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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굼바 Dec 27. 2021

거짓말 하지 않곤 못 배기는 인간

구로사와 아키라 <나생문>

구로사와 아키라 <라쇼몽(1950)>














 구로사와 아키라의 감독의 영화는 1952년 작 <이키루>를 통해 먼저 접해본 적이 있다. 조용하고 담백한 스타일의 영화라 흥미진진하게 보진 않았지만, 마지막의 반전과 그것을 통한 영화적 메시지가 인상깊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그 메시지를 ‘인간의 모순됨’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고 받아들였는데, 이번에 본 <나생문> 또한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영화의 시작은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는 어느 날, 나생문 아래에서 이루어진다. 비를 피하기 위해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행인은 그곳에 있는 두 명의 사람과 만난다. 그 둘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연신 ‘모르겠다’라는 말만 해댄다. 도대체 무엇을 모르겠다는 것이냐며 행인이 묻자 그 중 한 명인 나무꾼이 ‘나흘 전’의 일이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나흘 전 그는 산에 나무를 하러 가다가 사무라이의 시체를 보았다고 말한다. 칼은 없었고, 여자와 남자의 모자, 새끼줄, 부적 주머니가 있다고 덧붙인다. 뒤이어 옆의 스님은 시체가 아닌 지나가는 사무라이와 여자를 보았고, 여자는 얼굴이 가려져 있어 보이지 않았고, 사무라이는 칼과 활을 차고 있었다고 한다. 한 시체를 둔 이야기는 관아에서 계속계속 이어진다. 세 번째는 강가에 쓰러져 있던 수상한 도적을 잡은 사람이다. 그는 도적이 쓰러져 있었을 때 사무라이의 활, 화살, 회색 말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그 도적은 당당하게 자신이 사무라이를 죽였다는 말부터 내뱉고, 그 과정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스님이 보았다던 그 여자가 너무 갖고 싶어 우선 사무라이를 유인해 쓰러뜨렸고, 그다음은 여자에게 남편이 뱀에 물렸다고 유인한 뒤 그 자리에서 범했다고 주장한다. 여자는 이렇게 범해진 이상 도적 당신과 남편 둘 중 한 명은 죽어야 하고, 거기서 살아남는 사람을 따르겠다고 말한다. 도적은 말대로 사무라이를 죽였지만, 여자는 사라졌고 비싸 보이는 그녀의 단도도 챙기지 못했다고, 그리고 그 이후 개울에서 물을 마시다가 복통이 와서 쓰러진 것이라고 마무리 짓는다. 하지만 여자의 증언은 또 달랐다. 여자는 도적이 자신을 범하고 달아났고, 이후 자신을 바라보던 남편의 차가운 얼굴에 그만 미쳐버려 정신을 차려보니 남편 가슴에 제 단도가 꽂혀 있었다고 말한다. 그 충격에 자살하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다고 한다. 


 꼬리에 꼬리를 물어 이번엔 무녀를 통한 사무라이의 주장까지 가지만, 이 또한 혼돈을 조성할 뿐이다. 사무라이는 그때 도적이 여자를 설득해서 도망가려고 했고 여자는 이에 승인하면서 남편을 죽여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거절하고 오히려 묶여 있던 자신을 풀어 주었고, 아내는 도망쳤고, 자기는 그녀가 떨어뜨린 단도로 스스로 자결했다고 밝힌다. 이후 누군가가 그 단도를 빼가는 것도 느꼈다고 덧붙인다.

 하지만 이제는 이야기의 막을 열었던 나무꾼이 자기는 사실 위증을 했으며 그 싸움의 과정을 봤다고 고쳐 말한다. 도적은 그녀를 범하고 구애했으며 그녀는 대답대신 제 남편을 풀어준 뒤 싸우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사무라이와 도적은 이런 여자 때문에 목숨 걸기 싫다며 떠나려고 하고, 여자는 남자답게 결판도 하나 못 내냐고 부축였다고 한다. 그렇게 어설픈 싸움 끝에 사무라이가 도적의 칼에 맞고 죽자 여자는 소리치며 도망쳤다는 게 나무꾼의 마지막 증언이다.


 구구절절 많은 이야기들의 끝으로 스님과 나무꾼은 세상에 믿을 사람이 없다고 여전히 한탄한다. 하지만 그때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세 명은 급하게 달려간다. 행인이 제일 먼저 아기를 감싸고 있는 비단옷을 훔치자 나무꾼은 놀라서 그를 마구 비난한다. 그러나 행인은 그런 너는 너가 그 비싼 단도를 가져간 사람 아니냐며 똑같이 비난하고, 나무꾼은 그에 대해 반박하지 못한다. 행인은 비단옷만 챙긴 채 떠나버리고 나무꾼은 자기가 집에서 키우는 애만 여섯이라고 스님을 회유하여 아기를 받아낸다. 비가 그치고, 그가 아기를 안아 든 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한 미스테리한 사건을 두고 범인을 밝혀내기 위한 첩보수사극은 흔히 개봉하기도, 익히 봐오기도 한 장르일 것이다. 하지만 이 <나생문>은 범인이 누구든 진실이 어떻든, 그저 각 사람들간의 이야기가 다르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누구의 말을 들어야, 누구를 믿어야 옳을지 알 수가 없다. 사건이 실제로 보여지는 것이 아닌 누군가를 통해 이야기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불신의 불신을 거듭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마치 자신은 결백한 것마냥 주도적으로 이야기를 진행했던 나무꾼조차 여자의 단도를 훔친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가 마지막 아이를 품에 안고 갈 때 짓는 표정은 안심보다는 뭔가 아리송한 느낌이 더 전해졌다. 그리고 영화의 모든 이야기들이 결국엔 나무꾼 한 사람의 입으로 전달되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숱한 인물들의 말들도 다 나무꾼의 생각이었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결국 마지막 스님의 말대로 세상에 믿을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이 이 사건의 해답이 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 영화가 그저 인간에 대한 회의감만을 토로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비가 그치고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은, 앞서 스님이 ‘믿을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한 것에 대한 일종의 희망으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 영화에선 딱 한 번 ‘믿음’이란 것이 등장하는데, 바로 스님이 나무꾼을 신뢰하고 아기를 내줄 때이다. 나는 이것이 결국 회의감을 느끼면서도 같이 살아가고 있는 이 공동체에서 누군가 한 명쯤은 희망처럼 믿을 수 있다는 의미로 생각했다. 실제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고 나서 ‘인간은 자신에 대해 정직해질 수 없다. 자기 자신을 얘기할 때만 언제나 윤색해진다. 이 영화는 그러한, 즉 자신을 실제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거짓말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인간을 그리고 있다. 이기주의는 인간이 날 때부터 갖고 있는 죄악이다.’라고 스스로 의도를 밝힌 바도 있다.


 <나생문>은 개봉 이후 국내외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고 전해진다. 영화에서처럼 현상을 왜곡하는 묘사를 서로 다른 관점에서 다각적으로 보여주는 서술 트릭 기법을 ‘라쇼몽 기법’이라고 칭하기도 하고, 객관적 현상을 각자 주관적으로 다르게 서술할 때를 ‘라쇼몽 현상’이라고 부른다고도 한다. 나는 영화적인 주제를 떠나 감독의 라쇼몽 기법도 너무 기발하고 참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영화의 의도를 품고 있는 굵직한, 즉 필요한 장면들만 넣어 짧고 깔끔하게, 하지만 강렬하게 제작하였다는 점도 좋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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