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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바다 3시간전

이기심, 사랑, 꿈

지브리 <바람이 분다> 리뷰

! 스포일러 주의

- 지로의 사랑


시대는 제1차 세계대전, 공간은 일본. 일본의 한 소년인 지로. 그에게는 큰 꿈이 있다. 비행기를 자기 손으로 만드는 것. 하지만 일본의 기술력은 한참 부족하다. 이탈리아에 파견을 가면서까지 기술을 배운다. 어렸을 때부터 줄 곧 그의 꿈은 변한 적이 없는 듯 보인다. 오죽하면 꿈에서 이탈리아에 제일가는 비행기 명장 카프로니 백작과 꿈이 링크되어 그와 함께 비행기를 탔겠는가.


그는 자신의 꿈밖에 모르는 사람 같다. 그나마 다른 관심사는 그의 아내인 "나오코". 꿈과 사랑, 그에게는 그 두 개의 것밖에 없어 보인다. 세상에 무관심하다. 그렇다고 그가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나오코와의 만남 또한 그가 선량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지속될 수 있었다.  


그는 증기기관차에서 나오코를 처음 봤다. 바람에 날아갈 뻔한 모자를 나오코가 잡아준 게 그둘의 첫 만남이었다. 목적지에 다다르기 전 지진(관동대지진)이 났을 때 지로가 나오코를 도와주면서 주인공들은 잠깐 스치듯 만났다. 그 이후로 지로는 친구인 "혼조"의 추천으로 미쓰비시사의 비행기 엔지니어가 된다. 그는 그녀를 만나고 2년, 또 그 이후로 5년 동안 비행기를 구상하고 완성하는데 힘을 기울인다.


그녀와의 두 번째 만남은 한 호텔에서였다. 나오코는 지로를 한 눈에 알아봤던 것 같다. 바람에 날아갈 뻔한 그녀의 우산을 잡아준 지로, 그런 지로를 초롱초롱하게 바라보는 그녀. 그녀는 과거 지진 속에서 도와준 그를 알아본 것이다. 반면 지로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우산을 잡아준 것에 대한 보답을 빌미(?)로 나오코는 그에게 한 걸음씩 다가간다.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하는 저녁 시간, 그는 그의 아버지께 나오코에 대한 사랑 고백을 해버린다. 하지만 아버지의 답변은 그녀가 아프며 그녀의 병명은 결핵이라는 것. 하지만 지로는 그건 것에 개의치 않았고 그녀가 완치할 때까지 기다리겠노라 말한다. 그렇지만 사랑은 뜨거운 법. 나오코는 요양원 치료를 하던 중 이를 박차고 지로에게 달려간다. 그 후 그 둘은 결혼에 골인한다. 그러나 결핵은 나오코 곁에 있었다.

궁금한 점이 있다. 왜 지로는 (결과적으로) 나오코를 병원에 가지 못하게 했을까. 극중에도 지로의 상사인 쿠로가와가 지로에게 요양원을 박차고 나온 나오코를 얼른 병원으로 보내야 한다며, 여기에 붙잡고 있는 이유가 너(지로)의 이기심 때문이 아니냐는 질문을 했다. 하지만 지로는 굳건했다. 그녀와 있고 싶다고 했다. 최대한 참작하여 그 당시엔 결핵이 불치병이었고, 어차피 죽을 것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따라서 그녀에게 죽기 전 사랑하는 연인과 행복한 추억을 주기 위해 붙잡았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곤 나오코를 붙잡은 후에도 지로는 대부분의 시간을 비행기를 만드는 데 보냈다.


두 번째, 그것이 혹시 지로 개인의 이기적인 생각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극을 보면 그래 보인다. 아무리 당시에 결핵에 관한 뚜렷한 치료법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그녀를 데리고 있는 것보단 나았을 것이다. 병원(또는 요양원)에 가서 호전할 수 있는 실낱 같은 가능성이라도 있으니 말이다. 지로는 둘 중에 하나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즉, 비행기를 만드는 꿈과 나오코와의 사랑 둘 다 쟁취하고 싶었다. 그러니 비행기를 만들 수 있는 회사의 품에서 치료 받지 않고 있는 나오코를 품으며 산 것이다. 하지만 나오코는 병원(요양원)에 가는 것이 더더욱 나아보였다.


결과적으로 지로는 선택의 기로에서 나오코가 죽는 데 기여한 듯 보인다. 나오코는 지로의 꿈 속에만 존재하게 된 반면, 지로는 그저 한 여름 밤의 꿈을 꾼 것이다.


  



- 지로의 꿈


개인의 꿈, 바람 등은 중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비행기는 지로에게 (내면이 아닌) 외면에서 우리가 만들어낸 형상이다. 비행기를 만드는 것이 아닌 하늘을 나는 것이 지로의 목표였다면, 오히려 이해할만 했다. 하지만 비행기는 사회, 문화적인 (수요 등의) 반영일 뿐이다. 꿈은 많은 경우에 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내제화한 경우가 많다.


사실 사회의 요구, 바람을 내제화 했든, 혹은 단순한 호기심이든 결과론 앞에선 그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닐 테다. 비행기는 (결과적으로) 전쟁에 이용되었다. 지로는 실제로 가미카제에 이용된 전투기 "제로센"을 만든 기술자이다. 하지만 나는 결과 그 자체로 그에게 죄를 묻고 싶진 않다. 그저 개인의 꿈에 대해서 이를 특별히 개인화시키는 것을 경계하는 것뿐이다. 사적인 대화와 공적인 발화는 다르다. 어찌되었건 지로조차 사회의 요구와 바람에 따른 큰 혜택을 받은 것이며(미쓰비시라는 회사의 일원으로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는 개인의 꿈조차 사회적인 맥락 속에선 특별한 위치를 점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종합해 보자면 나오코와의 사랑 또한 어쩌면 자신의 이기심으로 끝이 났듯이, 비행기를 제작하는 것조차 그가 품은 이기심의 결과인 것이다. 이에 누군가가 해야만 할 일이었다는 변명이 있을 수 있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인 오펜하이머도 이런 정당화를 했다. 핵폭탄의 아버지인 그는 '누군가는 해야만 했고, 자신이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그렇게 했을 것이라'는 말을 줄곧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가 무고한 것은 아니다.


한 젊은 이의 꿈과 그 원동력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 없으며, 세상을 바꾸기 위해선 많은 사람이 필요하며 그 변화엔 많은 이의 욕구가 투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막연한 욕구 그 자체를 비난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선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행위들의 결과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사회는 개개인이라는 구성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구성원들은 그들의 세상을 자신들의 바람대로 바꾼다. 이는 사회의 일정한 죄를 (어쩌면 무고해보이는) 개인에게도 할당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지로는 무고한 것이 아니다.


기술이라는 것은 원래 그렇다. 우리 사회가 예측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예측할 수 없는 변화는 항상 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과학자에게 기술의 죄를 묻는 것이 옳다면, '과학자에게 죄를 물어 기술 발전의 동력을 멈추라는 이야기인가?'라고 물을 수 있겠다. 그에 대한 답은 하지 않겠다. 어쨌든 지로는 자신의 선택에 따라 나오코를 잃었고, 전쟁에 이용되는 비행기를 만들었다. (여담으로 그가 만든 "제로센"은 나오코와 마찬가지로 전쟁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바람이 분다>는 감독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자전적인 영화라고 한다. 반전주의자에 평화주의자인 그는 그의 신념과는 반대로 전투기, 전쟁 무기 등을 좋아한다. 평화를 사랑하지만 모순적으로 전쟁무기광이기도 했던 그는 스스로 돌아볼 필요를 느꼈다보다. 그렇다고 자신, 혹은 자신이 속한 사회를 미화하는 영화는 아니라고 한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무언가를 미화하는 영화는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개봉 당시엔 한국에선 전쟁과 일본 그들이 했던 만행을 미화하는 영화가 아니냐는 비판이 많았다고 한다. 개개인의 현상에 대한 주관적 감각을 굳이 미화라는 비판 때문에 표현하지 못하는 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감각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감각선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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