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철현 Mar 11. 2024

행운의 777번 버스

직장인의 출근길, 행운과 비운의 변곡점

나의 출근길은 집 앞에서 버스를 타고 사당역까지 가서 2호선을 갈아타고 회사가 있는 선릉역까지 가는 경로다. 약 1,500 걸음, 총 1회 환승, 사람이 너무 많아서 평균 3~4회 다음 지하철 기다 포함해 약 50분 정도가 소요된다. 출근길은 역시 똥줄 타게 바빠야 제맛이라 나는 매일 아침마다 맹수에 쫓기는 목도리도마뱀 마냥 허둥지둥 뜀박질을 한다. 일절 계획하지 않은 이 비자발적 유산소 운동은 퍼질러 잘 거  자 놓고 떻게든 지각만은 피하고자 하는 필사적인 몸부림이자 반복되는 시간의 대물림이다. 


아이고~ 힘들어.  때마다 '내일부턴 진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지' 다짐을 하건 어찌 된 일인지 일 년 내내 렇게 고 있다. 그렇다고 달리기 하나로는 쏜살같은 시간을 다 쫓아갈 수 없기에 나는 비용과 시간, 탑승 동선 안락함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최적의 경로를 다. 지하철-지하철 조합 보다 버스-지하철을 선택한 것도 수개월에 걸쳐 치밀한 발고리즘으로 계산된 결과다.


집과 사당역을 오고 가는 버스는 대략 열 대 정도 되는데 그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버스는 777번이다. 트리플 세븐. 번호 자체가 안 타고는 못 배길 정도로 매력적이다. 가히 대중교통계의 팟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도박 중독은 국번 없이 1336)? 돌침대도 별이 다섯 개가 좋다고 하듯이 이 버스도 이마에 럭키 세븐이 무려 3개나 박혀 있으 타기만 하아침, 점심, 저녁으로 좋은 일이 생길  같다.


그래서 나는 한 번에 여러 대의 버스가 오면 일부러-맨 뒤에 서 있더라도-777번을 골라 탄다. 한량처럼 무조건 재수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 기왕이면.. 근데 재밌는 점은 사람의 마음이란 게 다 비슷한지 나처럼 777번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은근히 많다는 것. 앞차 놔두고 왜 다들 뒤로 오냐구요오? 특히, 이 버스는 배차 시간도 25~30분이라  시간에 겨우 두세 대만 운행되는데 그 드문드문한 등장이 777이란 숫자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심지어 위에 사진에도 알 수 있듯이 777번은 못 받은 돈도 받아준다).


내가 777번 버스를 타는 건 한 달에 고작 한 두 번 되려나? 버스정류장에서 저 멀리 777번이 보이 암울한 주식차트에서 양봉이라도  것 마냥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주식 중독은 등짝 스매시가 약).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된다 했으니 그럴 때마다 아내에게도 이 별 거 아닌 희소식을 꼭 알린.

' 방금 행운의 777번 탔어. 오늘 좋은 일이 있으려나 봐!'

'왜 아침에 쓰레기봉투 안 버렸어?'

'...날씨 참 좋다.'

(참고: 부부들은 보통 자기 할 말만 한다.)


아무튼 이런 얘기를 꺼낸 이유도 777번을 타면 그날은 진짜 하루 일진이 잘 풀리기 때문이다. 봄꽃이 흐드러지게 핀 4월의 어느 날, 나는 운 좋게 777번을 다. 오예! 마침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던 음악도 이 타이밍에 들으면 딱 좋겠다 싶은-나의 봄날 플레이리스트인-Russian RedFuerteventura 넘어갔다. Vamos! 777번은 다른 버스들보다 평균 시속도 빨라 출근 시간이 최소 7분은 앞당겨지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그렇게 신나는 마음으로 사당역에 내렸는데 신기하게도 횡단보도 신호등이 단번에 바뀌더니 웬일로 지하철역에 사람도 많지 않아 하나 건너 바로 차를 탈 수 있었다.


심지어 세 정거장을 남겨두고 자리에도 앉았다. 생각지도 못한 연속된 행운에 마치 내가 지금 영화 <트루먼쇼>의 연출 속에 있는 건가라는 착각이 들었다. 실, 아침에 핸드폰 세 번째 알람의 두 번째 반복 때 겨우 일어난 터라(이 정도면 알람이 대체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오늘 꼼짝없이 지각이다 싶었는데 777번이 고맙게도 출근길 큐패스 신공을 부려 준 것이다. 8시 58분, 아슬아슬하게 사무실 도착! 도루를 성공한 야구선수의 기분이었다.


회사에 와서도 기분 좋은 일은 계속 이어졌다. 메일을 열어 기사 스크랩을 확인했더니 지난주에 피칭했던 보도자료가 면탑 기사로 대문짝 만하게 나와 있었다. 매일 아침 게재된 기사가 업무 성적표인 홍보맨으로서 이는 A+를 받은 거나 진배없었다. 불끈 쥔 두 주먹을 짤랑 흔들며 혼자 세리머니를 했다. 룰루랄라. 여기서 끝이었으면 말도 안 꺼냈다. 오후에는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그동안 짬짬이 써 왔던 에세이 원고를 여러 출판사에 투고 중이었는데 그중 한 곳에서 미팅을 하자고 메일이 온 것이다. 어머머~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볼을 열 번 꼬집어 봤는데 열 번 다 아팠다. 아플수록 헤벌레 좋았다. 그토록 바라고 바랐던 인생의 버킷리스트가 이뤄질랑말랑 하는 황홀한 순간이었다. 믿을 수 없어! 출간이라니..  ISBN에 등록된다고?(그냥 한 번 만나자고 했지. 아직 책을 내주겠단 말은 안 했는데 김칫국 야무지게 드링킹 해주시고) 아이고 하나님 아버님, 부처님, 용왕님, 산신령님, 짚신, 고무신, 그리고 777번 기사 아저신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얼마 후 나는 이런 777번의 행운으로부터 매몰찬 배신을 당하고 만다. 777번의 행운 포텐이 터지고 약 열흘쯤 지났을까? 나는 다시 한번 출근길에 777번을 타게 됐다. 이게 웬일이지? 앞서 너무 달콤한 하루를 보냈던 터라 그날은 정말 아무런 기운과 전조도 없었는데도 뻔뻔하게 그에 준하는 행운을 은근 기대했다. 하지만 회사에 도착해 오전을 넘기고 늦은 오후가 되도록 딱히 호르몬 수치가 출렁댈 만한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무소식이 희소식, 무자식이 상팔자, 무탈한 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이지.


그런데 퇴근 무렵 부산에 계신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들아. 아부지가 쓰러져서 방금 응급실에 왔다. 의사 선생님이 바로 입원해야 된다카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평소 지병이 있던 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된 것이다. 애써 침착하려 했지만 감당하기 힘든 소식이었다. 나는 퇴근하자마자 KTX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이상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내가 아는 777번의 행운 공식이 이러면 안 되는데.. 창 밖의 깜깜한 풍경만큼이나 내 마음도 침울하고 복잡해졌다.


다행히 아버지는 안정을 찾으셨고 한동안 입원한 채로 상태를 계속 지켜보기로 했다. 불안했던 마음은 침상에 누워서 뭣하러 내려왔냐고 화를 내시는 아버지와 그 옆에서 말없이 사과를 깎고 계신 어머니를 보면서 차츰 누그러졌다. 777번에 대한 미움과 원망도 일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됐다. 나는 그날 늦은 밤까지 아버지 옆을 지키다가 다음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두서없이 옛날 얘기를 하시다가 사람의 일이란 자기가 하기 나름이면서도 그게 또 마음처럼 다 되지 않는 거라고 했다. 그러니 그냥 물 흐르듯 두라고.. 시시콜콜한 잔소리들 중에 유독 그 말이 귀에 들어왔다. 실존주의와 운명론이 오묘하게 섞인 아버지의 철학에 수긍과 심득이 갔다.


뒤로 나는 777번 버스를 마주했을 때 헤어진 여자친구처럼 무덤덤하게 대했다. 이전처럼 특별히 반가워하지않았고 그렇다고 특별히 외면하지도 않았다. 그동안 내가 겪은 행운과 비운은 나의 허튼 집착이 만들어 환상일 뿐이란 깨달았기 때문이다. 돌아보니 777번을 타든 말든 그날의 운세는 나의 태도언행이 만들어 가는 것이었그 외의 일은 나의 통제 밖에서 결국 일어나게 되어 있었다. 바보처럼 나 스스로 번민을 만들 필요가 없었는데..


내가 777번 버스에 부푼 마음을 실었던 것처럼 누구에게나 행운과 비운의 변곡점을 결정짓는 자신만의 일상 주술이 한두 개쯤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재미가 되기도 하고 가벼운 습관이 되기도 하도 지독한 징크스가 되기도 한다. 그 부질없는 일도 사람과 상황에 따라 장단이 될 수 있으니 좋고 나쁜 건 굳이 따질 수 없겠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그런 간절바람들이(유치하다 해도 별 수 없어요.) 차마 버리지 못하는 소품들처럼 날로 쌓여만 는 것 같다. 그건 아마도 한 해 한 해 살아가면서 자꾸만 여리고 부족한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 한계를 어쩔 수 없이 인정하게 되면서 나타나긍정의 자의식이 아닐는지. 


세상살이는 어쩌면 바위에 계란 치기라 하루쯤은 내가 연약한 계란이 아니라 깨지지 않고 빛나는 다이아몬드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출근길 주술은 내가 가진 능력그보다는 훨씬 높은 나의 기대와의 괴리감을 조금이라도 좁히려 스스로 생성한 일회용 신앙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작고 미약한 나를 들었다 놨다 하는 초자연적인 힘에라도 기대 보려는 밑져야 본전의 심리. 직장인에게 그마저도 없으면 어떻게 이 힘든 하루를 버티겠나. 나는 내일의 777번 버스를 또 기다린다. 단, 그리 큰 의미는 두지 않기.

매거진의 이전글 후배의 이직과 선배의 품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