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희야. 이년아 왜안오냐

자식이 소유물인줄 아는 노인, 치매의 그림자 너머

"순희야! 순희야! 이년아, 왜 안 오냐!"


요양원 복도를 가득 채우는 노인의 외침이 날카롭게 공기를 가른다.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그 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본다. 흰 머리카락, 주름진 손, 그리고 분노와 슬픔이 뒤섞인 눈빛. 치매라는 병은 그에게서 예의와 품위를 앗아갔지만, 이상하게도 감정만큼은 더 진하게 남겨놓았다.


"순희야... 니 서방이 못 오게 하냐? 니가 돈을 얼마나 많이 버나 보자..."


치매 노인들을 돌보며 발견한 가장 충격적인 진실은, 그들이 내뱉는 말들이 단순한 헛소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치매라는 커튼이 걷히면서 평생 감춰온 속마음이 여과 없이 흘러나오는 걸 지켜보는 건, 마치 누군가의 일기장을 몰래 훔쳐보는 것 같은 죄책감을 안겨준다.


그날도 그랬다.


"각시, 순희한테 전화 좀 해줘. 이년이 안 오네."


평소에는 말수가 적던 김 할아버지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요양보호사가 다가가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어르신, 자식에게 욕하지 마세요. 왜 욕을 하세요?"


김 할아버지는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진실을 들킨 것처럼 황급히 얼굴을 붉혔다.


"욕 안 했어, 왜 그래. 내가 지금 팔이 아파 부러져버렸나봐."


순간적으로 화제를 돌리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을 발견했다. 그리고 동시에, 치매라는 질병이 가져온 역설적인 투명함도.


"어르신, 팔 괜찮아요. 이제 그만 순희 부르세요. 다른 분들이 힘들어해요."


노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외치기 시작했다.


"이년이 안 오니까 그라제? 순희야! 순희야!"


보호사는 한숨을 내쉬며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이 깃들어 있었다.


30년 직장생활을 마치고 요양시설에서 치매 노인들과 함께한 2년은 내게 인간의 본질에 대한 가장 솔직한 교과서였다.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치매 노인들이 정말 그렇게 가족에게 함부로 대하나요?" 그럴 때마다 나는 솔직히 대답한다.


"당신의 부모님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다만 아직 그걸 보지 못했을 뿐이죠."


딸이 방문하는 날, 아침부터 욕설을 내뱉던 노인이 갑자기 천사처럼 변하는 모습은 이제 익숙하다. 자식들은 믿지 않는다. "우리 어머니가 그럴 리 없어요. 항상 자식 위해 살아오신 분인데..." 하지만 그게 바로 문제의 핵심이다.


자식을 위해, 아니 어쩌면 자식을 통해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평생을 살아온 부모. 그들에게 자식은 어느새 소유물이 되어있다. 그리고 치매는 그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는 잔인한 스포트라이트다.


부모와 자식이라 해도 모든 감정과 생각을 공유하는 건 불가능하다. 우리는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독립된 인격체다. 치매 노인들에게서 나오는 행동들은 평생 감춰온 내면의 민낯일지 모른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 누군가 정말 싫을 때 혼자서 상상하는 끔찍한 복수.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둔 용서하지 못한 상처들. 다만 우리는 아직 이성이라는 필터가 작동할 뿐이다.


"왜 치매 노인들은 고운 말만 까먹을까요?"


한 신입 요양보호사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대답했다.


"우리가 평생 가장 많이 억누른 감정이 무엇이겠어요? 분노, 원망, 미움... 그것들이 가장 강하게 남아있는 게 아닐까요?"


우리는 살면서 진짜 모습을 철저히 감춘다. 늘 착하고 이해심 많은 사람으로 비춰지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 가면 아래에는 누구나 어둠이 있다. 치매는 그 가면을 벗겨버리는 병이다.


30년 동안 회사에서 웃으며 참았던 분노, 가족에게 표현하지 못했던 실망감,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 데 대한 좌절... 이런 감정들이 치매라는 필터를 거치면 여과 없이 쏟아져 나온다. 그래서 치매 노인의 말과 행동이 때로는 날카롭고 살벌하게 느껴진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마음 한구석이 절절해진다. 나에게도 결코 보이고 싶지 않은 부분들이 있으니까. 언젠가 내가 치매에 걸려 내 속마음의 비밀들이 세상에 드러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밀려온다.


우리 사회는 치매를 단순히 기억을 잃는 병으로만 본다. 하지만 치매는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깊은 인간 내면의 지도를 보여주는 창이다. 그리고 그 창을 통해 우리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치매 환자를 돌보는 일은 그저 육체적 케어가 아니다. 그들의 영혼이 던지는 질문에 함께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왜 나를 버렸니?" "내가 평생 너를 위해 살았는데, 왜 지금은 오지 않니?" 이런 질문들은 단순한 헛소리가 아니라, 평생 가슴에 품어온 진짜 물음들이다.


치매 환자들에게 필요한 건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이해다. 그들의 말과 행동 속에 담긴 진실을 인정하고, 그 아픔을 함께 나누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것이 진정한 돌봄의 시작이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나이를 먹고, 어쩌면 치매를 겪을지도 모른다. 그때 우리의 민낯은 어떤 모습일까? 지금 우리가 쌓아올린 가면 아래에는 어떤 감정들이 웅크리고 있을까?


공허한 웃음이 허공에 퍼져 나가고, 잡는 손잡이가 차갑게 느껴지는 순간에도, 우리의 내면은 여전히 뜨거운 감정으로 가득하다. 그 감정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치매 환자를 이해하는 첫걸음이자,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방법일 것이다.


치매는 질병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평생 감춰온 내면의 거울이기도 하다. 그 거울 앞에 서기가 두렵다면, 그건 우리가 아직 스스로를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증거일 뿐이다.


언젠가는 모두가 그 거울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가 보게 될 모습이 너무 낯설지 않기를, 그래서 두려움보다는 평온함으로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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