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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기대를 채워야 하는데,

by 이하늘

새로운 회사에 적응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너무나 모자란 나를 마주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려운 일도 다들 척척 해내는 것만 같은데,

나는 이 쉬운 일 하나 해내지 못해서

몇 번이고 피드백을 받아 수정에 수정을 거치고


같은 프로젝트를 하는데

다들 어쩜 저렇게 정돈된 아이디어를 가져오는지...

제 발표 순간에 다들 아무것도 적지 않는 게 느껴지면,

'아 이번에도 내가 길을 잘못 들었구나' 싶어서 말이 빨라지고, 목소리가 작아집니다.


그리고 계속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사람들의 기대치를 채워야 하는데'

하지만 우리 팀의 그 누구도 나에게 당장 좋은 결과물을 내라고,

빨리 색다른 인사이트를 내오고, 일인 분을 하라고 채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천천히 나만의 속도로 일하고, 적응하고, 배우면 된다고 말해주는 쪽이었죠.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 말 뒤에 기대가 숨어있을 거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선배가 아무리 나에게 괜찮다고 말해줘도, 나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온 지 반년이 지나 첫 회식,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느끼는 부담감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잘하라고 하지 않았지만, 만약 기대한다면? 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선배는 또다시 괜찮다고, 몇 번이고 말했지만 또 말해주자면 그냥 나대로 일하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선배도 말했습니다. 사실 그 마음은 자기가 만족해야 해결된다고.

그때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느낌이었지만, 약간 술이 들어가 그게 정확히 뭔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주말. 카페에서 햇볕 시간을 가지며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선배는 왜, 남이 기대하는데 내가 만족해야 해결된다고 했을까? 나는 왜 깨달은 느낌이었지?

그리고 다시 머리를 맞은 느낌.

이 기대치는 사실 남이 나에게 바라는 기대치가 아니라,

내가 나에게 거는 기대구나.

그런데 이걸 내가 감당하지 않고,

'남이 나에게 기대할지도 모르니 해내야 한다' 라고 생각하는 건 얼마나 비겁한 일인가요?

상대는 가만히 있다가 내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제 정확히 해야겠습니다.

이 부담을 만드는 건 나라고, 내가 나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고.

어깨에 누가 얹은지 모를 뭔가 가득한 줄 알았는데, 제 스스로 어깨를 누르고 있는 꼴이었습니다.

이제 그만 팔을 떼고, 어깨를 한번 주물러줘야겠습니다.

이거 참 머쓱하지만, 그래도 이 고통이 내가 바뀌면 해결되는 일이라니 참 다행이죠.


겨울입니다.

온 힘을 다해 움츠리느라 몸이 굳기 좋은 계절이지만,

제 마음은 조금 느슨해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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