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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바다 Jun 17. 2024

담담하기에 더욱 안타까운 영화 <한공주>

급(?) 수정한 영화 <한공주> 리뷰

모처럼 넷플릭스를 켜보았다. 심심하던 차에 한 편에 끝나는 나름 재미있는 영화가 없나 찾아보았다. 드라마는 너무 길어 완결까지의 여정이 너무 벅차다. 알고리즘의 영향일까. 눈에 띄는 제법 오래된 영화가 있었다. <한공주>. 전에 보겠다 보겠다 하다가 남겨둔 영화이다. 이번에 갑자기 눈에 띈 이유는 무엇일까.  


<한공주>는 잔잔하며, 실화 같은 언급도 없다. 만약 영화가 사회 부조리를 고발한, 그런 적극성을 띈 영화였다면 그런 시의성 "때문에" 봤을 것을 것이지만 이 영화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드라마를 본 느낌이다. 하이틴 드라마라고 해야 하나? 공주가 전학을 간 후 친구들과 친해지기까지의 여정을 그린 드라마 말이다. 하지만 드라마와 다른 점은 결말이다. <한공주>에서도 여느 하이틴 드라마와 비슷하게 친구와의 갈등이 나온다. 그러나 그 결말은 너무 일방적이며, 비극적이다.


영화는 공주의 과거와 현재를 교차해서 보여준다. 설명이 없는 덕분에 처음엔 헷갈릴 수 있다. 그저 주인공 공주의 시선으로 영화가 바뀐다. 시선이라고 하니 공주의 관점으로 영화가 진행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영화가 보여주는 장면은 단순히 눈으로 보는 정도에 그친다. 공주가 나래이션을 하는 장면도 없으며, 공주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보여주는 장면도 없다. 상황을 다 아는 누군가는 공주를 보면서 분명 "쟤 뭔가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 거 아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표정만이 어두운, 평범한 학생으로 보인다

공주는 조용하고 덕분에 그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행동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저 조용하게, 또 차분히 지낸다. 누군가의 관점으로는 소극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그나마 공주가 적극적인 경우는 자신이 영상 등에 찍혀 알려질 수 있을 때이다. 도대체 왜이리 발끈하는지 모른다. 만약 내가 사전에 영화 <한공주>에 대해 찾아보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보았다면 "쟤 왜 저래"하고 짜증을 냈을 것이다. 다가가려고 했던 친구들의 마음에 공감하며 말이다. 하지만 오히려 알고 본 덕분에 다른 각도에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이라는, 정말 있었던 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덕분에 다른 관점으로 본 것 같다. 오히려 이런 사전 정보를 알고 본 덕분에 공주의 상황과 공주의 행동이 너무 아니 그냥, 슬펐다. 영화에 몰입한 것보다도 실제의 사건에 몰입한 것일지도 모른다.


공주에게 끔찍했던 사건은 1분 이상 나오지 않는다. 그저 공주의 일상이 주를 이룬다. 공주는 인천으로 전학을 갔고, 전 담임선생님의 어머니 집에 산다. 공주의 어머니는 도망갔고, 공주의 아버지는 정신머리가 없는 사람이다. 전 담임선생님의 어머니 집에서 지내는 것도 불편하다. 그의 어머니는 공주를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과 공주가 사고를 친 것 아니냐 의심한다. 전학을 간 공주에게는 은희라는 아이가 귀찮게 자꾸 달라붙는다. 은희가 공주와 친해지려고 하는 장면은 (공주에겐 불편했을 지라도) 보는 이에겐 흐뭇함을 남긴다. 은희는 교내 아카펠라부 그룹원으로, 공주의 노래 실력에 반해 어떻게든 그녀를 동아리에 가입시키고 싶어 한다. 친해지고 싶어 애교를 부리는 은희에게 공주는 조금씩 마음을 연다.

은희와 공주. 은희는 공주에게 자꾸만 다가가려고 한다.



친해진 은희와 공주 사이에 오갔던 대화다.


"너 키스 해봤어? 해봤구나. 누구랑? 첫사랑이랑? 몇명이랑?"


"말해줘? ...... 마흔 셋."


"오 날라리~"


"근데 사람은 아니야."


"엥, 그럼?"


"고릴라."


공주는 과거 또래 학생에게 강간을 당했다. 고릴라 탈을 쓴 마흔세 명에게 말이다. 공주에게 은희의 저 질문은 곤란한 것이다. 하지만 공주가 그 질문이 불쾌하다거나, 끔직하다거나 생각하지 않는다. 당사자인 공주는 오히려 담담하다.




요즘은 피해자 다움이라는 말과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말이 자주 보인다. 내가 이해한 바로 피해자 다움과 성인지 감수성은 증명책임이라는 범주로 함께 묶을 수 있다. 피해자 다움이란 관점에서는 피해자가 그 피해를 증명해야 하나, 성인지 감수성의 관점에서는 가해자가 가해를 하지 않았다는 증명을 해야 한다. 피해자 다움은 (내 입장에서) 이해하기 꽤 난해한 관점이다. 반면 누구는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것을 난해하게 여길 수도 있다. 왜냐하면 진실을 일방적인 진술에 의지하여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성인지 감수성은 그 함의가 있다. 진실을 판단할 때 (합리적 판단이 배제된) 우리의 기존 관습 -여성의 정조, 순결, 그리고 이 관념에서 표출된 삐뚤어진 당위-을 배격하겠다는 것과 그 속에서의 무기 대등 또한 실현하겠다는 것. 그로써 판결에 피해자를 고려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고려"라는 것은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 -가령, 공주에게 다그치며 범죄 피해 사실의 유무를 물은 경찰... 이때 공주가 울먹이는 장면을 보노라면, 피가 꺼꾸로 솟는다.-이 아니라 피해자의 개인적, 사회적 입장도 고려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이다.


지금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이 화두가 된 이유는 우리 사회가 이 악행을 묵인하고 허용해줬다는 사실 때문이다. 지금 이야기한 것과는 초점이 많이 다르다. 그럼에도 지금 상황에서 글을 쓰는 이유는 이 사건이 너무 가해자 처벌 중심으로 흐르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우리 사회가 그를 단죄하지 못한 것은 안타깝다. 하지만 단죄하지 못한 만큼 피해자 또한 보호받지 못했다.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과 관련하여 이를 게시한 한 유튜버가 있다. 이 유튜버는 단죄를 위해 가해자의 신상 정보를 공개했다. 이는 가해자뿐만 아니라 피해자에게도 중요한 일이다. 단죄는 중요한 것이지만, 현재 평범하게 살고 있는 피해자의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이 유튜버는 결국 피해자와의 합의없이 영상을 올린 것으로 논란이 됐다. 극중에서 공주는 앞서 말했듯 자신이 영상에 노출되는 것에 대해 극도로 꺼려한다.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의 피해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피해자에 대한 배려다.


이런 논란은 계속되며 우리 또한 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단죄는 날카롭다. 반면 회복은 부드러워야 한다. 나는 이런 가해자 처벌 중심의 생각이 지금 성폭력에 관련한 사회 문제에 그대로 반영된 것만 같다. 과거의 과오를 다시 행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더 나은 방향을 위해 공주의 마음을 더 헤아려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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