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는 하루 아침에 부모와 여동생을 잃는다. 여동생은 입에 가스호스를 물고 자살하고, 안방에서 잠을 자던 부모님도 함께 변을 당한다. 사고 이전 여동생에게 메시지를 보내도록 만들었던 대니의 불안한 예감이 결국 현실이 되고 만 것이다. 천애고아가 된 대니가 의지할 대상은 이제 남자친구인 크리스티안 밖에 없다.
하지만 크리스티안은 오열하는 대니를 끌어안으면서도 그의 슬픔을 나눠지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권태를 느꼈든지 사랑이 다했든지, 이미 대니와의 관계에 지친 것처럼 보이는 그에게 밑바닥 없는 대니의 절망은 감싸안아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자신의 바닥난 사랑을 추궁하고 캐묻는 불편한 감정이다. 연인이 나의 돌봄과 애정을 필요로 할 때 그만한 감정적 지지를 줄 수 없다면, 그 요구는 곧 내 안에서 공격성을 띠고 나를 몰아세운다. 그게 가족을 한꺼번에 잃은 무지막지한 슬픔일지라도. 아니, 그러한 슬픔이기 때문에 공감할 수 없는 나 자신에 대한 자괴감과 연인에 대한 죄책감이 한데 뭉뚱그려져 결국 나를 찌르는 '나쁜 슬픔'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대니는 크리스티안이 친구들과 함께 계획했던 여행에 합류해 스웨덴으로 간다. (이 과정에서도 두 사람은 삐걱인다) 그곳에서는 '미드소마'라는 축제가 벌어지고 있다. 한밤중임에도 백야로 형형히 밝은 '호르가'는 흡사 지상낙원처럼 보인다. 마을 사람들은 꽃목걸이를 걸어주며 일행을 환영하고, 대니는 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눈다.
마을 공동체는 어떤 '의식'을 앞두고 있다. 바로 나이가 찬 노인들이 스스로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일이 그것이다. 대니 일행과 마을 구성원의 누군가가 데려온 외부인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자살쇼'에 혼비백산하지만, 그들은 이것이 '오랜 전통'이라며 진정시킨다.
절벽에서 뛰어내린 두 노인은 대니의 부모님으로 투사된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그들을 보며, 대니는 마음 한편 여동생의 자살로 함께 참변을 당한 부모님의 죽음이 사실은 타의가 아닌 자의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을 것이다. 그 가능성에서 대니는 위안을 얻는다. 죽음을 원하는 이들이 스스로 죽음을 맞는다면 그것은 슬픈 죽음이 아니기에. 호르가의 구성원들이 예부터 행해온 '오랜 전통'처럼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우며, 그렇기에 괴로움과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밤 없이 축제가 이어지는 동안 대니는 크리스티안과 그의 친구들이 자신만 두고 마을을 떠나는 악몽을 꾼다. 꿈 속에서 크리스티안은 떠나고, 대니는 남겨진다. 이 꿈은 크리스티안과의 이별을 예감한 대니의 예지몽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 구도에 있어 이미 가족으로부터 (어쩌면) 버려지고 혼자 남겨진 대니의 원초적 공포를 상징한다. 그런 맥락에서 이 환하고 이상한 '호르가'는 그가 홀로 남겨진 '세상'과 다르지 않다.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고, 사람들은 죽어나가며, 연인은 나를 배신한다. 다른 게 하나 있다면 이곳 사람들은 대니의 슬픔을 '공감'하며 나아가 '공유'한다는 것이다.
크리스티안이 결국 다른 여인과 동침하는 장면을 목격했을 때 대니는 무너진다. 절망하며 바닥을 구른다. 그런 대니를 가운데 두고 마을의 여성들은 함께 오열한다. 들숨과 날숨을 같이하며, 살아있는 것 자체가 지옥인 대니의 고통을 전이시켜 함께 느낀다. 크리스티안이 해주지 못했던 그 일을.
고향을 떠나 먼 곳에 온 대니는 결국 그곳에서야 비로소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제대로 마주한다. 더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연인을, 부모의 죽음을, 그 모든 것을 외면해 온 스스로를.
그런 의미에서 미드소마는 오컬트 호러라는 장르를 뒤집어쓴 성장 드라마이며 남녀의 이별 이야기다. 아름다운 이별은 없다는 말처럼 이별은 본래 끔찍하고, 유혈이 낭자하며, 장밋빛이 아닌 핏빛이다.
그리고 이별은 미드소마 그 자체다. 밤이 찾아와야 하는데 오지 않고, (그 사람이 와야 하는데 오지 않고) 그럼에도 축제는 계속되며,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며) 여전히 풍경은 아름답고, (다시 사랑에 빠지고) 이것은 반복된다. (이별은 반복된다)
이 끔찍한 축제 속에서 우리는 성장할 것인가. 마침내 여왕이 된 대니처럼. 그것은 온전히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