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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더하기 Aug 23. 2020

우주 대탐험

Post 0, 1

0은 거짓이고 1은 참이다. 언제부터 인가 우리 모두는 그렇게 약속을 했고 이 명제가 주도하는 흐름 속에 살아간다. 이 참, 거짓의 이분법적 논리만을 적용하여 수없이 많은 물건이 탄생했고 지금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것을 사용하며 삶을 영위해 간다. 더 나아가 이것들은 삶의 만족도까지 바꾸어 주었으며 풍요로운 삶까지도 약속해 주고 있다.

이러한 삶의 만족을 위해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0과 1로 표현해야만 했다. 우리의 말도, 우리의 글도, 우리가 듣는 음악도, 그림도, 사진도, 영상도... 그리고 우리의 생각까지도. 그 어떤 것도 0과 1로 표현되지 못하는 것은 현재까지는 없었다. 그렇게 0과 1이 가진 힘은 어마어마했으며 지금도 그 끝을 명확히 알 수 없을 정도로 발전의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0과 1의 조합이 만들어 낼 경우의 수는 아직까지 무한대이다.

이렇게 무한대의 능력을 보유한 0, 1이 마침내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까지 탐하려 한다. 인위적(Artificial)으로 만들어낸 지능(Intelligence)으로 인간을 대신하려 한다. 0과 1의 기억(Memory) 속에 수없이 많은 인간(Human)의 경험(Experience)을 저장하고, 그 경험이 필요한 순간(Problem) 0과 1이 만들어낸 뇌(CPU)를 통해 빠르게 판단(Processing)하여 실행(Executing)에 옮긴다. AI는 엄연히 0과 1의 영역이다. 0과 1로 실현한 기술이다. 0과 1에 의해 탄생된 용어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경험’이다.

인간이기에 가지는 사단(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칠정(희(喜), 노(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欲))도 경험이므로 0과 1의 영역에서 충분히 실현 가능할 것이다. 역시 인간이 느끼는 감각(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도 경험이기에 이 또한 충분히 실현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AI는 자신에게 저장되지 않은 경험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까? 이 세상 모든 인간의 경험 속에는 절대 경험하지 못한 순간은 없다고 AI는 이 역시 판단하고 있는 것일까?


오래전 영화 ‘터미네이터(Terminator 2: Judgment Day, 1991, James Cameron)’에서 아놀드 슈왈제네거(Arnold Schwarzenegger)가 연기한 T-1000은 불속으로 잠기며 ‘다시 돌아오겠다’(I’ll be back)는 말과 함께 ‘엄지 척’을 날렸다. 당시 이 장면은 Humanism(인문주의, 人文主義)을 담아낸 명장면으로 많이 회자되었다. Humanism에 대해 ‘W’ 사전에 검색해 보았다. ‘철학 사유 체계의 근원으로서 인간의 존재를 중요시하고 인간의 능력과 성품 그리고 인간의 현재적 소망과 행복을 귀중하게 생각하는 정신’이라고 정의되어있다. ‘인간의 현재적 소망과 행복’이라는 구문에 눈길이 간다. 진정 T-1000의 이 행동은 0과 1의 영역만으로 충분히 실현 가능했을까 의문이 든다. ‘인간의 현재적 소망과 행복’에 대해 입력되지 않은 경험을 스스로 판단한 행동이었다면 T-1000은 ‘인간의 존재를 사유(思惟)’한다는 의미다. 설마? 아닐 것이다. T-1000에게는 그 순간 존 코너를 만나고 그의 마지막은 불 속일 것이며 이 때는 엄지 척과 함께 멘트를 해야 한다고 이미 입력된 경험이 알려준 것이다. 입력된 것이 분명하다. T-1000이 0, 1의 산물이었다면 현재까지의 기술로 볼 때 더욱 분명하다. 만약 경험에 의한 행위가 아니었다면 이는 분명 또 다른 영역과의 융합(Convergence)에서 오는 행위였을 것이다. 과연 무엇이 0과 1의 영역과 융합된 것일까? 


아마도 X, Y, Z가 그 영역을 담당했을 것이다. IT(Information Technology)가 아닌 BT(Bio Technology)의 영역이다. 터미네이터에서 보았던 T-1000의 행동은 객체(Object)는 0과 1의 영역이 담당하고 객체를 움직이는 사고(Thinking)는 X, Y, Z가 담당해야 가능한 현실이다. X, Y, Z. 새로운 영역의 등장이다.

0과 1의 영역에서는 0, 1이 스스로 입력과 출력도 담당하고 참, 거짓의 판단도 담당하였다. 하지만 X, Y, Z의 영역에서는 그들의 역할이 상황에 따라 변한다. 물론 입력과 출력은 주로 X, Y가 담당한다. 그리고 그것이 참이고 거짓인지를 판단하는 역할은 대부분 Z가 담당한다. 1이면 맞고 0이면 틀린, 정답이 정해진 상황이 아니다. Z는 X와 Y가 하는 ‘꼴’을 보고 옭고 그름을 결정할 것이다. Z의 기분이 좋다면 X가 무엇이든 Y가 무엇이든 신경 쓰지 않고 옳다고 말해 줄 것이다. Z가 기분이 나쁜 반대의 경우도 당연하다. 말 그대로 심판의 열쇠는 Z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Z가 막무가내로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Z는 X와 Y의 눈치를 살필 것이다. 간혹 Z가 휴가 중일 때는 X, Y가 스스로 판단할 경우도 발생한다. 물론 Z가 휴가를 떠나며 잠시 그들에게 ‘전결(專決)’권한을 부여했기 때문에 이 또한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고 X, Y가 Z처럼 마음 내키는 데로 판단하지 못한다. Z의 ‘판례(判例)’를 충분히 답습하고 결정한다. 만약 실수라도 있을 시에는 휴가 복귀 한 Z에게 크게 꾸지람을 듣게 된다.

Z의 마음을 알기란 진실로 심오하고 어려운 숙제이다. 역할이 분명했던 0과 1의 능력이 무한대라면 그때그때 다른 역할을 수행할 X, Y, Z가 만들어 낼 경우의 수는 어떨까? 어쩌면, 아니 아마도 풀리지 않을 숙제일 수 있다. 이 숙제를 푸는 과정은 분명 어려운 승부다. 0과 1의 이진의 숫자만으로도 끝없이 발전하고 있는 세상이다. 하나가 더 추가된 X, Y, Z의 세 가지 수의 조합은 IT로 절대 표현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일지 모른다. X, Y, Z. 그것이 0, 1을 대체하여 우리 삶의 일부가 되는 그 순간이 진정한 우주 대탐험의 시작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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