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어느 날 30대의 젊은 여성이 아이를 업고 버스에 올라탄다.
아이의 왼쪽 다리엔 붕대가 감겨있다.
그 날은 이상하게 할아버지, 할머니가 많이 타셔서 그런지 빈자리가 없었다.
어르신들은 창밖을 보거나, 스르르 눈을 감으며, 서로 눈치만 보는 모양새였다.
젊은 여성은 가벼운 한숨을 쉬고는, 한 손은 버스 손잡이를, 다른 한 손으로는 아이의 엉덩이를 받쳤다.
그렇게 버스가 출발하고 10분 정도 되었을까?
버스가 고개를 넘어 내리막 길로 진입했을 때, 버스의 속도를 못 이겨 그만 여성은 균형을 잃고 넘어지고 만다.
그 여성은 기절을 했고, 등에 업혀 있던 아이는 큰 소리로 '엄마, 엄마' 하고 울면서 외치고 있었다.
이에 놀란 할머니께서 젊은 아이 엄마 곁으로 다가가 정신 차리라며, 기절한 아이 엄마의 뺨을 가볍게 치며 몸을 주물렀고, 몇몇 중년 남성은 그녀를 버스 자리에 앉혔다.
버스는 잠깐 정차를 하고 젊은 아이 엄마의 상태를 지켜보았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뭔가 미안한지 계속 어린아이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었다.
다행히 젊은 아이 엄마는 정신을 차렸고, 모두의 안도 속에 버스는 다시 출발할 수 있었다.
젊은 아이 엄마는 32살 나의 어머니였고, 왼쪽 다리에 붕대를 감고 병아리처럼 빽빽거리는 아이는 7살의 나였다.
유독 나는 어릴 때 병치레가 잦았다.
허약한 몸 탓에 늘 어머니의 관심대상이었다.
몸에 좋다는 약이나 음식을 틈틈이 해주셨지만, 별 효험도 없었고,
특히 감기는 일 년 365일 중 300일을 달고 사는 그런 아이였다.
하지만 이런 허약한 몸보다 더 심각한 건 왼쪽 다리, 정확히 말하면 왼쪽 발바닥의 화상이었다.
어쩌다 이런 화마를 얻었을까?
나의 유년시절의 주 연료는 연탄이었다.
그 시절엔 부엌에 아궁이가 있었고, 가끔 갈라진 시멘트 틈 사이로 연탄가스가 새어 나와, 가족이 사망하는 사례도 있었다.
부엌의 아궁이...
그렇다. 내 왼쪽 발의 살점을 물어뜯은 건 그 아궁이였다.
기억은 안 나지만,
내가 3살 때 부엌일을 하던 어머니 목에 매달렸다 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착지를 제대로 못해, 아궁이에 발을 디디고 만 것이다.
어머니는 놀라서 나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지만, 전문화된 치료를 받지는 못했던 듯싶다.
그 당시엔 화상 전문 병원 같은 곳은 드물었던 터라 화상에 관한 치료가 부실했을 것이다.
결국 제대로 된 치료를 못 받은 나의 왼쪽 엄지발가락은 발바닥 살점과 하나가 되었다.
모양새가 오므린 모양이었달까?
결국 ‘^’ 모양으로 10년을 지내게 된다...
그 당시 나는 이때 얻은 무좀으로 '조금 가렵구나'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수술은 필요했다.
왜냐하면 뼈는 성장하는데, 화상의 살점은 이를 잡고 안 놔주기 때문이었다.
그대로 두면 걷는 습관이 나빠지거나, 최악의 경우 후천적 기형이 될 수 있다고 의사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이 말을 들은 어머니는 죄책감이 컸다.
자신의 부주의로 아들의 다리가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내 나이 7살 때 처음 수술대에 오른다.
수술을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수술실까지 가는 그 긴 복도, 그리고 무거운 마음, 옆에서 하는 말은 웅웅 거리기만 하고 하나도 안 들리는....
공포스럽다.
침대에 누워 가기 싫다고 우는 나와 그런 나의 손을 꼭 잡으며 괜찮다고 말하는 어머니...
하지만 수술실로 혼자 들어가는 7살의 나는 패닉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차가운 수술대 위에 맞닿은 피부는 닭살이 돋고,
주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메스는 나에게 무한의 공포를 제공했다.
그렇게 1시간쯤 수술을 하고 나온 나는 거의 초주검 상태였다.
어머니는 땀범벅이 되어 있는 나의 이마를 훑으며, 눈물을 글썽이셨고, 난 그런 어머니를 보고 울음을 터트렸다.
몇 시간 뒤 마취가 풀린 나는 또 한 번 울 수밖에 없었다.
진통제로 준 알약은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7살 아이가 참기엔 너무나 아픈 고통이었다.
그리고 그런 아픈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 역시 나만큼 아팠으리다.
그런 고통이 잠잠해지기 시작하자, 통원 치료를 받았다.
우리 집은 삶이 넉넉하지 못한 터라, 장기 입원은 힘들었다.
그렇게 통원 치료를 받으러 가는 어느 날.
버스에서 그만 어머니가 쓰러져 기절까지 했다.
어린 나는 어머니를 잃을까 봐 너무나 겁이 났다.
생각해 보니, 날 병원으로 데리고 간 건 항상 어머니였다.
아버지는...
.
.
가족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나중에 쓸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의 아버지는 흔한 말로 한량이었다.
그렇기에 본능적으로 어린 나도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어머니가 사라지면 나 역시 설자리가 없다는 걸...
다행히 어머니가 정신을 차렸을 땐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하지만 병원에서의 결과는 기쁘지 않았다.
수술 결과가 그리 좋지 않았다.
접힌 엄지발가락은 고작 1센티 정도 펴진 것뿐,
기형적인 모습엔 변함이 없었다.
어머니께선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어떻게든 온전한 발(?)로 보내고 싶었다.
행여 또래 아이들에게 놀림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또 한 번 수술을 받는다.
또 한 번의 공포...
그리고 끔찍한 아픔...
하지만 그런 공포와 아픔을 맞바꾼 결과는 전처럼 신통치 않았다.
의사 선생님은 좀 더 큰 병원으로 가야 할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가난한 우리 집 살림으로는 큰 병원에서 수술할 금전적 여유가 없었다.
우리 집 가장은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였고, 이미 그녀는 무거운 경제적 책임을 홀로 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선뜻 돈을 구하기 어려웠다.
아버지는 하루하루 술과, 노름으로 지새우기 일쑤였고, 두 아들을 보살피는 어머니는 경제적 피로가 상당했다.
결국 불완전한(?) 다리로 초등학교를 다녔다.
어릴 때 느낀 불편함은
앞에 말한 무좀과 샌들을 신을 때 양말을 신는 정도였다.
아마도 신기하게 쳐다보는 몇몇 어른들의 눈빛이 싫어 그리 했던 듯싶다.
그리고 체육시간
특히 달리기!!
달릴 때만큼은 내 다리가 불편하구나 느꼈다.
집에선 동생과 싸울 때 장애인이라고 해서, 울면서 싸움질 한 정도?
(정작 동생은 기억이 안 난다고 한다...)
결국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 서울의 한 성형외과에서 수술하게 된다.
오른쪽 사타구니 살을 떼서 왼쪽 발바닥에 이식하는 수술이었다.
이 수술을 통해 발가락은 완전히 펴졌다.
하지만 자기 살점이 아니라서 그런지 색깔이 짙은 커피색이다.
컨디션이 안 좋으면 잘 붓는다.
오래 걸으면 발바닥에서 피가 난다.
그래도 이렇게 펴진 엄지발가락이 너무 반가웠다.
어머니는 내 발가락을 보시며 늘 미안해한다.
자신의 부주의라고....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 여름...
나를 업고 병원에 가는 동안 등에 맺힌 땀과 땀 때문에 얼룩진 상의.
비록 택시비가 없어서 버스를 타고 다녔지만, 자신의 불편함 보다 내 다리를 걱정하던 분...
그렇게 치료를 받고 나면 잘 참았다고, 시장에서 핫도그를 사주신 어머니...
이제 칠순을 바라보는 어머니
어릴 적 매달리는 던 그녀의 등은 이제 너무나 작아져서 나의 가슴 한편을 먹먹하게 한다.
어머니...
이젠 제 다리 때문에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런 나의 자전적인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준 브런치에 감사를 드린다.
우리 어머니는 특별한 분이 아니다.
길거리에 흔히 보는 보통 어머니와 다를 바 없는 분이다.
그런 어머니와 나의 얘기를 적게 돼서 큰 기쁨이다.
비록 즐겁고 기쁜 일은 아니지만 이렇게 글로써 기억의 한 조각을 옮겨놓았다는 것이 안심(?)된다...
어머니...
나에겐 특별한 분...
아마 이 글을 읽는 당신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일 것이다.
가족을 위해 늘 희생하시는 고마운 분
그리고 그 희생이 기쁨이라고 말하시는 분을 위해 이 글을 적은 걸 영광이라 생각한다.
사랑해요....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