감이나 서운함 따위를 느끼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더 이상 함께 하지 못한다는 아쉬움은 컸지만 그 보다도 홍보의 ㅎ도 모르던 코찔찔이가 어느새 이렇게 멋진 재원이 되어 다른 회사의 스카우트까지 다는 사실이 되레 무척 자랑스러웠다.


10년이 넘는 회사 생활을 하는 동안 정말 많은 사람들을 떠나보냈다. 정든 사람과의 헤어짐은 늘 가슴이 시렸다. 단언컨대 떠나는 사람보다 남겨지는 사람이 더 그럴 것이다. 돌이켜 보면, 선배를 보낼 때와 후배를 보낼 때의 감정은 사뭇 달랐던 것 같다. 가령, 선배와의 이별은 먼 곳으로 이사 가는 친구와의 추억을 더듬는 찡한 ‘슬픔’이었다면 후배와의 이별은 친동생을 시집, 장가보내는 것 같은 먹먹한 ‘걱정’이 앞섰. 그래서 떠나는 선배에겐 ‘잘 가요’라고 인사하고 후배에겐 ‘잘 살아’라는 인사말을 하게  걸지도. 후배들이 다른 둥지에서 혹시나 시집살이, 처가살이 같은 설움은 당하지 않을까 보내놓고도 늘 마음이 쓰였다.


앞서 후배 E의 이직 때도 그랬다. E는 처음엔 톡톡 튀는 IT 회사로 이직을 하려 했다. 하지만 팀장님이 붙잡았다. 그 회사는 겉보기와 달리 그리 좋은 회사가 아니라고 본인이 가지고 있는 민낯 정보를 까발리며 거기 가면 고생만 할 거라고, 후회하게 될 널 볼 수 없다고, 그리고 우리가 지금까지 함께 한 날들을 생각해 보라며 어르고 달랬다. 팀장님은-물론, 조직의 안정도 있지만-진심으로 E의 안녕을 염려했다. 팀장님의 호소력이 먹혀들었는지 E는 퇴사 며칠을 앞두고 극적으로 스테이를 결정했다. 그러나 몇 개월 후 한번 흔들린 마음은 봄날의 민들레 홑씨와 같아서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이직의 바람을 탔고 결국 E는 디스플레이를 만드는-B2C 홍보들이 제일 부러워 하는-B2B 회사로 떠났다.


팀장님은 이번엔 별말이 없었다. 높은 연봉 앞에 깊은 의리는 배고픔 앞에 내밀지 않음만 못한 초라한 시집불과하다는 걸 셨던 걸까? 재밌는 사실은 E가 처음 가려고 했던 IT  데이터센터 화재로 서비스가 먹통되는 사고 엄청난 홍역을 치뤘고 이후 문어발식 경영이 힘을 잃으며 모든 계열사의 주가가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이 상황을 지켜보며 나는 E에게 “그때 너 거기 갔으면 맨날 야근하고 진짜 죽을 뻔했겠다. 결과적으로 팀장님이 너 살렸구먼. 사람 목숨 하나 구했으니 'LO 의인상'이라도 드려ㅋㅋ”라고 했다. 실없는 나의 농담에 E도 웃으며 공감했지만 메시지의 끝에 정작 지금 새 직장에서 차마 나에게 전하지 못하는 할말하않의 안부가 있는 듯 했다. 언뜻 비친 그 그늘이 마음에 걸렸다. 아니나 다를까 나중에 다른 후배에게 듣기로 E가 그곳에서 많이 힘들어 한다고 . 잘 살라니까.. 좀 더 자세한 얘기를 들어보고 싶었지만 들키고 싶어하지 않은 고민을 괜히 헤집어 놓는 걸까봐 연락을 더 자주 하지 못했다. 친정 엄마는 그런 마음이었다.


나는 후배들을 떠나보내며 선배의 품격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이직을 주제로 시작했으니 일단 그 얘기부터 하자면 선배는 떠나는 후배의 발목을 잡아안된다는 것이다(우리 팀장님 말하는 거 아님). 내 품을 떠난다고 해서 서운해 하거나 배 아파하거나 뒷담화 하는 건 지지리도 못난 짓이다. 개인적인 경험에 따르면 꼭 이런 사람들이 후배를 '내 새끼'라 부른다. 나는 그 호칭이 달갑지 않다. 그 이유는 과도하고 일방적인 소유격의 애정 표현이라서다. 그 말엔 마치 자신이 후배의 인생을 책임져 줄 수 있다허세와 넌 나 아니면 안된다는 구속의 의미가 담겨있다. 이런 권위 의식은 후배의 입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그의 이탈을 결코 용납하지 못한다. 진짜 큰 선배라면 더 넓고 멋진 세상을 향해 나아가후배에게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을 아름 따다 가는 길에 뿌릴 줄도 알아야지. 후배가 잘 되는 걸 내 일인 것처럼 기뻐할 줄 아는 것이 그동안 함께 해온 시간들을 더욱 빛나게 하는 일이다. 


특히, 이직을 고민하는 같은 입장일 때도 후배는 조금은 이기적인 마음으로 선배를 훌쩍 떠날 수 있지만 선배라면 자신의 부재에 대한 남은 후배의 안녕을 몇 번이고 헤아려 봐야 한다. 나는 그게 선배의 멋이라 생각한다. 요즘 후배들이 따박따박 강조하는 수평적 관계 측면에서 이는 형평성에 맞지 않는 말 같지만 그런 심량과 배려가 진짜 선배라는 이름의 무게가 아닐까. 후배는 선배에게 부탁할 수 있고 피치 못할 양해도 구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되도록 그러지 않아야 한다. 혹여 그렇게 하더라도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고.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후배는 어쩔 수 없이 선배가 어렵고 부담스럽다. 상호 건강한 관계를 위해서라면 선배가 후배를 더 어려워하는 게 낫다. 학연, 지연, 흡연 운운하며 후배를 곤란케하고 군림하는 건 선배가 아니다. 우리는  그런 유형을 꼰대라 부른다.


그리고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시 하는 선배의 자질은 바로 능력과 실력이다. 회사는 냉혹한 야생, 치열한 프로의 세계다. 그러므로 선배는 후배에게 배울 점이 다양한 영감을 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것이 선배의 존재 이유고 진정 후배를 위하는 길이다. 백날 번지르르한 공자님 말씀을 읊는 것 보다 가공할 능력을 보여주는 게 리더십이고 그것이 후배에게 비전이 된다. 나 잘났다고 으스대라는 소리가 아니다. 재수 없는 잘난 체가  그동안 오랜 시간 업에서 쌓아온 내공을 담백하게 시연하라는 이다. 말 없는 짬바에 눈부신 카리스마가 스며 있다. 선배의 능력은 나만의 것이 아닌 후배들과 공유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그래야만 개인이 함 성장하고 그 조직이 단단해진다. 대체로 능력 있는 선배가 능력 있는 후배를 키우고 이런 매커니즘이 그 조직의 수준을 높이게 된다.


그 시작과 추진력의 주체는 바로 선배들이다. , 여기서 능력은 인성과 페어링이 돼야 한 것. 인성 없는 능력과 능력 없는 인성은 반쪽 짜리에 불과하다. 예전에는 출중한 능력을 바탕으로 한 강한 리더십이 잘 먹혔다. 예컨대, 드라마《하얀거탑》의 장준환을 보라. 그는 천부적인 실력과 의욕이 넘치는 의사로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 하지만 출세와 권력에 대한 야욕으로 환자들을 차별했고 친구를 무너뜨렸고 후배들을 편갈랐다. 능력이 있으면 팔로워가 생기기 마련이지만 인간적인 덕(德)이 없다면 뛰어난 명성도 오래가지 못할 뿐더러 그 끝은 비참하다. 그런 능력에 대한 팔로잉은 수단과 필요에 의한 따름이지 진짜 존경의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선배의 권위는 푸쉬(push)가 아닌 풀(pull)이어야 한다.


후배들에게 기꺼이 배우려는 자세도 선배가 갖추어야 할 능력 중 하나다.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자신 보다 아랫 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데뷔한 지 40년이 다 되어 가는 이승철도 아들 뻘인 악동뮤지션 이찬혁의 프로듀싱에 같은 노래를 200번 넘게 불렀다고 한다. 선배라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한참이나 어린 후배의 디렉팅에 부족함을 지적받고 재차 녹음에 녹음을 이어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충분히 자괴감이 들만한 상황이다. 하지만 그는 선배로서의 위치보다 뭐가 더 중요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정작 우리가 부끄러워 해야 할 건 '후배보다 내가 모든 것에서 낫다'라는 오만과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 외에도 선배의 품격은 일일이 다 열거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것들이 있다. 체력, 재력, 외모, 인맥, 유머, 여유, 예의 등등. 사실, 선배라는 개체가 이 모든 것을 갖춘 완벽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 또 그렇게 될 수도 없다. 그렇지만 회사 생활을 하면서 일 잘하고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좋은 선배'가 되어 보려는 목표도 한번쯤 가져 보면 어떨까 싶다. 좋은 선배가 나쁜 선배 보다 연봉이 더 높은 것도 아니지만 대신 돈 보다 더 값진 것들을 얻을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누군가 좋은 선배가 되는 게 뭐 그리 어렵나 생각할 수 있겠지만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연차를 먹을수록 일을 잘하는 것 보다 좋은 선배가 되는 게 훨씬 더 어렵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회사원들이 늘 하는 말이 있다. '좋은 선배가 회사를 일찍 떠나더라' 이젠 좀 바껴야 되지 않을까? '역시 좋은 선배가 회사에서 승승장구 하더라'로. 좋은 선배가 더 잘되는 그런 시대가 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정언명령에서 "나 자신이든, 다른 어떤 사람이든, 인간을 절대로 단순한 수단으로 다루지 말고 언제나 한결같이 목적으로 다루도록 행동하라"라고 말했다. 모든 선배는 후배였던 적이 있고 모든 후배는 언젠가 선배가 된다. 수단이 아닌 목적, 본연의 역할과 그에 맞는 품격으로 서로를 대할 수 있기를. 이렇게 이상적인 말들을 잘도 나불대는 나 역시 아직 제대로 된 선배가 되려면 한참 멀었다. 한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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