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출간 작가 되기! '중글마'를 기억하세요!

<어쩌다 편의점> 역주행 출간기 4편(집필)

by 유철현

나에게 책을 내고 싶다는 생각은 언젠가 대항해를 떠나겠다는 원대하지만 막연한 꿈과 같았다. 그것은 활자를 제대로 읽기 시작한 어릴 적부터 나의 버킷리스트였으나 나이를 먹을수록 정신없이 바쁜 생활과 그 보다 진한 감도의 나태함에 묻혀 점점 삶의 후순위로 밀려났다. 매년 연말연초 결심의 소생기 때 글을 써보겠다는 구상을 해봤지만 매번 작심삼분이었다. 뭘 쓰나, 언제 쓰나, 어떻게 쓰나 생각하다가 배에 오르기도 전에 멀미가 났다. 어지러우니까 일단 내일 생각하자. 그렇게 한 달, 일 년, N 년.. 책 한 권 써보리란 나의 바람은 단념과 망각 속에서 이번 생엔 영영 물 건너가는 듯했다. 내가 생각한 대항해는 이런 게 아니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회사에서 10년 근속이라고 감사패를 받았다. '헉, 벌써 10년이라니.. 말도 안돼! 아직 신입 같은데..' 심리 나이 20대에 멈춘 칠순 할아버지가 된 기분이었다. 직장인 10년이라는 타이틀은 나에게 뿌듯함 보다는 뭔지 모를 회한과 불안으로 다가왔다. 감사패는 집에 들고 가다가 중간에 그냥 버릴까 싶을 정도로 오지게 무거웠으나 한 명의 직장인으로서 10년이란 시간의 무게는 한없이 가볍게 느껴졌다. 반추해 보니 그동안 고 웃고, 걷고 뛰고, 내리락 오르락 나름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그 소중한 기억들이 다 휘발되어 연흔만 남아 있었다. 이대로 보내기엔 너무 아쉬웠다. 조금 늦었지만, 더 늦기 전에 직장인 유철현의 지난 10년을 기념하고 싶었다.


그때 떠오른 게 바로 나의 너덜너덜 버킷리스트, 책 한 권 쓰기였다. 그런데 나 같은 쭈구리도 글을 쓸 수 있을까? 이런 고민에 한창 빠져 있을 때 아내가 말했다.

"그냥 시작해 봐! 돈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오빠는 매일 글(회사 보도자료) 쓰는 일을 하지만 정작 오빠 글을 써 본 적은 없잖아."

돈 들어가는 일도 아니라는 아내의 말에 오히려 돈을 번 것 같은 환급 용기가 불끈 솟았다. 문득 어느 여고에서 노총각 선생님이 정했다는 급훈이 생각났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너의 대학, 나의 결혼.' 나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나의 집필. 나의 출간.


그런데 무슨 얘기를 써볼까? 뭐 쓰지? 음.. 뭐가 좋을까? 하다가 한 글자도 못 썼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났다. 아.. 이라믄 나가린데.. 고심하는 나에게 아내가 또 말했다. "편의점 써. 편의점. 돈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돈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의 두 번째 복음. 옳거니! 나는 편의점에 대해 쓰기로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10년 넘게-지금도 그렇고-편의점이란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 말인 즉, 지면에 털 깨알 같은 얘기가 많다는 거. 편의점 홍보맨으로서 우리나라에서 편의점을 제일 잘 아는 사람 비공인 최소 열 손가락 안에 꼽히지 않으려나 하는 건방진 생각도 솔직히 조금 있었더랬다. 독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봐도 길거리에서든, 브런치에서든, 서점에서든 요즘 편의점은 못 참지!


나는 초보 작가였지만 글을 쓰기 전 편의점 회사 직원 답게-어쩌면 초보 작가였기에 더욱 더-책을 하나의 제품으로 여기고 '책의 품질'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초보 작가라고 책도 초보 같으면 누가 읽겠나? 아니, 아예 출간이 안 되겠지. 물론, 그렇다고 나 같은 평민이 책의 품질을 가늠할 능력은 없었기에 기성 작가들의 책들을 연구하며 기준점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 분량부터 구성, 흐름, 문장 등등. 그리고 여기에 나만의 개성을 담는 것에 가장 중점을 뒀다(나중에 편집자님이 말씀하시길 이 글은 이 작가 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와 분위기를 담고 있는가가 픽의 이유가 된다고 했다). 나는 편의점을 소재로 하지만 우리의 일상으로 확장되는 보편적인 글을 쓰고 싶었다. 유쾌하지만 가볍지 않으며, 따뜻하지만 무겁지 않으며, 침대든 책상이든 방바닥이든 편의점처럼 늘 독자 곁에 가까이 놓여 있는 책.

밀리의 서재에도 등장! 1600개가 넘는 서재에 담겨 에세이 인기 도서와 밀리 픽에도 선정. 30대 여성 독자 분들이 많이 읽고 있어요.

그렇게 책을 낼 결심을 하고 나는 주로 출퇴근 버스와 지하철에서 핸드폰으로 글을 썼다. 집중이 잘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회사 일과 가사, 육아를 본업으로 하다 보니 이때가 아니면 현실적으로 도저히 글 쓸 시간이 없었다. 왕복 2시간 남짓한 출퇴근 여정이 하루 중 나에게 허락된 유일한 집필 시간이었다. 애초 대항해를 떠나리란 각오를 되새기며(의 배가 거함은 아닐지언정 콩나물시루 대중교통일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속이 울렁거려도 필사적으로 그리고 꾸준히 글을 썼다. 선릉역에 내려야 되는데 한 정거장 지나쳐 삼성역에 내려 지각한 일도 있었다.


집필은 아내가 마침 딸아이를 임신했을 때부터 시작한 터라 나 역시 임산부의 마음으로 글을 써 나갔다. 아내는 딸의 출산과 나의 출간이 같은 해에 성사된다면 출산 동기가 될 거라며 독려해 마지않았다. 주말에 내가 방에 틀어 박혀 출퇴근 길에 쓴 글들을 다듬고 있으면 아내는 슬며시 들어와 모니터를 가리키며-마치 태아 초음파 화면을 보듯이-‘이 아기는 몇 주 됐어요?(언제 마감?)’, ‘태명(가제)은 뭐예요?’, ‘출산 병원(출판사)는 정했어요?’라며 실없는 질문을 쏟아 냈다. 가뜩이나 글도 안 써지는데 이러쿵저러쿵 하도 시어머니처럼 굴어서 내가 더 심한 입덧에 시달렸다. 그렇게 계절이 하나둘 바뀌고 글이 쌓여 가자 나의 서랍도 제법 묵직한 태가 나기 시작했다.


도중에 너무 힘들어서 포기할까도 생각했다. 그런데 글이 책의 약 절반 분량인 스무 꼭지를 넘어서자 그동안 써 온 시간과 노력이 아까워 중단할 생각이 쏙 들어갔다. 오히려 더 힘을 내자는 의욕이 생기고 속도가 붙었다. 이렇게 집필도, 인생도 보이지 않는 어떤 마의 구간을 넘기면 곧 순풍에 돛을 다는 때가 온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금질의 힘인지 글을 쓰면 쓸수록 글의 퀄리티도 조금씩 더 나아짐을 느꼈다.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그건 또 다른 고난이었다. 이전에 쓴 글들이 도저히 봐줄 수가 없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모두 새로 뜯어고치기로 했다. 흰머리가 핵구름이 되고 다크서클이 눈물이 되었지만 당연히 그래야만 했다. 리셋. 이때 두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출근할 때 포기하지 말자, 퇴근할 때 포기하지 말자를 하루의 열고 닫기로 되뇌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대망의 마지막 글의 마침표를 찍은 날 밤, 나는 쉬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 거의 2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계산을 해보니 2.5주에 글 1개를 쓴 셈이었다. 태부족한 시간과 유리병 같은 저질 체력, 나약한 정신력으로 일궈낸 인간 승리였다. 그 감격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열악한 여건과 부족한 자질에도 이 집필의 시간을 버티게 해 준 건 '중글마'였다. 중요한 건 글을 쓰겠다는 마음! 지치고 힘들 때마다 중글마가 나의 잠을 깨우고 나를 일으켜 세웠다. 처음엔 책을 내겠다는 목표로 무작정 글을 썼지만 어느 순간 그 목표보다는 나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그 과정에 흠뻑 빠졌던 것 같다. 고된 여행 속에서 대항해의 목적지 보다 내가 지금 떠 있는 바다를 진정 사랑하게 된 것이다.


중글마 덕분에 정말 많은 걸 배웠다. 생각은 넓어졌고 내면은 단단해졌으며 무엇보다 평소 무심코 지나친 소소한 일상의 소중함을 알게 됐다. 글이 나를 괴롭혔지만 글이 나를 안아주었고 그런 글이 생전 가보지 못한 새로운 곳으로 나를 데려다주었다. 그 속에서 만난 고마운 분들에게 받은 은혜는 또 어찌 갚아야 할까? 나는 과연 앞으로 또 이런 대항해를 떠날 수 있을까? 여전히 모자람이 많아 머뭇거리게 되지만 결국 그 답은 (카페인 보다) 또 중글마가 될 것이다.



*여성동아(5월호) 인터뷰 ▶ “트렌드 잘 파악하는 젊은 점주들, 장사도 잘해요” 유철현 BGF 홍보팀 수석|여성동아 (donga.com)


*톱 클래스(5월호) 인터뷰 ▶ BGF리테일 CU 수석 유철현 < 사람들 < 매거진 < 기사본문 - 톱클래스 (chosun.com)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