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언어로 착지.

황현산의 <밤이 선생이다>를 읽다가 떠오른 생각

by 김담요

어젯밤에는 황현산의 산문집을 읽다가 잠이 들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들을 잘, 읽기 좋게 펼쳐 놓은 책이었다. 연륜 있고 능력 있는 저자의 글이란 이렇게 쉽게 읽히는 것이라며 감탄했다.


불문학에서는 무엇을 배우냐는 글에서는 프랑스어 시간이나 불문학 시간에 느꼈던 프랑스어 특유의 분위기가 떠올랐다. 비록 불문학을 깊이 파고 들어가서 그들의 정서를 파악하고 공감하며 읽기에는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나도 모르게 느끼게 되었던 프랑스어와 그것을 오랫동안 써왔던 사람들이 자아내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우리 말에서도 그러한 향기가 존재한다. 이 작은 땅덩이에서 오랜 세월을 버텨내 주어서 참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 읽은 글 중에서는 대학에서 영어로 강의하는 것에 대해 우리 말의 전통성과 사고방식을 잃은 강의가 될 수 있어서 인문학이 갈 곳을 잃을 것이라고 우려했던 글이 떠오른다.


한 집단이 오래 사용해온 언어, 이를테면 모국어는 그 사용자들의 생활과 문화 전반에 걸쳐 측량할 수 없이 많은 경험을 축적하고 있다.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중)


한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추측할 수 있듯이 언어를 보면 그 집단의 사고방식을 잘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글을 쓸 때마다 자주 쓰게 되어 신경이 쓰이는 "생각이 든다"는 표현은 내가 얼마나 수동적이고 주체가 되기를 회피하는지를 보여준다. 생각을 한다는 것도 아니고 내 머리 속에 생각이 들어왔다고 계속 쓰고 있는데 이는 내가 능동적으로 사고하기 보다는 갑자기 머리에 담기게 된 생각을 꺼내어 보여주고 싶고 그것에 대하여 나의 선택이 아니고 나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식의 태도이다. 이렇게 사소한 사고방식이나 정서를 그대로 담아내는 것이 언어라서, 한 나라의 언어는 그 나라 사람들의 수많은 사고방식을 여과 없이 담아낸다.


한 발 더 나아가 우리가 가장 많이 쓰게 되는 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초등학교 입학해서 학교에서 배운 일기 쓰는 방식은 우리의 글쓰기 양식을 지배하는 것 같다.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랬다. 학창시절 나의 일기들은 내 자신만의 공간이 아니라 선생님에게, 또는 부모님에게 공개될 텍스트였기 때문에 내가 느낀 것을 쓰면서 항상 반성과 개선 의지에 대한 글을 써야 했다. 일기를 쓰면서 순간을 지나오는 느낌보다는 경험에서 얻은 깨달음을 일기에 쓰는 것을 중시했는데 나의 깨달음은 어른들이 나에게 가르쳐준 도덕적 기준에 비추어 보았을 때 나의 행동이나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판단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래서 나의 일기장은 도덕적 또는 규범적으로 올바른 아이의 모습이 되고자 하는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오늘의 경험을 쓴 뒤 내일부터는 이렇게 해야겠다, 오늘 같이 살지 말고 더 노력해야겠다는 말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 시점에서 나는 내가 아닌 내가 되어버렸다. 오늘을 살아온 것도 내가 최선을 다해 살았던 것인데 나는 그것을 무시하고, 심지어 경멸하면서 옳지 못하고 부족한 사람이라고 판단을 내리면서 내일부터는 그와 다른 사람이 되겠다고, 진심인지 가식인지 모를 결심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래서 나는 내 자신을 사랑하고 내 속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나를 채찍질하고 하루 하루를 후회하는 아이가 되었다. 그래서 항상 타인 앞에 서면 잘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주눅이 들고, 선택의 갈림길 앞에서는 잘못된 선택을 할까 봐 주도권을 다른 사람에게 던져버리는 것이 버릇처럼 굳어져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뿌리와 나 자신을 잃은 듯한 기분을 종종 느끼는 것은 아마도 나만의 언어가 어느 곳에서인가 멈추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기를 쓰면서 나의 이야기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썼던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아마도 나는 나와 극심한 단절감을 느꼈지만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으리라. 이제라도 내 안의 뿌리를 찾아야겠다고 나선 것이 다행인 것 같다. 이제 갓 글쓰기를 배우고 일기장의 첫 장을 넘기고 있는 수 많은 아이들도 반성의 일기 보다는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관찰하고 충분히 느끼는 일기를 쓰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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