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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왕성 Aug 26. 2021

꿈과 광기의 왕국 : 애니메이션 <바람이 분다>를 보고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은퇴작으로 알려졌던 <바람이 분다>. 하지만 그는 불과 며칠 전 신작 단편 애니메이션 <애벌레 보로>의 시사회를 마쳤다. 사실 미야자키의 은퇴 선언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98년 <원령공주>를 마지막으로 떠난다 했지만 그 이후 6편의 작품을 발표했고, 덕분에 우리는 단연 최고의 명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향유할 수 있었다. 이처럼 여러 번 은퇴를 번복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은 대강 짐작이 간다. 자신의 천재성이 만들어내는 끊임없는 영감이 그로 하여금 다시 펜을 쥐도록 만들었을 것이고, 지브리 스튜디오의 식구들뿐 아니라 운 좋게 동시대에 그의 작품을 누릴 수 있었던 우리에게 또한 그의 퇴장은 아쉬운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짐작이고, 미야자키는 이번 신작을 발표하면서 분명한 복귀의 이유를 밝혔다. '손자가 자랑스러워할 만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손자에게 부끄럽지 않은 할아버지가 되고 싶은 그는 그러나, 13년도에 발표했던 <바람이 분다>를 세상에 내보이면서 수십 년 작품 인생에 대한 반문과 나아가 인간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직면해야 했다. 특히 그와 그의 작품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한국 팬들의 폭격에 가까운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나는 <바람이 분다>가 정말 그의 커리어를 통째로 뒤흔들 만큼 비도덕적인 작품인지, 뒤돌아 볼 것도 없이 그의 가치관에 심각한 오류가 있음을 증명하는 작품인지 알고 싶었고, 그러는 와중에 <바람이 분다>의 제작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꿈과 광기의 왕국>을 보게 되었다.


이 글은 그가 왜 <바람이 분다>를 꼭 만들어내야 했는지를 더듬어보는 작업이며,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한 사람을 이해해보려는 나의 작은 노력이자 예술가의 운명이 무엇인지를 깨달아가는 과정이다.



이 작품은 한국에서 개봉할 당시 '전쟁통에 헤어진 남녀의 애절하고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인 것처럼 홍보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사랑 이야기는 부수적일 뿐 주인공 '지로'의 꿈을 이루는 서사가 주된 내용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지로는 어릴 적부터 하늘을 동경하고 아름다운 비행기를 만들길 꿈꾼다. 마침내 그가 오랜 꿈을 이루었을 땐 한창 2차 세계대전이 활발하던 때였고, 전투기를 설계함으로 꿈을 이룸과 동시에 일제의 제국주의에 공헌한다. 이야기는 실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전투기 '제로센'을 제작한 '미츠비시 공장'과 설계자 '호리코시 지로'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많은 논란을 불러왔던 것이 이 지점이다. 역사의 가해자인 '호리코시 지로'의 일대기를, 소년이 꿈을 이루어가는 과정인 듯 아름답고 환상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일본이 전범국이라는 사실을 지워버리고, 제국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전투기와 그 개발자를 미화시킨 게 아니냐는 것이다. 실로 아름다운 작화는 핏빛이 아닌 장밋빛이며, '호리코시 지로'는 전범의 조력자가 아닌 꿈을 이루기 위해 정진하는 성실한 청년처럼 비친다. 더구나 미야자키의 집안이 운영한 미야자키 항공사에서는 지로가 설계한 제로센 전투기의 방향타를 제작했고, 미야자키의 꿈도 지로처럼 비행기 조종사가 되는 것이었다. 이 시점에서 <바람이 분다>는 제국주의를 등에 업고 풍요로운 생활을 누렸던 가문에 대한 향수, 혹은 치명적인 오점을 외면하려는 미야자키의 필사적 자위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영화는 이렇듯 단편적인 시각으로만 소비되기엔 꽤나 입체적이며 복잡하다. 전투기에 필요한 부품을 제작하는 아버지에게 '전쟁의 협력자가 아니냐'라며 맞섰지만 그런 아버지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살아남았던 미야자키의 삶처럼.


이러한 모순은 <바람이 분다>의 제작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살육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지로센'을 아름답게 그리면 안 된다 생각하는 자신과, 그 자체로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또 다른 자아 사이에서 미야자키는 끊임없이 고뇌한다. 어쩌면 저주받은 재능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비극은 저주받은 꿈을 꾼 지로의 삶과도 닿아있다. 비행기를 만드는 게 꿈이었던 소년이 살았던 시대는, 그 꿈이 곧 살상 무기가 되는 광기의 시대였다. 이런 건 누구의 잘못인 걸까.



비행기를 동경한 지로가, 제국주의를 앞세워 침략을 일삼았던 조국 아래에서 꿈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은 미츠비시에서 전투기를 설계하는 것 뿐이었다. 상식과 양심을 따라 오랜 꿈을 저버리기엔 그에게도 단 하나의 목표였고 삶이었다. 그래서 그는 전투기를 설계했다. 결과적으로 제국주의에 기여한 역사의 가해자가 되었지만, 그 또한 순수한 꿈을 매도당하고 자유와 신념을 말살당해버린 시대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로가 다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전쟁에 기여하는 스스로가 부끄러워 꿈을 내려놓고 연인 나호코와 평범한 일상을 함께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뒤돌아보지 않았고, 자신이 꿈을 이룸으로 어떤 이의 꿈은 파괴된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멈추지 않았다. 이러한 '호리코시 지로'의 선택은 우리에게 하나의 물음을 던진다.



나의 꿈이 누군가의 꿈을 짓밟고 있진 않은가?

제국주의, 군국주의는 지금에 와서 또 다른 이름으로 우리의 삶을 조종하고 움직인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 곱씹고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나의 욕망이 거대한 음모 안의 톱니바퀴로 작용하는 것은 아닌지, 옳다 생각했던 신념이 누군가에겐 폭력으로 행사되진 않은지.


허핑턴포스트에 게재된 '최지혜 님'의 글에서는, 현시대에 어떻게 권력집단이 자신들의 욕망을 개인의 욕망인 듯 변모시켜 그 속내를 채우는지 알려주고 있다.


치어리더는 남성 집단이 원하는 방식의 퍼포먼스를 선보이기 위해 자신의 몸을 관리 및 통제한다. 치열한 스포츠 경기 한가운데에서 응원을 통해 관중들과 선수들의 기운을 북돋아 주고 경기를 더욱 흥겹게 만들고 싶어 하는 치어리더의 욕망과 자부심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러나 타이트한 민소매 웃옷과 짧은 치마를 입고 관중들 앞에 서는 순간 그 어떤 욕망과 자부심이라도 순식간에 남성 집단의 욕망과 자부심으로 치환되어 가장 진부한 이미지로 변질된다. 로타와 함께 작업하고 싶었다는 여성과 마찬가지로, 치어리더는 개인의 욕망과 자부심과 무관하게 남성 중심 사회 속에서, 남성 위주의 스포츠 경기 속에서 남성의 욕망과 자부심을 철저히 반영하는 도구로 소비된다. 박기량 씨의 욕망과 자부심은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 속에서 딱 그 정도 위치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는 박기량 씨의 잘못이 아니다. (출처 http://www.huffingtonpost.kr/choi-jihye/story_b_15649206.html)


이렇듯 여성 개인의 욕망마저 남성의 입맛에 맞춰 재단해버리는 이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욕망을 욕망하기 쉽도록 설계되어있다. 그리고 마치 그것이 여성이 주체적으로 선택한 나의 욕망인 것처럼 위장시킨다. 그것이 비록 나를 행복하게 하고 살아있게 만드는 일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행복이 이 세상 수많은 사람들의 서로 다른 욕망과 자부심 사이에서 어디쯤 위치해 있는지는 알고 있어야 한다. 자신의 행복이 누구의 행복을 밟고 서 있는지, 그리고 나의 행복이 누군가의 행복을 밟고 서 있도록 일을 꾸민 것은 과연 누구인지를 생각하지 않는 행복은 결국 강자들의 질서에 철저히 복무하며 강자들의 행복을 이루는 조건으로 전락한다. (중략) 개인의 욕망과 자부심이 강자들의 질서와 우연히도 꼭 들어맞는다면, 그것은 더는 개인적인 것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말이다.(출처 http://www.huffingtonpost.kr/choi-jihye/story_b_15649206.html)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이 분다>는 강자들의 질서에 복종하며 강자들의 행복 아래에서 평안한 삶을 누렸던 자신의 젊은 시절, 곧 '지로'로 대변되는 자신을 속죄하는 작업이다. 그 지난한 작업을 담아낸 다큐를 보고서야 나는 그가 불명예스러운 은퇴라는 오명을 감수하고서도 이 영화를 (당시) 마지막 작품으로 택한 이유를 이해했다.


그럴 수밖에 없어서다.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 되기로 작정했을 때부터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걸 깨달았을 테니까.


자신을 갉아먹는 걸 알면서도 꼭 써야 할 이야기, 쓸 수밖에 없는 그런 이야기가 나에게도 찾아올 것이다. 글쓰기는 언제나 끔찍한 과거를 헤집고 부끄러움을 기록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을 써 내려가는 작업이니까.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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