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울을 잘 모른다. 어젯밤 도산대로를 따라 집으로 걸어오다 수직으로 솟은 육중한 건물을 정신없이 바라봤다. 푸른 밤 배경을 등지고 한없이 직선으로 뻗은 포도가, 무수한 간판의 불빛이 나를 여전히 낯섦으로 짓눌렀다. 이 곳을 몇백 번은 걸었을 테지만, 나는 여기에 누가 사는지 알지 못한다.
미얀마 따웅지 시장에서 엄마가 밥을 지을 때 넣으면 맛이 좋겠다며 옥수수알이며 강낭콩 같은 걸 자꾸만 사셨다. 여행 중 들르는 도시마다 시장을 갔는데, 또 여기는 토마토가 싱싱하다며 해사하게 웃으셨다. 아직 여행이 며칠이나 남았는데, 그걸 다 배낭에 욱여지고 다녀야 한다고 엄마를 타박했다. 엄마가 홀린 듯 시장을 헤집고 돌아다니실 때 강낭콩이며 토마토가 든 봉지를 들고 쫓아가다가, 혼자 하는 여행에 길이 든 데다 역시 부모님과 하는 건 더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따야띠와 파인애플, 그리고 이름 모를 단내 나는 과일을 앞에 깔고 파리를 쫓는 상인들의 게으른 손짓을 보았다. 그 밑에는 더 게으른 개들이 바닥에 누워 갈비뼈만 오르락내리락 움직였다.
열대 지방의 시장은 덥고 거친 숨을 내뿜으며 살아 있었다. 시장을 가득 메운 끈적하고 무거운 습기는 큰 포유류가 내뿜는 호흡과 닮았다. 그곳은 크고 털이 듬성한 원시 코끼리처럼 느리고 긴 숨을 쉬고 그 생명체의 체온에 섞이는 감각은 지루함과 외로움을 잊게 했다. 나는 여기에 누가 사는지 여전히 알지 못하지만 그것은 익숙한 느낌이다.
나는 아직도 말 통하는 이 하나 없는 외국에서는 고독이 쉬이 느껴지지 않는지, 왜 마음의 빈틈으로 외로움이 쇄도할 때마다 배낭을 꾸렸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다만 낯섦과 편함의 간극이 빈도로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만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