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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 Apr 02. 2021

라부아지에 논증

라부아지에의 죽음과 법 앞의 평등, 이에 대한 공리주의와 계약론의 해석

1. 문제 설정


    근대 화학의 아버지로 알려진 라부아지에는 세금징수원으로서 저지른 부정으로 인하여 프랑스혁명 당시 사형당했다. 이 죽음에 대해서 혹자들은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수학자 조제프루이 라그랑주는 “이 머리를 베어 버리기에는 일순간으로 충분하지만, 프랑스에서 같은 두뇌를 만들려면 100년도 넘게 걸릴 것이다.”라고 논평했다. 실제로 그의 사후 그의 죽음이 부당하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라부아지에의 죽음은 ‘법 앞에서의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의 기초 원리와 연관되어 있다. 모든 개별자가 법 앞에서 평등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원칙이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의 죽음이 부당하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이 원칙에 반대되는 생각이 갖는 직관적 힘을 무시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의 원칙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이 생각을 부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죽음의 원형적인 논리구조에 대해서 윤리 이론들이 어떤 답을 내놓을지에 대해서 추론함으로써 그 윤리 이론들을 검증할 수 있는 준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계약론과 공리주의는 이에 대해서 어떤 답을 추론하는지 논증하면서 각각을 비교하려 한다.

    우선 라부아지에의 죽음의 논리구조를 살피기 위해서 실제 사례를 일반화할 필요가 있다. 실제 그의 죽음이 정당한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혁명 당시 권력의 정당성, 체포에서 처형에 이르기까지의 사법절차의 정당성, 사형 그 자체가 정당화될 수 있는지 여부 등을 고려하여야 한다. 그러나 나는 라부아지에의 죽음에서 상기한 것을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계약론과 공리주의를 비교하고 검증하기 위한 출발점으로써 그의 죽음이 갖는 논리적 구조를 대입해보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논의의 편의를 위하여 일반화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라부아지에 죽음에 대한 일반화를 진행해보자면 크게 세 가지 중심 조건명제가 도출된다.


첫째, 어떤 개별자 X가 공공의 이익에 일반의 개별자들보다 뛰어난 기여를 했으며 미래에도 그러한 기여가 지속 혹은 확대될 것이라 합리적으로 예상된다.

둘째, X가 한 해악 행위에 대한 처벌 규범은 동일한 행위를 한 다른 일반의 개별자들에게 일관되게 적용되었다.

셋째, 그 처벌이 X에게 적용될 경우, 그가 미래에 지속 혹은 확대할 것이라 합리적으로 예상되는 기여를 저지한다.


이 명제들과 함께 가정되어야 할 추가적인 조건명제들이 있다. 그것은 “처벌이 적용이 되든, 되지 않든 X는 그러한 행위를 다시 하지 않는다”이다.


2. 공리주의의 경우   


    먼저 공리주의의 경우를 보자.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X”를 의미한다. 공리주의 창시자인 벤담의 명제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은 까닭은 공리주의 전통 안에서도 다양하게 X를 변주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X란 옳음(right)보다는 좋음(good)에 가까운 속성을 성질이다. 즉, 어떠한 행위 혹은 규칙은 그것에 영향을 받는 모든 개별자들 중 최대 다수에게 최대 선을 구현할 때 정당하다. 다시 말해 그 행위 혹은 규칙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개별자들의 손해와 이익의 총합을 비교하여 결정된다.


    이제 논증에 들어가 보자. 라부아지에 논증에서 선택지는 1) 처벌, 2) 사면 혹은 가벼운 형이다. 선택지에 따른 효용은 두 가지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X가 미래에 지속 혹은 확대할 기여로 인한 전체의 이익과 피해자 혹은 피해자가 속한 집단의 형 집행에 따른 이익이다. 이 두 가지 영역의 양과 음의 값을 합산하여 전체의 총합이 양의 값을 갖는 선택이 윤리적으로 정당한 선택이다. 
   이때 앞서 가정한 것과 같이 X는 처벌 여부와 관계없이 그 해악 행위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X가 해악 행위를 반복해서 발생할 손해는 존재하지 않는다. X의 처벌의 경우 X가 미래에 지속 혹은 확대할 기여로 인한 전체의 이익은 양의 값을, 피해자 혹은 피해자가 속한 집단의 형 집행에 따른 이익은 음의 값을 갖는다. 사면 혹은 가벼운 형의 경우 그 반대다. 여기서 우선 중요한 점은 공리주의의 경우 과거에의 기여가 논의에서 배제된다는 것이다. X의 과거에의 기여는 X에 대한 처벌 여부로부터 발생할 효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공리주의는 사회에 기여한 것이 많기 때문에 그에게 보다 특별한 권리를 주어야 한다는 응분의 논리는 부정한다. 그러나 전체 집단과 피해자 집단의 이익을 비교한다는 점에서, 그 집단들 간의 크기를 비교해야 할 필요가 요청되고 이는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론을 도출한다.
   피해자 개인의 경우 전체 집단의 수에 압도당하므로 굳이 논의할 필요가 없다. 비교 대상을 피해자 집단으로 확장할 경우도 처벌로 결정된다는 것이 항상 도출되지는 않는다. 피해자가 속한 집단의 의미를 풀이하자면 직접적인 피해자와 같은 성질을 공유하는 집단이라 정의 내릴 수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들은 직접적인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 이들은 직접 피해가 아닌 간접 피해를 당하며, 그에 따른 처벌에의 권익 값이 높지 않다고 평가절하한다면 전체 집단이 X를 처벌을 하지 않아서 생기는 양의 이익 값에 압도당한다. 피해자 집단이 느끼는 간접적인 피해에 대하여 적절한 평가를 내림으로써 해결을 시도할 수도 있다. 그들이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억압과 차별의 대상이라면, 그들이 갖는 간접적인 피해는 단순한 불쾌감의 수준이 아니라, 그간의 누적된 역사적이고 집단적인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사회적으로 공격당할 수 있다는 실질적인 공포로 이어질 것이라 추론할 수 있다. 이때 처벌은 그러한 공격에의 저지이자 기본적인 보호의 제공 등의 의미를 지닌다. 그렇지만 이 경우에도 그리 효과적이지 않다. 많은 통계가 증명하듯이 피해 집단이 소수인 경우라면 전체 집단의 이익의 양의 값에 압도당한다.
    때문에 공리주의는 추가적인 원칙을 도입하는 방식으로 이를 해결해야 한다. 좀 다른 결이긴 하지만 우선 잠재성 논변부터 살펴보자. 잠재성 논변은 X의 미래의 기여는 잠재적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서 X가 발생한 것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통령 당선인이라 해서 우리는 그가 대통령의 권한을 행사한다고 생각하지도 허용할 수도 없다. 따라서 잠재성 논변을 받아들일 경우 피해자 집단의 만족만이 처벌을 결정하는데 유일한 고려 대상이 되며, 처벌은 정당화된다. 그러나 미래의 이익과 손해를 잠재성을 들어 논의하길 거부한다면 공리주의 자체가 성립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윤리론이 어떤 행위를 평가함에 있어서 그 결과에 대한 예측을 배제할 수 있는가? 더군다나 공리주의의 경우 어떤 행위의 작위와 부작위로 인한 이익과 손해를 비교하는 것이 그 핵심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잠재성 논변은 선택 가능한 대안이 아니게 된다.

    다른 방법은 규범의 일관성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즉, 규범이 일관되게 적용되어야 모든 이에게 이득이 된다는 것을 효과적으로 정당화하면, X에 대한 처벌도 따라서 정당화된다. 규범의 일관성을 정당화하는 첫 번째 방법은 상징성의 논변이 있다. 앞선 논의에서 배제되었던 가해자와 피해자의 권력 차에 주목하는 것이다. X에 대한 처벌의 완화는 특정한 피해 혹은 피해자를 국가가 나서서 조장하고 승인하는 상징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피해 집단을 넘어서 모든 이에게 해악으로 작용한다. 왜냐하면 위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위계에 속하는 모든 대상이 위계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떤 권익이 다른 권익에 우선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우선성 논변이 두 번째 방법이다. 즉, 어떤 권익은 기본적이고 근본적이어서 다른 권익에 우선하여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그 권익은 담지자가 다른 권익을 갖기 위해서 반드시 보장되어야 할 종류의 권익들, 예를 들면 생명권과 폭력으로부터의 자유 등이다. 이러한 권익의 침해는 압도적인 손해이기 때문에 설사 그 대상이 소수라 하더라도 전체의 이익을 압도한다.

    이상의 논의에서 공리주의의 경우 법 앞의 평등이라는 민주주의 원칙을 수호할 수 있음이 밝혀졌다. 하지만 결국 어떤 기본적인 권익도 다수의 보다 기본적이지 않은 그것과 항상 비교하고 입증되어야 한다는 약점이 드러난다. 잠재성 논변과 우선성 논변, 상징성 논변과 같은 추가적 원칙의 정당화를 위한 논변들도 항상 같은 결론을 도출할 것이라 보장할 수 없다. 이 논변들의 정당화가 실패할 경우, 우리는 앞선 전체 집단과 소수 집단의 크기 비교라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결론으로 회귀한다. 정당화가 된다 하더라도 기본적인 권익을 비교와 효용의 거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일단 어떤 기본적인 권익을 거래와 효용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거래와 효용의 계산을 통하여 승리하여야 탈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본적 권익에 대한 비교 시도들을 공리주의는 내포하고 있다.

  


3. 계약론의 경우


    계약론의 경우는 어떨까. 계약론은 합의라는 매개를 통해 윤리 규범을 정당화하는 이론이다. 이때 합의는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합의, 이해당사자들이 자신의 속성을 알고 나아가 그 속성을 가짐으로 인해서 발생할 자신의 이익을 알고 있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맺는 이기적인 합의가 아니다. 현실에서의 합의의 결과를 정당한 윤리 규범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합의가 윤리 규범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현실의 그것이 아니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합의에서의 이해관계의 반영과 그로 인한 전략적 동기를 제거해야 한다.
    사회를 설명하는 이론이었던 사회 계약설을 변형하여 계약론이라는 윤리 이론화시킨 존 롤즈는 합의에 특수한 장치를 추가한다. 바로 무지의 베일과 원초적 상황이 그것이다. 계약 참여자들은 무지의 베일에 의해서 자신의 속성을 알지 못한다. 때문에 그 속성을 가짐으로 인해서 발생할 특정한 이익 또한 알지 못한다. 좇을 이익을 모르기 때문에 합의는 이해관계를 반영하지도 전략적 동기에 인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이 바로 원초적 상황이다. 원초적 상황에서 계약 참여자들은 자신의 속성, 예를 들면 성별, 성별 정체성, 성적 지향, 계급, 인종, 사회적 지위, 신체 조건, 타고난 재능 등을 알지 못한다. 때문에 상기한 속성에 근거하여 윤리적 대우에 차이를 두는 규범을 거부한다. 이것이 계약론에서 합의가 공정하고 그 내용인 윤리 규범이 공정한 이유이다.

    그러나 여기서 설명을 마치는 것은 계약론이 어떻게 합의의 공정화를 이루는지에 대한, 즉 계약론의 한 측면에 대한 설명에 그친다. 이에 더하여 주목해야 할 것은 무지의 베일이 가리는 속성이 무엇이고,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갖는가이다. 예시로 든 성별, 성별 정체성, 성적 지향, 계급, 인종, 사회적 지위, 신체 조건, 타고난 재능 등은 무엇인가? 바로 그 개별자가 통제할 수 없는 속성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무지의 베일에 의해 가려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그 개별자가 통제할 수 없는 속성으로 인하여 윤리적 대우에 차이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시로 든 속성들은 바로 이러한 윤리적으로 임의적인 속성이다. 롤즈와 같이 계약론적 전통에서 윤리 이론을 전개하는 롤랜즈에 따르면 이것이 직관적 평등 논변이다. 앞서 설명한 합의가 윤리 규범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부분은 사회 계약 논변이다. 그는 직관적 평등 논변이 계약론의 핵심이고 사회 계약 논변은 단지 방법론적으로 기여한다고 해석한다. 

    이제 계약론에 라부아지에 문제를 적용해보자. 여기서는 선택지에 대한 이익과 손해의 비교가 중요하지 않다. 처벌이 의미하는 원칙은 무엇이고, 사면 혹은 가벼운 형이 의미하는 원칙은 무엇인지 각각 밝히고 이것이 원초적 상황에서 도출되는 원칙과 합치하는지를 비교해야 한다. 즉, 직관적 평등 원칙과 합치하는지 여부이다. 처벌의 의미는 어떤 개별자가 저지른 행위에 대한 법의 평가는 일관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사면 혹은 가벼운 형의 경우 사회 전체의 광범위하고 큰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라 할 수 있다. 이때 공리주의와 마찬가지로 계약론 역시 응분주의는 거부한다. 왜냐하면 “사회에 기여한 것이 많기 때문에 그에게 보다 특별한 권리를 주어야 한다”는 원초적 상황에서 도출될 원칙이 아니기 때문이다. 
    처벌과 사면 혹은 가벼운 형이 주장하는 원칙들은 모두 원초적 상황에서 도출 가능한 원칙이다. 그렇다면 계약론은 원칙의 충돌을 해결할 수 없는 무능한 이론인가? 계약론의 경우 다양한 원칙들이 정립된다. 이 원칙들은 충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원칙들은 위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먼저 롤즈에 따르면 다른 원칙들에 선행되는 정의의 두 원칙이 도출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각자는 다른 사람들의 유사한 자유의 체계와 양립할 수 있는 평등한 기본적 자유의 가장 광범위한 체계에 대하여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

둘째,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은 다음과 같은 두 조건을 만족시키도록, 즉, (a) 모든 사람들의 이익이 되라는 것이 합당하게 기대되고, (b)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직위와 직책이 결부되게끔 편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원칙들은 우선 평등한 기본적 자유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즉, 우리가 기본권으로 파악하는 것들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원칙이 우선이다. 그리고 이후에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허용할 수 있는 한계를 제한한다. 그것은 공정한 기회균등의 원칙(b)과 차등의 원칙(a)을 도출한다. 즉,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직위나 자본에 도전할 기회를 누려야 하며, 그렇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증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계약 당사자들의 지위의 측면이 대표적으로 두 가지이기 때문이다. 모든 계약 당사자는 “평등한 시민의 지위”와 “소득과 부의 분배에 있어 그의 위치에 의해 규정되는 지위”를 갖는다. 평등한 시민의 지위에서 정의의 제1원칙이, 소득과 부의 분배에 있어 그의 위치에 의해 규정되는 지위에서 정의의 제2원칙이 합의된다.
    그렇다면 처벌과 사면 혹은 가벼운 형이 주장하는 원칙들 중 어느 것이 정의의 제1원칙에 가까운가를 비교해보면 된다. 처벌이 주장하는 원칙, 어떤 개별자가 저지른 행위에 대한 법의 평가는 일관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제1원칙에 해당한다. 평등한 시민의 지위에서 그 누구도 법 앞에서 그가 발생하지 않은 속성에 의해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에 합의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사면 혹은 가벼운 형이 주장하는 원칙, 사회 전체의 광범위하고 큰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는 제2원칙에 해당한다. 기본적 권리가 아닌 어떤 이해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4. 결어   


    공리주의와 계약론의 전통에서 라부아지에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는지 살펴보았다. 우선 두 이론 모두 응분주의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전근대적 윤리와는 차별화된다. 공리주의의 경우 전체 집단과 피해자 집단의 효용을 비교해야 하는 상황, 즉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윤리관을 주장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잠재성 논변은 공리주의의 근본적인 기획과 양립하기 어렵다. 규범의 일관성을 정당화하는 것이 가장 나은 대안인데, 이를 정당화하는 상징성 논변이나 우선성 논변은 성공 가능하나, 기본적 권리를 효용과 거래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근본적인 한계는 잔존한다.

    반면 계약론의 경우 그러한 집단 간의 효용의 비교를 우선할 필요가 없다. 무지의 베일에 의한 원초적 상황에서의 합의가 도출할 원칙들과 처벌과 사면 혹은 가벼운 형이 각각 주장하는 원칙들을 비교하면 된다. 처벌은 법의 일관성을, 사면은 사회 전체의 이익 증진의 원칙을 주장하며, 이는 모두 원초적 상황에서 도출 가능한 것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 간의 충돌이 계약론에 대한 치명적인 공격이 될 수 없는 이유는 계약론이 원칙들 간의 위계를 정초한다는 이유에서다. 그 위계는 계약 당사자들의 지위의 두 측면과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평등한 시민의 지위와 이해관계를 갖는 지위로 전자가 후자보다 보편적이다. 때문에 평등한 지위에서 합의되는 법의 일관성은 이해관계를 갖는 지위에서 합의되는 사회 전체의 이익 증진 원칙에 우선한다. 후자는 오로지 전자가 충족되었을 경우에만 적용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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