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을 다녀오며. 2019년 7월 11일의 글
혜화역 3번 출구를 드나드는 사람들은 아픈 사람들과 아픈 사람들을 돌보는 사람들, 그들을 방문하러 가는 사람들이다. 4번 출구와 3번 출구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그 두 방향으로 향하는 사람들은 다르다. 젊은이들, 연인들, 연극을 보러 온 사람들, 삶에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4번 출구로, 노인들, 아픈 사람들, 자신의 건강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사람들, 소멸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3번 출구로 향한다. 끝과 끝이다. 한쪽은 생의 에너지만이 가득한 곳이고, 다른 한쪽은 스러지는 육체와 죽음, 답하지 못할 질문들이 있는 곳이다. 그 두 길로 향하는 사람들은 서로 만날 일 없이 다른 속도의 걸음걸이로, 정반대 방향으로 향한다. 젊고 건강한 몸이 늙음과 죽음을 상상하지 못하고, 늙음과 소멸의 길로 접어든 사람들이 반대쪽으로 향할 일이 영영 없듯이. 나는 열일곱 살에 혜화역 3번 출구를 지나 병원을 드나들었다.
마침 어젯밤에 아니 에르노의 <사진의 용도>를 읽었다. 사랑의 행위 뒤에, 남겨진 옷가지들의 흔적을 찍은 사진들, 후에 그것을 보며 연인과 함께 쓴 에세이를 모은 책이다. 아니 에르노는 이 사진들을 찍었던 때에 유방암 치료를 받고 있었다. 밀려드는 죽음의 공기 한가운데서 삶의 가장 생생한 순간에 대해 썼다. 죽음의 한가운데서 남긴 생의 열망, 그 흔적들을 보며 작가는 존재의 사라짐과 상실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죽음은 언제나 삶 속에 그 흔적을 남겨 왔다는 것을 상기하게 된다. 그것을 인지하지 못할 때부터.
"처음 퀴리의 문턱을 넘으면서 단테의 문장이 떠올랐다. '이곳에 들어온 당신, 모든 희망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안에 들어가자 오히려 이상적인 장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늘날에는 그 실례를 찾아볼 수 없는, 미소를 띤 세심한 인간들이 약한 이들을 따뜻하게 돌봐 주는 곳." - 아니 에르노, <사진의 용도> 중에서
열일곱 살의 나는 그 병동에서 아마도 가장 어린 환자였을 것이다. 내가 있던 병동은 나이가 많은, 아픈 여자들 그리고 그들을 돌보는 여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파리한 맨얼굴의 레지던트 선생님, '예쁘고 착한 언니' 같다고 느꼈던 간호사 선생님들, 6인실 병실의 환자들과 간병인들. 대개 중년 이상이었던 그 환자들 중 다수는 민머리였고,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 모든 이들의 얼굴이 가만하게 떠오른다. 그 얼굴들 사이, 육체의 질병에 '걸려 넘어졌다' 생각하는 열일곱 살 나의 얼굴이 있다. 그때 나를 다독여 주었던 것은 그 병동의 여자들이었다. 새벽에 맥박을 체크하러 오던 간호사 선생님이 거기 있다는 것만으로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나는 나의 고통 속에 빠져 있었는데도, 밤에는 신음하는 옆 병상의 할머니를 위해 기도했다. 그것은 값싼 자기위안이었을까, 타인에 대한 연민이었을까, 아니면 둘 다였을까.
그 해 6월 수술을 할 때만 해도 검고 윤기가 흐르던 머리카락이 항암치료가 시작되자 우수수 빠지기 시작했다. 집안 모든 곳이 머리카락으로 가득 찼다. 사람의 머리카락이 빠져도 빠져도 머리에 아직도 한참 남아 있을 만큼 많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리고 암환자들이 왜 머리를 밀어 버리는지도. 그 해 6월까지만 해도 자라나는 젊음의 기운이 충만했던 나의 몸에는 커다란 수술자국이 남았고, 머리카락을 밀어 버린, 항암제 부작용으로 먹은 것을 게워내는 병약하고 피골이 상접한 아이의 모습이 되었다. 다행히도 그때 나의 어른들은 내가 몸에 남은 상처 같은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머리카락이 지금 있거나 없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한편 아이러니컬한 일이지만, 그때의 의료진들은 우리가 갖고 있는 편견과 달리 '여자아이'인 나의 몸에 남는 상처에 대해 거의 신경쓰지 않았던 것 같다. 내게 투여되던 항암제는 피부를 간지럽게 했고 그때 피부를 긁으면 그 긁은 자국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료진 누구도 말해 주지 않았다. 이것이 조금은 원망스럽다. 내가 피부가 가렵다고 하자 주치의 선생님은 가려움증을 완화할 수 있도록 바로는 로션을 처방해 주었을 뿐이었다. 내 몸에는 커다란 수술자국과 여기저기 긁은 자국들이 남게 되었다. 열일곱 살 이후 나는 '티없이 매끈한 피부(그런 피부의 실재 여부와는 별개로)'를 영영 잃어버렸다. 나의 어른들이 그런 면에서 현명했던 덕인지, 살아오면서 그것이 보통은 신경쓰이지 않았고, 아주 가끔은 작은 가시처럼 목에 걸리기도 했다.
그때의 나는 몸집은 자랐지만 실은 엄마를 떠날 수 없는 작은 아이였다. 엄마와 함께 처음 병원에 가던 때로부터 13년이 지났다. 내가 수술실로 들어가던 때 엄마가 많이 울었다고 아빠가 말해 주었었다. 나는 볼 수 없던 장면. 그런 장면을 떠올리면 고통스럽다.
나는 13년 동안 서울대병원 산부인과의 같은 의사선생님을 6개월, 1년 단위로 방문했다. 병원에 가서 의사 선생님을 보고 나면 간호사 선생님이 으레 다음 일정을 잡아 주곤 했다. 그리고 오늘, 이제는 정기적으로 병원에 오지 않아도 된다는, 1년에 한 번씩 가까운 병원에서 초음파만 찍으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나의 20대 전체를 아프지 않은 채로 늘 아픈 취급을 받으며, 아프다고 생각하며, 어쩌면 아플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왔다. 나이가 들어 가면서 아플 일도 아플 가능성도 늘어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병원에 그만 와도 된다는 말을 듣게 된 것이다.
오늘 마침 엄마도 서울대병원에 갈 일이 있다고 해서 엄마를 병원에서 만났다. 성인이 될 무렵부터 혼자 병원에 갔을 테니 엄마와 병원에 있는 것이 10년도 더 되었을 듯 하다. (그러고 보면 언제부터 엄마 없이 '혼자서' 모든 것을 하게 되었을까?) 내가 수납을 하는 동안 간호사가 서 있는 엄마를 부르며 '보호자 분-'이라고 말한다. 엄마가 내 보호자였던 13년 전이 새삼스럽다. 앞으로 엄마와 나 중 누군가가 서로의 '보호자'라 불릴 일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호칭이 될 텐데. 엄마는 오늘이 어땠을까? 나와 병원에 오래 함께 있던 그때를 어떻게 기억할까? 오늘, 13년 만에 비로소 내 인생의 한 막을 마친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나의 20대는 엄마로부터 떠나오는 과정이었는데. 그런 오늘 그 장소에 엄마가 함께 있었다는 것이 기쁜 일일까, 아픈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