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3.7 꾸미야 안녕
우리 집에서 나의 직장으로 최단거리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타고 출발할 때, 길은 한 가지로 정해져 있다. 그런데 꼭 다른 방향을 택하는 택시기사들이 있다. 그리고 꼭 내가 혼자 택시를 탈 때만 그들을 만나게 된다. 승리와 함께 탈 때는 신기하게도 10번이면 10번 도착지를 말하기만 하면 가장 빠른 길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간다. 내가 혼자 택시를 탔던 어떤 날, 택시기사는 매일 이 길을 다닌다는 나한테 계속 다른 길(더 먼 길)이 더 빠르다고 주장했다. “돌아올 때는 저쪽으로 가 보세요. 아가씨가 몰라서 그래요” 하고 맨스플레인을 시전했다. 10분 가량의 짧은 시간 동안 내가 매일 다니는 길에 대한 오늘 처음 보는 아저씨의 설명을 들어야 하다니. 이거 실화냐.
오늘, 택시를 잡아 타고 S병원으로 가자고 했다. 돌아가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어느 정도 온 상태였다. “기사님, 저쪽 방향이 빠른데요” 했더니 “그럼 돌아갈까요?” 한다. 이미 왔으니 그냥 가자고 했더니 “허허허” 웃는다. 웃음이 나오시는지...? 나는 교양있는 시민이기에 꾹 참고 한참을 가는데, ‘D역’을 향하는 도로표지판이 한참만에 나타나자 더 참을 수가 없었다. “기사님, 아까 그쪽으로 가셨으면 더 빨랐을 텐데요” 내 모든 신경질을 끌어모은 어조로 말했는데 대답이 없다. 도착할 때까지 한숨을 푹푹 내뱉고는 인사도 하지 않고 내렸다.
분노를 강제 풀충하며 내가 S병원에 간 것은 내 친구 희진이와 갓 태어난 아가를 보기 위해서다. 현재의 기분은 더러운데 꾸미를 만나는 것은 설레는 모순된 상황. 꾸미를 만나기 위한 경건한 마음 자세를 위해 빨리 분노를 가라앉혀야 한다. '별것 아닌 작은 일이야' 생각하며 예슬이 지윤이를 만났다. 병실에서 잠깐 기다리자 환자복에 두꺼운 니트 가디건을 걸친 희진이가 수유를 마치고 돌아왔다. 아가를 볼 수 있는 허용된 면회 시간은 1시에서 2시. 우리에게는 아직 40여 분이 남아 있었다.
신생아실 유리를 통해 드디어 꾸미가 보였다. 아가는 너무 조그마했다. 이 분탕질로 얼룩진 세상과 전혀 상관없는, 그러나 자연의 섭리에 따라 방금 이 세상에 내보내진 조그만 아가. 인간을 천사라고 칭할 수 있는 아주 짧은 시기에 있는, 아가는 정말로 천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도 저렇게 작고 꼬물대는 아가였다는 생각과, 희진이가 이 너무 조그마한 살아 움직이는 인간을 낳았다는 생각에 기쁨과 경외감과 두려움이 한꺼번에 엄습했다. 지윤이도 마찬가지 기분이었던지 희진이에게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했다. 아가는 입을 오물대고 배냇짓(희진이가 그게 배냇짓이라고 알려줌)을 하면서 가끔 눈을 떠 보려고도 했다. 얼굴을 귀엽게 찡그리기도 하고 한번 예쁘게 활짝 웃기도 했다. 엊그제 세상에 나온 꾸미는 작은 표정 하나로도 우리의 심장을 쥐락펴락. 우리가 한참 사르르 녹고 있을 때, 간호사 선생님이 이제 꾸미가 밥을 먹어야 한다고 데려갔다. 20여분이 벌써 후딱 지나갔는데… 희진이는 꾸미가 밥을 잘 안 먹어서 황달기가 심해졌다고 했다. 지윤이와 나는 밥을 먹는 꾸미를 계속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리의 시선이 부담스러우셨던 간호사 선생님이 가 보셔도 된다고 손짓을 해서 쫓겨(?) 나왔다.
'2018년 3월 13일 12시 58분 나의 세상이 한번 더 바뀌었다. 6시간 극심한 진통이 끝나고, 나의 생명을 나눈 아이가 태어났다. 발버둥, 입술, 숨소리 하나하나 너무나 신기하고 예쁘기만하다. 요 작은 아가 하나만큼은 세상 어떤 위험에도 지켜내야지. 부족함 없이 사랑해줘야지.'
희진이가 아가를 낳은 날, 그녀가 인스타에 쓴 글을 보고 울컥했다. 묘한 기분이었다. 희진이는 이제 엄마가 되는 새로운 경험을 하고, 이제껏 가 보지 못한 세계로 불쑥 한 발을 내딛었다. 그것은 이제 다시 무를 수가 없는 길이다. 희진이의 그 글은 희진이가 이제까지와 조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말해 주는 듯했다. 자기 말고 또다른 생명을 책임지는 사람이 되었다고. 그리고 희진이는 그 일을 잘 해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그런 희진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왜 이 예쁜 아가를 보러 가는 날 하루의 시작이 분노로 얼룩져야만 했을까. 저녁에 아가의 이름이 지안이로 정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꾸미’였던 작은 아가는 이제 어엿한 이름을 부여받은 존재가 되었다. 지안이가 이 세상에서 만나게 될 많은 사람들이 지안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인간 사회에 태어나 살면서 상처 안 받고 살아갈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나와 친구들이 받아 온 많은 상처들이 이 조그만 아이에게 대물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과한 욕심일까.
지금은 얼굴도 작고 몸도 작고 눈도 코도 입도 작은 아가이지만, 지안이가 자라는 속도는 무섭도록 빠를 것이다. 지안이가 학교를 가고 친구들을 사귀고 사회에 나오고 사람들을 만날 때 그 세상이 지금과는 다른 곳이 되어야 한다고, 지안이가 나처럼 ‘작은’ 일에 분노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내가 아가를 낳지도 않았는데 어깨가 무거워진다. 이모가 ‘노오력’을 더 많이 해야겠다. 이모 혼자서는 안 되겠지만 이모처럼 생각하는 다른 이모들이 많이 있을 것이니까 조금의 희망은 있다. 맨몸으로 세상에 태어난 작은 아가의 삶에 책임이 있는 이는 엄마 아빠만이 아니라는 것을, 오늘 조그만 지안이를 보면서 비로소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